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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아버지가 전두환 대통령 좋아하고 찬양하는 이유는.....
게시물ID : sisa_572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짜짜로니
추천 : 5/15
조회수 : 755회
댓글수 : 15개
등록시간 : 2008/07/22 00:35:00
전두환 대통령은 구국의 성웅이었다.

우리시대의 참 군인 전두환! 전두환은 매번 위기의 순간에서 국가와 국민을 구출하였다. 영험한 무당처럼 영험한 군인이 전두환이다. 위기의 순간에서 대한민국을 구원한 전두환 대통령! 전두환은 매번의 위기에서 국가와 국민을 극적으로 구조하는 기적적인 구국의 성웅이었다.
전두환 예비역 육군원수! 예비역 육군원수 전두환 장군은 이시대의 진짜 사나이요, 진정한 참군인이었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것이 참군인 정신이 아니면 무어가 참군인 정신이겠는가!

참군인 전두환!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두환 대통령은 늙으막에 줏대없이 비자금을 챙겼다. 비자금만 안챙겼다면 흠잡을 것이 없을 아쉬운 일이다.
늙으막에 전두환 대통령은 왕년의 용기오 뱃심은 온데간데 없고 소심하게 사나이가 29만원 밖에 없다며 체신을 깎는 추태를 보였다. 비자금 챙겼다 어쩔 것이냐며 담대하게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비자금 챙기고 당당하게 말못하고 29만원을 외쳐서 위신을 깎았다지만 전두환은 매 위기마다 조국과 국민을 구한 참군인의 구국의 공적까지 부정해서는 안된다.
전두환 대통령의 무훈은 10.26군사변란과 12.12군사변란을 진압하고 1980년 북한의 특수전대대가 개입된 5.18 광주폭동, 1980년 3월 북한산과 서울에서 검거된 심리전대대, 83년 버어마 아웅산묘소 테러사건, 86년 동해안 무장공비사건, 철원 모 일병 실종변사사건, 87년 대한항공격추와 88년 KAL기 폭파사건, 제5땅굴 발굴 등 1979년부터 1987년의 20회의 간첩내란 폭동사건을 진압하여 대한민국을 위기의 순간에서 구한 탁월한 구조자였다.
한두번도 아니고 20번 넘게 조국을 위기의 순간에서 구한 거룩한 구국의 무훈을 쌓은 것이다. 아! 일해 대영웅 이시여!

광주살인폭동은 대한민국 존립을 위협하는 역대 최고의 폭동이었다. 광주살인폭동을 진압하고 대승을 거둔 것은 전두환 대통령의 탁월한 업적이다.
광주살인폭동은 대한민국을 위기의 순간까지 몰고갔지만, 북한의 특수전대대가 개입하여 2천명이 넘는 살인폭도들의 집단폭동 난투극인 광주살인폭동을 진압한 것은 전두환 대통령의 기념비적인 불멸의 공적! 아! 일해 대영웅 이시여!

광주폭동은 살인폭도들이 공권력에 대항한 반국가적 반사회적 반민주적인 짓이다. 계엄군이 구성되기도 전에 광주살인폭도들이 먼저 궐기하였다.
폭도들은 시청과 도청의 병기고와 예비군부대 경찰지서 현역군대대를 습격, 약탈하여 병기고를 탈취하고 시청직원 도청직원 예비군직원 경찰관 학교교사 병원의사 간호사 소방관 현역군인이 폭도들의 손에 살인 강간 약탈 구타와 방화, 물리적인 폭행을 당하고 살해되었으며 시신은 난도질당하고 불에 유기되었다.
광주살인폭동이 민중항쟁이고 민주화 운동이라면 왜 시청직원 도청직원 예비군직원 경찰관 학교교사 병원의사 간호사 소방관 현역군인이 살해되었나? 살인강간 강도 방화를 해야만이 민주화가 되는가?

무장동원이 가능한 경찰관과 현역군인과 예비군, 행정지휘계통인 시청직원과 도청직원과 학교 교사들을 살해하는 일은 어쩔수 없었다, 불가피했다고 치자. 그러나 자기자신을 방어할 능력도 없는 소방관들 병원의사들 간호사들은 왜 폭도들 손에 구타당하고 죽음을 당해야 했나?
민주화 운동이라면 북한에서 보낸 특수부대원들은 민주화에 어떤 역할을 하나?
광주폭동이 민주화 운동이었다면 왜 선제무장과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나? 광주폭도들이 먼저 관공서와 예비군과 경찰서를 탈취하고 선제무장과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과 실제 있지도 않은 뭐 여학생의 유방을 도려내다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는 등의 사실여부도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유언비어가 나돌았지?

32년 합천출생인 전두환 대통령은 5세때에 대구로 이주했다. 부친 전상환 선생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는 일로 전두환의 조부는 전남화순에서 경남합천으로 야반도주하다시피 해서 이주했다. 합천은 전두환의 14대조가 조선시대때 정여립의 반란에 연루되어, 전주에서 피신해왔던 곳이기도 했다.

비밀리에 이사온 전두환의 집안은 합천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전두환 5세때에 대구로 이사한다. 전두환은 대구에서 중학교와 대구북공고를 졸업했고, 중학교 3년과 공고 3년 수석과 차석을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고 한다. 전두환의 고모들은 경주와 대구로 출가하여 잘 적응하는 등 대구로 이사온 뒤에나 전두환의 집안은 뿌리내리게 됐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의 전두환은 당찬 소년이다. 조선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의거 창씨개명이 유행하였고, 옆구리에 대검차고 다니던 총독부 교육청 소속 훈도들은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훈도가 칼을 대고 창씨개명을 강요했으나 당찬 소년 전두환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절하였다. 아! 일해 대영웅 이시여!

1940년대의 창씨개명은 유행이었다. 창씨개명은 강요였지만 시대정신이라 전국에서 흔하였다. 대구와 인근지역에서 창씨개명을 거절한 집안은 퇴계이황의 종손가와 우당 이회영과 초대부통령 이시영 형제의 집안과 전두환 집안이 유일할 정도였다.
김대중의 창씨개명은 도요다다이쥬, 김영삼의 창씨개명은 가네무라코유, 장준하의 창씨개명은 치요모토 슌가와였다. 훈도가 위협하며 강요한 창씨개명을 거절한 전두환! 전두환은 모두 창씨개명하던 시대에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자신의 이름을 고집한 의식있고 용기있는 조숙한 소년이었다. 전두환 장군님 소년시절에 두 형님이 일찍 사망하여 전두환 장군은 독립운동하러 만주로 떠나신 아버님을 대신해 가장을 하며 학업을 하면서도 생계를 책임질만큼 조숙하고 열심히 삶을 살려는 소년이었다.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이렇게 어려서부터 조숙함과 용기를 지닌 전두환은 뒤에 20회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원한다.

전두환 대통령의 업적은 구국의 무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물가를 잡아 경제를 안정시켰다. 물가는 국민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시장의 공산품 가격부터 쌀과 배추 따위의 농수산물의 가격과 과일과 야채류의 가격, 상회에서 파는 과자와 라면류 등의 부식 소매가격, 전기요금, 수도요금 등은 국민의 민생과 직결되는 것이다.
노태우 집권부터 1년에 물가가 몇번이나 오르는지도 모를만큼 계속 뛰어올랐지만 회사나 공장의 월급은 인상되지 않는다.
자칭 민주화들 집권하고 서민경제와 가정경제의 파탄은 계속됐고 자칭 민주화 정권들의 집권기를 거치며 IMF, 금모으기, 북한에 150억 400억 500억의 퍼주기, 국민연금 빵구 등으로 가정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전두환 대통령 집권때는 물가가 2번 인상됐다. 노태우 대부터는 물가가 년간 몇회나 오르는지도 모르고 전문경제학도가 아니면 알기도 어려우리만큼 물가가 계속 뛰어올랐다.
1980년부터 1988년 제5공화국 8년 동안, 1980년과 1987년 물가는 2번 인상됐다. 물가가 인상되지 않고 안정되니 서민경제와 가계의 지출이 안정적이다. 당연히 경제와 지출의 안정으로 가정경제는 안정을 구가하였던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때의 교육정책은 1983년 두발자율화를 시켰다가 퇴폐풍조가 만연해지자 두발자율화를 84년 다시 폐지하였다.
전두환은 진정한 교육평준화의 기수이기도 했다. 학원과 과외 같은 사교육을 받았는가의 여부도 성적에 직간접적으로 프러스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서 예습복습이 잘 되는 사람도 있고, 집중력이 부족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과외를 하게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과외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나, 소득격차에 의한 공평한 기회가 부여되지 못한다는 맹점 때문에 과외와 사교육에 대한 비판이 크다. 전두환 대통령은 사교육에 대한 엄격한 제한을하였다. 박정희 사후 사교육이 열풍적이자 전두환은 직접 사교육을 엄격하게 단속하여, 소득간의 학력격차가 발생하는 일도 없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 어렵게 유치한 88서울올림픽 사업을 계승하여 준비를 위한 사전에 철저한 노력도 했다. 쓰레기 무단투기와 노상방뇨, 침뱉기와 껌 무단투기를 단속하여 거리를 끗하게 했다.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국위를 선양시킨 것도 전두환 대통령의 노력의 결과물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연좌법도 폐지하였다. 단군이후 우리역사에 계속 존재하던 연좌법을 1980년 9월 9일부로 폐지하자고 강하게 주장한 것도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연좌법 폐지는 단순하지만 전두환 취임 직후의 일로, 대통령 전두환으로는 연좌법 폐지가 첫 업적이라고 봐야 되겠다. 아! 일해 대영웅 이시여!

전두환 대통령은 정당방위하였다.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은 집단폭도들의 난동이 민주주의와 뭔 관련이 있으려나 이해가 안간다.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은 광주살인폭도들이 어떻게 민주화 유공자인가? 광주폭도들은 반역자들이고 체제전복을 꾀한 반국가적 내란전범들이다.
북한의 오진우와 김용순, 김기남이 배후조종한 반국가적 내란사태가 어떻게 민주화에 기여하나? 진정한 민주화의 유공자는 자유를 수호한 6.25 참전용사와 월남전 참전용사와 순직군경들이 민주화에 기여한 진짜 유공자들인 것이다.

비자금 챙기고 능굴맞게 29만원타령을 하며 체신머리 없는짓을 했던 전두환이다 하지만 그는 한두번도 아니요, 무려 20번이나 조국을 위기의 순간에서 구원했다.
민주화에 대한 기여도를 말하라면 20번이나 조국을 위기에서 건져낸 구국의 영웅 전두환이 민주화의 진짜 기여자요 전두환 장군님이야말로 참군인이며 민주화의 참 공로자라고 말할수 있다. 나라가 없이는 민주화도 없다.
민주열사 전두환을 감사할 일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우리민족을 사랑하사 신께서 보내주신 천사인 것이다. 위대한 참군인 전두환 대통령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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