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인 6.25에 대한 글이 없는것 같아서 ;; 비도오고 애인도 없고 시간은 많아서 머릿속에 있는 내용도 정리 해볼 겸 적어봅니다.
6.25에 대한 주관적인 의견이 반영된 글이니..
어느정도 자체정화해서 읽어주시고 사실에 반하는 내용이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전공이 화공이라서ㅜㅜ 제가 알고있는 부분에 오류가 있다면 언능 바로잡고 싶네요 ^^;
..
모두가 아시다시피 2차세계대전이 끝난해인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나라를 되찾습니다.
프랑스처럼 자주독립이 아니라 패전국이 된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얻어낸 광복이죠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자주독립하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이로인해 물거품이 됐다고;;)
일본이 미국한테 깝쳐서(영화'진주만') 열받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면서 2차세계 대전은 끝이 납니다.
여담이지만 미국은 히로시마 뿐아니라 일본의 전 국토에 여러발의 핵을 쏴 일본을 초토화 시키고
군사력을 키울 수 없게 끔 농경사회로 후퇴시켜 버리려고 했습니다.
아무튼 세계사에는 약하므로 ㅋㅋㅋ일본이야기는 일단 여기까지하고
히로시마에 원폭투하 후 일왕이 항복하고 우리나라는 열강에 의해 대혼돈에 빠지게 됩니다.
소련은 소련군대위출신인 김일성으로 지도자로 세우려하고
미국은 레지스탕스인 김구를 지도자로 세우려 하지않고 이승만을 지도자로 세우려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승만은 광복 전 독립군이 하와이에 세우려던 공군창설을 미국에 알려 와해시키고
하와이에서 나오는 독립자금을 손에 쥐고 개인의 영리를 추구합니다.(덕분에 독립군이 많이 고생한..;;)
미국의 입장에서 국익에 도움이 될 이승만을 내세운건 당연합니다.
또 삼천포로 빠지네ㅠㅠ
아무튼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는 팽팽하게 대립하고 두세력이 냉전을 맞이하면서 한반도 통일협상은 결렬되고
우리나라는 38도선을 중심으로 2개의 나라가 됩니다.
비극의 시발점이죠.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받아 남한에 비해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게 됩니다
(당시 남한에 비해서 북한이 훨씬 잘살았다고..;)
당시 남한은 여러세력의 반대하에 세워진 이승만 정권이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우선은 친일세력을 그대로 중용하면서 반쪽짜리 해방국가가 되죠(자주독립이 아니라서 벌어졌다고 볼수있는듯)
이때 친일파 처단을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이승만 정권에 가로막혀 친일파척결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한국의 빠른 사후관리를 위해 미국은 친일파를 그대로 중용하는게 편한 상황이라고 쳐도 이승만은 뭐지ㅡㅡ; 독립군 코스프레만 열심히 한듯)
또 정치적으로 대립각이 세워지고 경제는 초토화 수준이었습니다.
물가는 치솟고 정부는 적자적자적자인 덕분에 이승만의 지지세력은 14프로 정도..(210석에서 30석이 지지)
이렇게 취약한 기반과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국의 원조를 유도합니다. 이 때 이끌어 낸 한미동맹은 참 잘한일이었습니다만.!!:;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길보다 무리수였던듯) 미국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한국전쟁 발발 1년 전부터 38선에서 소규모로 충돌이 종종 발생하였습니다)
결국 미국은 원조를 끊었다가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 했다가 군사력을 제공한다고 하는둥 왔다리 갔다리합니다.
당시 미국정세도 한반도를 놓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나 봅니다 ;; (이부분은 잘 모릅니다)
이렇게 이승만 정권은 불확실한 미국의 원조와 ㅄ같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북진통일을 하려고 발악하는데
반면, 북한은 통치체제를 안정화하고 남침의 명분을 차곡차곡 쌓아 나갑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경 북한은 대대적으로 남침을 시작합니다
썰을 풀자면 당시에 농번기라 병사들이 농사일을 도왔는데(드라마 로드넘버원 보면 잘표현함) 한창 바쁜 시기라 많은 군인들이 농사일을 돕고 쉬는 날인 일요일 오전에 시기적절하게 남침을 감행합니다.
(북한이 남한에 쳐들어와서 남침이라고 합니다만 한국전쟁에서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것들이 많죠 6.25가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누가 먼저 때렸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안될수도 있습니다.)
북괴군은 4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만에 경상도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합니다.
이때 미국이 유엔이사회를 개최하여 (당시 소련은 중국때문에 이사회에 불참하여 거부권행사없이 미국안이 통과 되어) 국제연합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국제전이 됩니다.
만약 이승만이 북진통일이라는 무리수보다 남한체제의 안정화를 꾀하고 한미동맹이 북진통일의 도구가 아니라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면 6.25때 터무니없는 군사력으로 3개월만에 발리진 않았을지도.. 아니 한국전쟁이 1950.6.25에 발발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각설하고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당시 이승만과 미국의 북진 주장으로) 유엔군은 평양을 넘어 압록강까지 올라갑니다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세는 다시 역전 되었고
총사령관인 맥아더는 만주를 잿더미로 만들자고 했지만 세계대전으로 확대를 우려한 미국은 맥아더를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시켜버립니다.
'노장은 죽지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ㅠㅠ
그때 만주에 핵을 쐇더라면 우리나라 통일이 되었을지 세계대전으로 번져 우리나라가 지도에서 없어지게 되었을지;;
아무튼 38선 근처로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휴전회담은 계속 됩니다(고지전을 보면 나옴)
이때 이승만은 또 무리수를 던지기 시작합니다.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하고 반공포로를 석방해버립니다.
(이승만의 이 무리수가 얼마나 무모했는지는 당시의 남과 북의 군사력을 보면 쉽게 알수있습니다 거의 초등1학년과 최홍만과의 싸움 수준)
이승만이 말도 안되는 똥을 싸지르자 미국은 한미상호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고 경제원조를 약속하고 이승만을 무마시키며 휴전협상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여기서 발생한 문제는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는데
한국전쟁은 남과북이 싸웠는데 휴전 협정은 남한이 빠진 북한과 유엔군이 체결해버립니다.
(지금의 nll도 문제도 바로 남한없는 유전협정이 낳은 결과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한국전쟁은 150만여명의 사장자와 360만명의 부상자를 냈고 국토는 초토화가 됩니다.
그 예로 평양의 도로가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도시가 된것은 목표물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폭격을 한 덕분이죠;;
당시의 유엔군의 엄청난 화력이 북한주민들 사이에 반미주의를 자리잡게 했습니다.
이런 반미 주의가 독재체제를 유지해 나가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기도 합니다만..;;;
무튼 이 3년 1개월동안 민족간의 전쟁 때문에 겨레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이사이 일본이 아예 전쟁을 할 수 없게끔 농경사회로 후퇴시키려 한 미국의 계획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일본을 전초기지로 군수기지를 세우고 군수품을 우리나라로 수출하면서 고도의 성장을 하게되고 그를 바탕으로 엄청난 군사력을 다시 얻게 됩니다.
뭐 그냥 일본 호구인증하는 것도 아니고 ㅅㅂ
또 사설이 길어졌네요;;;ㅈㅅ
이렇게 6.25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은 요즘말로 멘붕상태가 됩니다.
아니 멘탈도 붕괴되고 피지컬도 붕괴되죠 피멘붕;;;
한국전쟁이 싸지른 똥이 우리나라에 어떤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면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바로 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는것 같습니다.(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사견이 포함된 글이니 자체 정화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극좌와 극우간의 복수전이 반복되고 이승만에 대한 비판도 높아지고 있던 때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반공태세를 강화하는 분위기) '우리편 아니면 빨갱이'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낳게 되고 좌우가 극명하게 대립하게 되면서 중도.온건세력은 배척당하고 오늘 날 진보정당을 좌익빨갱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아마 이때 부터 시작 된것 아닐까 싶습니다;;
본래 정치의 목적은 같지만 가는길이 보수냐? 진보냐?의 차이일 뿐일텐데
이때 낳은 이분법적 사고가 타협과 상생보다는 대립각을 세우며 탄압하고 .. 빨갱이로 몰아 많은 사람을 죽이고.. 끔찍합니다.
지금도 진보와 보수간의 대립은 날이 서있는데;;
이런 대립으로 인해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정당간의 싸움이 되는 정치판이 되고 있는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위와같은 정치싸움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아닌 공산주의타도를 외치게 되면서 권위주의가 합리화 되는 분위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6.25는 경제적으로 더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전후 한국경제는 자립성장이 불가능하게 되버렸습니다.
때문에 미국의 도움을 받아 의존적 성장을 하게 됩니다.
의존적 성장은 어쩔수없는 선택 이었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대외의존성을 심화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됩니다만 각설하고
이런상황에서도 군부를 급격히 성장시킵니다.(그럴수밖에 없었겠지만;;정당히 좀 하지) 덕분에 6.25전쟁때와는 비교도 안될만큼의 규모로 성장시켰고 불균형 성장을 야기합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정치에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게 된겁니다.
이러던중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반부정 반정부 항쟁을 일으킨지 13개월 만인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군부정권이 자리잡게 됩니다;;
무튼 한국전쟁은 한국근현대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올바른 안보의식과 지금의 우리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선 6.25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 같아서
이번 6.25 63주년을 맞아 머릿속에 날아다니는 생각을 정리 해보았습니다.
지역뉴스를 보다 광주전남에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여 군번줄도 없이 6.25에 참전한 용사들이 국가유공자는 개뿔 행사에 드는 비용도 회원이 들이 사비로 부담하는 실정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나의 목숨을 바쳐 지켜낸 나라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이제는 살아있는 참전용사는 7명 뿐.. 이들의 죽음이 인정받기는 커녕 역사속으로 조용히 사라지게 될까봐 겁이 납니다.
오징어 커플님들아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유가 뭔지 물었을때;; 방심해서 그래~ 라고 말하며 뽀뽀하지말고
진지먹고 설명하면서 서로가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대해 토론해보는 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