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문재인 민주당 의원의 북한산 둘레길 산행은 여러모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지난 대선 때 자신을 취재했던 ‘담당기자(마크맨)’들과의 첫 산행이었다는 점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국가정보원의 대선ㆍ정치 개입 의혹’에 대한 문 의원의 거침없는 발언이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문 의원의 이날 발언을 놓고 아직까지도 설왕설래하고 있습니다. 문 의원은 그날 ‘박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 ‘박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라는 언급을 동시에 해 실제 문 의원의 심중이 어디에 더 실려 있는가를 두고 해석이 분분합니다.
문 의원은 이날 작심한 듯 “분노한다”라는 단어를 연거푸 사용하며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고 격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는 “대선 때 박근혜 당시 후보가 자기를 음해하기 위해 민주당이 조작했다고 공격하면서 사실이 아닐 경우 제가, 문 후보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었다”라며 “뒤집어 말하면 사실로 드러나면 박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 아니겠나. 저는 박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좀처럼 ‘신사의 품격’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문 의원의 평소 언행을 생각해 보면 이례적인 발언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문 의원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이제와서 박 대통령에게 선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면서 문 의원은 “박 대통령이 제대로 수사해 엄정하게 처리하고, 국정원과 검찰을 바로 서게 만드는 계기로만 만들어 준다면 그것으로 책임을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촉구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 사건을 엄중히 처리해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북한산 둘레길 취재에 나선 마크맨들은 60여명이나 됐기 때문에 기사가 쏟아졌습니다. ‘박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는 제목의 기사와 ‘박 대통령에게 책임 물을 수 없다’는 제목의 기사가 동시에 나왔습니다. 안철수 무소속 후보와 김한길 민주당 대표에 대한 평가를 기사 포인트로 삼은 기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이날의 화제는 단연 박 대통령에 대한 문 의원의 언급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집으로 배달된 신문의 제목들은 대부분이 ‘문재인, 박 대통령에게 책임 못 물어’, ‘이제와서 박 대통령에게 책임 물을 수 없고…’식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여기서 새로운 행위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청와대 정무수석실입니다. 청와대 정무수석실은 이날 밤늦은 시간 ‘문재인, 박 대통령이 책임져야’라고 기사 제목을 단 매체에 전화를 돌려 제목을 바꿔줄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정무수석실은 국회 출입기자가 아닌 청와대 출입기자를 통해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실제 기사 제목이 바뀐 매체가 있습니다.
기자들은 종종 출입처로부터 기사제목이나 내용에 대해 항의를 받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번 청와대의 ‘요청’이 적절했을까를 두고는 말이 많습니다. 청와대가 요청할 자격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기사는 박 대통령을 적시하긴 했지만 분명히 문 의원을 취재한 기사였고, 문 의원의 발언을 실은 기사였기 때문입니다. 또 대언론 업무를 담당하는 ‘홍보수석실’이 아닌 ‘정무수석실’이 요청한 게 과연 적절했느냐의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박용진 민주당 대변인은 19일 기자를 만나 “책임 회피를 위한 입단속에만 열 올리는 것이 대단히 실망스럽다”며 “(청와대가)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문 의원의 공보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김경수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장도 “청와대의 이번 행동은 이치에 맞지 않다”며 “청와대발 기사도 아니지 않냐.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청와대는 최근 국정원 사건과 관련해 엄정 중립 입장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지난 7일 “(국정원 사건 수사에)손끝 하나 대고 있지 않다”며 청와대 개입설을 전면 부인했습니다. 이 홍보수석은 당시 민주당 관계자들과의 면담에서 국정원 관련 검찰 수사에 대해 “(채동욱)검찰총장은 MB(이명박)정부가 임명한 사람이다. 그 검찰이 이명박 정부에 대한 수사를 하는 것”이라며 “새 정부 입장에서 ‘이보다 객관적인 수사를 할 수 있을까’ 싶어 오히려 긍지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청와대가 말하는 ‘이보다 객관적인’, ‘손끝 하나 대고 있지 않다’는 말이 무엇인지 ‘정무수석실’이 아닌 청와대 홍보수석이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