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10월 12일,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는 선관위 주최로 "자민당·사회당·민사당 3당당수연설회"가 열리고 있었다.
오후 3시경,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 일본사회당 위원장이 연단에 올라 연설을 시작했다. 아사누마 위원장의 연설은 초장부터 우익들의 야유로 정상적인 진행이 어려웠다. 급기야 연설이 중단되고 사회자가 자제해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아사누마 위원장은 우익들의 고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민당의 선거 정책에 대한 비판을 토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 청년이 일본도를 들고 무대 위로 뛰어올라 아사누마 위원장을 찔렀다. 순식간에 범인은 길고 날카로운 일본도로 아사누마 위원장의 가슴을 두번이나 찔렀다.
첫번째 피격의 순간을 찍은 사진
아사누마 위원장은 출혈과다로 병원에 옮기기도 전에 사망했다.
범인은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17세의 야마구치 오토야山口二矢라는 우익 행동대원이었다. 일본애국당이라는 극우정당의 당원인 그는 11월 2일 도쿄의 소년구치소 벽에 치약으로 "천황폐하만세"라고 쓰고 목을 메 자살했다. 야마구치의 아버지는 육상자위대의 자위관이었다.
1차 가격 후 칼을 피하는 아사누마 위원장을 향해 또다시 칼을 휘두루는 암살범
아사누마 위원장의 참혹한 죽음은 당일 TV를 통해 일본 국민들에게 전달됐다. 그리고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전해져 보는 이들을 경악하케 했다. 세계는 태평양 전쟁이 끝난 지 15년이 지났지만 일본은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요즘 일본의 헌법개정논의를 보고 있으면 45년 전의 사건이 떠오른다. 칼을 드고 달려드는 우익광신도 앞에 경호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아사누마 위원장처럼, 일본의 평화헌법도 칼을 들고 달려드는 우익의원들 앞에서 무방비로 놓여있다.
더 이상 아버지와 아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국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평화헌법의 꿈은 전쟁을 경험했던 사회주의자 아사누마의 꿈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