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담 두 번째 시간, 이영훈 교수는 자주국방의 의지가 없는 나라는 강대국의 흥정의 대상이 되고 만다며 100년 전 구한말 조선 지배층들의 실상을 맨눈으로 보라고 주문했다. 일제 식민지시대 신분의 평등은 이뤄졌지만 계급적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지적에 대해 이 교수는 일제시대 경제성장의 과실이 지주와 상공업자에게 주로 돌아간 것은 사실이라며, 농촌 소작농들은 여전히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고 설명했다. 일제시대 다층적인 조선인들의 삶을 대담에서 살펴보자.
황인혜: 교수님께서는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라는 책에서 첫째, 상품경제가 성립하고 둘째, 노비와 같은 예속 인구가 많이 감소하고 셋째, 생산수단인 토지를 둘러싸고 사실상 사유재산권이 성립했다는 점에서 18-19세기 조선후기는 세계적인 범위에서 높은 수준의 문명에 속하다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러나 1860-1880년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했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하셨는데요, 당시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요.
“조선왕조의 경제는 1860-1880년대 매우 심각한 위기의 상황을 맞게 됩니다. 우선 일본과의 무역이 쇠퇴했습니다. 18세기 중엽 이후 일본은 중국에서 수입하던 비단을 국산으로 대체합니다. 조선에서 수입하던 인삼도 인삼의 씨를 몰래 훔쳐가 국산화합니다. 이런 이유로 1740년대 80%에 달했던 양국의 교역이 20%대로 떨어집니다. 오늘날 국민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으로 수출할 물건이 없어지면 무언가 다른 상품을 개발하여 수출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수출대체정책을 조선왕조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또 중국에서 비단과 모피 등 사치품이 너무 많이 수입되어 큰 규모의 적자가 계속되었습니다. 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일본처럼 경쟁력 있는 국산품을 개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입 비단을 막아야 됩니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이러한 산업정책 역시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1834년 조선왕조는 중국으로부터 비단 수입을 사실상 자유화합니다. 그 결과 국내의 비단 산업이 황폐해지고, 금과 은의 국제화폐가 모조리 중국으로 빨려들어 가고 말았습니다. 조선왕조가 왜 그랬던가 생각하면, 역시 경제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가 정치나 종교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의 영역으로 성립하는 것은 서유럽에서 16세기 이후 근대사회가 되어서입니다. 조선은 아직 그 단계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지요.
단위토지당 쌀 생산성(1860-1926) 전남 영암군 장암리 문씨 마을의 족계(族契) 자료에서 채집된 데이터이다. 1두락당 지주에 지불된 지대량(벼․두)을 보여주고 있다. 두락(斗落)은 ‘마지기’라고도 하는데 한 말의 볍씨를 뿌리는 논 면적을 말한다. (출처 -『대안교과서』) | |
또 18세기 중엽 이래 인구 증가 때문에 한반도 산림이 황폐해집니다. 온돌에 쓰일 연료 시목의 채취가 무방비로 이루어졌고, 또 식량을 증산하려고 산지를 개간하여 화전 농사를 많이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산지가 황폐해지니 조그만 비에도 홍수가 나고 토지가 떠내려 와 농사를 망쳤습니다. 18세기 중엽에 비해 19세기 말이면 거의 3분의 1 수준으로 토지생산성이 감소합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각종 조세는 줄지 않아 농가의 큰 부담이 됐습니다. 1840년부터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민란의 물결은 1860년대부터 더욱 거세게 일어 1894년 동학농민봉기에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선왕조의 정치적 통합력은 현저히 약해졌어요. 이런 시기에 제국주의가 침입해 들어오자 안팎에서 감당할 수 없는 위기가 조선을 덮친 것이죠.”
구한말 서울 근교. 일하는 농부들 뒤로 헐벗은 산이 보인다. (출처 -『대한민국 이야기』) | |
황인혜:조선왕조가 잘못했다고 해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은 정당화 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함으로써 참 성공을 거둔 것 같지만 성공을 거둔 나머지 너무 자신들의 국력을 과신해서 만주를 침략합니다. 만주침략이 성공하니까 더 과욕을 부려 중국침략을 하는 통에 결국은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은 한반도 병합으로부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일본으로 봐서도 비극이었습니다. 비극의 첫 단계였죠. 일본인 대부분도 침략전쟁에 대해 흡족하지는 않지만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일본이 반성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되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주체적으로는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역사로부터 배울 것인가, 그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조선왕조는 자주국방과 자립갱생의 의지가 없었어요. 백성들에게 근대적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고 국민개병제를 통해 군대를 조직해 외부의 적을 막아내야 했지만 고종황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논쟁은 『고종황제 역사청문회』에 잘 소개돼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지배층의 의지가 확고하지 않는 나라는 다른 나라로부터 존경받지 못합니다.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 테프트 조약을 맺을 당시 미국은 ‘조선의 고종황제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팔뚝 한번을 휘두른 적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그런 경멸을 받으면 흥정의 대상이 되고 말아요. 그러한 역사의 처절한 진실을 우리 후손들이 맨눈으로 보면서 반성하고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푸른역사 l 2004년 ‘교수신문’에서 고종황제의 업적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묶어 낸 책이다. | |
김초롱: 『대한민국 이야기』를 보면 “일제시대때 쌀이 수탈된 것이 아니라 수출된 것이다 … 조선인의 총소득이 커져 전체 경제가 성장하게 됐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의 <조선의 소작 관행>(표1-1)을 보면 자작농에서 소작농으로 몰락하는 농민이 크게 늘어나고 있으며,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다수의 일본인 지주들이 조선의 대지주로 등장했다고 합니다. “농촌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는 소작, 빈농들까지 생활수준이 개선됐다 이야기하긴 힘듭니다. 일제시대 때 가장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면 인구증가입니다. 1910년대 인구통계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대체로 1700만 명 정도였습니다. 1945년 당시는 인구센서스가 실시돼 정확한 자료가 있는데요, 2400만 명이 좀 넘습니다. 그런데 해외로 빠져나간 인구가 300만 정도 되니, 다 합하면 2700만 명입니다. 1700만 인구가 2700만이 되었다는 것은 35년 동안 대단히 급격한 인구증가가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토지는 기껏해야 3~5%밖에 증가하지 못했습니다.
인구증가는 1890년부터 종두법이라는 근대적인 위생이 도입되면서 나타납니다. 1920년부터 늘어난 인구가 결혼하고 분가하면서 농촌에 소작농이 굉장히 증가하게 됩니다. 농촌의 과잉인구로 경지규모가 영세해지면서 소작농 등 빈농들의 빈곤은 조선시대 말이나 일제시대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춘궁기에 생존의 경계선상에 놓이는 극단적인 빈곤은 크게 봐서 1960년대 전반까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김형주: 쌀이 수탈이 된 것이 아니라 수출된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생산된 쌀의 거의 절반이 일본을 건너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쌀이 건너간 경로는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수출이라는 시장경제의 경로를 통해서였습니다. 수탈과 수출은 매우 다릅니다. 수탈은 조선 측에 기근 이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지만, 수출은 수출한 농민과 지주에게 수출소득을 남깁니다. 쌀이 수출된 것은 총독부가 강제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쌀값이 30% 정도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의 과실은 주로 지주들이 차지했습니다. 지주들은 증대한 소득을 은행이나 상업회사, 광산 등에 투자했고 그에 따라 조선의 상업과 공업이 발달했습니다.”
일본으로 수출될 쌀가마니가 쌓여 있는 군산항 (출처 -『고등학교 한국사, 법문사』) | |
김승재: 그렇다면 일제시대 신분상 평등사회는 이뤄졌지만, 경제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돼 더 큰 차별을 낳은 것은 아닌지요. “일제지배의 현실적 특질을 묻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질문입니다. 식민지와 식민지 본국은 경제적 불평등한 관계에 놓이는데 이를 제국주의적 분업관계, 불평등 교환관계라고 합니다. 일제는 19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반도의 공업화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한반도를 자기들의 공산품 판매시장과 부족한 쌀을 공급하는 식량공급원이라는 식민지적 지배구도로 설정해 놓았던 것입니다. 식민지적 지배구도가 그렇게 설정돼 있는 가운데, 양국 시장을 자유롭게 통합해 놓으니 시장원리에 따라서 대량의 쌀이 일본으로 수출되고, 지주들이 경제적으로 번창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가 계속되는 한 식민지 조선은 영원히 농업국가로 머물 수밖에 없고, 그러한 제국주의적 지배구조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 점은 당시 사람들도 많이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1929년에 세계 대공황이 닥치면서 변화가 발생합니다. 요새 한국농민들이 쌀수입 을 반대하듯이 일본농민들이 조선쌀 때문에 못살겠다며 조선쌀 수입 반대운동을 펼칩니다. 조선쌀 수입이 일본 내에서 정치적으로 상당히 부담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또 1931년도부터는 일제는 만주를 침략하고 중국침략을 준비하면서 한반도를 군수병참기지의 공업지대로 육성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때부터 지배정책이 서서히 지주를 억압하고 농민을 육성하는 정책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게 1930년대 이뤄진 농촌진흥운동, 자작농지설정사업입니다. 소작농에게 금융조합을 통해 돈을 빌려주고 지주의 토지를 사게 합니다. 지주에게는 강제로 토지를 팔게 합니다. 이런 이유로 지주제는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35년간의 식민지 역사에서 1929년을 전후해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겠습니다.”
김승재: 저는 조선의 근대화는 조선인들이 자력을 하지 못한 기형적 근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화의 결과도 조선인들에게 100% 이롭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토지조사사업 같은 경우도 조세 수취를 목적으로 진행된 것이고 그 결과 경제적으로 지주층의 이익이 굳건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가 조세를 수취하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실체와는 조금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일제는 자기들이 새롭게 확보한 영토의 토지자원이나 산림자원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근대적인 측량법으로 전국토를 측량해 5만분의 1 지도를 만듭니다. 그 후 산림과 경지로 토지를 구분하고 전국의 수천만 필지 경계를 조사해 각 필지마다 소유자가 누구인지 사정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죠. 그렇게 조사를 해놓고 보니까 당초 예상한 것 보다는 경지가 40-50% 정도 많아졌어요. 총독부는 토지가격의 3%의 지세를 부가할 예정이었지만 예상 밖의 대규모 토지가 조사되자 지세를 1.3%로 낮춥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전국의 모든 토지에 대해 토지대장, 지적도, 등기부가 작성되었습니다. 국가가 토지재산에 대한 증명제도를 완비함으로써 토지 거래가 활성화되고 토지를 담보로 금융이 발전했습니다. 금융조합과 식산은행이 제공한 금융은 토지의 담보능력이 있는 지주들에게 유리했습니다. 그 결과 식민지시기에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제가 급속히 발전한 것입니다.”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일필지 측량(경기 고양, 출처 -『대안교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