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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번 끄적여 볼께요...
게시물ID : freeboard_571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박용현
추천 : 1
조회수 : 8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04/03/11 14:57:54
베스트 유머 30977 번이었나?

역사속 황당한전투들..

근데 ㅋ 보다보면 정말 말도 안된다는 생각들잖아요..

또 누가 보나마나 지어낸 이야기이겠지..생각했죠

인터넷에 보면 그런게 워낙~많으니까..

그런데 그밑에 리플보면..ㅋ 성웅의 전쟁이란게 있죠..

그거보고 느낀건데 .. 제가 원래 국사에 관심이 좀 많아요...

그중에서도 외침관련이죠..당연히

청산리 전투..다들 아실겁니다

간단히 정리한다면...정규훈련과정 없는 2,000명과 정규훈련과정을 마친 20,000명의 충돌이었죠...

그냥..그냥 그숫자만 들어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청산리 전투에서..일본놈들에 대해서 싸우기전..

그들의 각오를..생각해보셨습니까..

열배가 넘는 적들입니다..누가봐도 상대가 안되죠..

절대 이길려고 전투시작한게 아니었습니다.

그자리에서 그냥 그렇게 죽어도, 그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그 영광스러운 죽음이 일본의 승리에 의하여 훗날 후세들조차 그 희생을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일본놈 몇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겠다고..국가를 위한 그 죽음의 다짐은

그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을 가져왔죠..

적의 사상자 3300여 명, 독립군 전사자 백여 명을 내고 독립군의 승리로 마쳤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한민족은 최강의 단결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우린 반만년이 넘는 역사속에서 수천번의 외침을 스스로 막아왔습니다..

땅이 넓은것도 아니고 돈이 있는것도 아니고 인구가 주변국에 비해 많은것도 아닙니다..

그 엄청난 전쟁을 이 자리에서 다 기록하는건..힘들지요

한민족은 세계 그 어느곳에 내놓아도 자랑스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그 엄청난 단결력과 함께 엄청난 냄비근성이죠..ㅋ

항상 외적의 침입은 그렇게 막으면서...내부의 분열은 한번도 막지 못하는..

대단하면서도 한심한..그런 민족이죠..

오늘 개교기념일이라서 노무현대통령 기자회견 봤습니다..

참...;; ㅋㅋ 기가 막힙니다.

그냥~ 한번 생각나서 끄적여 봤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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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 ( 靑山里大捷 )  

  요약  
 
  
 
 1920년 김좌진(金佐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靑山里) 일대에서 대파한 전투. 3·1운동 이후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에 한국에서 망명해 온 애국지사와 청년들이 늘어나고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무기 구입이 쉬워지자 간도지방 독립군부대들은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여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설명    
 
  
 
 1920년 김좌진(金佐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靑山里) 일대에서 대파한 전투. 3·1운동 이후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에 한국에서 망명해 온 애국지사와 청년들이 늘어나고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무기 구입이 쉬워지자 간도지방 독립군부대들은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여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만주·간도지방의 독립군 활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토벌작전을 세워, 20년 10월 훈춘사건을 조작, 이를 구실로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였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본부를 두고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일본군 출병에 앞서 중국군측으로부터 독립군 토벌 방침을 통고받은 독립군부대들은 허룽현[和龍縣] 이도구(二道溝)·삼도구(三道溝) 방면으로 이동하였고, 북로군정서도 안도현(安圖縣)으로 이동하여 서로군정서와 합류한 뒤 백두산지역에 새로운 기지를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 이동을 시작하였다. 10월 10일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한 북로군정서부대는 부근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부대와 더불어 일본군 간도출병에 대한 대책을 협의한 결과 김좌진부대는 일본군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일본군은 북로군정서에 대한 협공작전을 시작하여 함경북도 나남(羅南)에서 제21사단이 북상하는 한편 시베리아에 출전했던 제19사단이 장고봉(張鼓峰)을 넘어 남하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접한 북로군정서는 백두산 이동을 포기하고 허룽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삼림 속의 유리한 지형을 찾아 매복하고,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 1 제대는 김좌진이, 전투요원인 제 2 제대는 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게 하여 전투에 돌입하고 있었다. 10월 21일 오전 9시경 야스카와[安川]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부대 매복지점으로 들어서자 독립군들은 일제사격을 가하여 일본군을 전멸시켰고, 뒤이어 야마다[山田]가 지휘하는 본대와 독립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지만,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 반격에 일본군은 200여 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패주하였다. 대승리를 거둔 독립군은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여 일본군 포위망을 완전히 벗어났다. 김좌진부대가 철수하던 때에 홍범도부대도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일본군 400여 명을 전멸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22일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부대의 제1·2제대는 그 곳 주민들로부터 부근 천수평(泉水坪)에 일본군 기병대가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곧 그곳으로 이동, 일본군 기병중대를 전멸시켰고, 시마다[島田] 중대장이 가지고 있던 문서를 통해 일본군 사단사령부가 어랑촌(漁郞村)에 있음을 확인하고 어랑촌 서남쪽 마록구(馬鹿溝)고지를 먼저 점령하였다. 일본군 사령부도 천수평에서 도망쳐 온 일본군으로부터 독립군 소식을 듣고 즉시 병력을 출동시켜 2000명 대 2만 명의 대혈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적의 사상자 3300여 명, 독립군 전사자 백여 명을 내고 독립군의 승리로 끝났다. 백운평·천수평·마록구에서 벌어진 일련의 청산리싸움은 독립군이 일본군 간도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서, 한국독립군 전사들이 만주에서 거둔 최대 승리였다. 이 싸움에서 치욕적인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만주 전역에서 한국동포를 무참히 학살한 간도참변(間島慘變)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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