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날 역게 눈팅만 하는 오징이었지만 이런 글도 한번 올리고 싶어서 이렇게 해봅니다 ㅠㅠ
*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 첫번쨰 전투 - 그라니쿠스 전투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에서의 첫번째 전투로 다리우스가 아닌 페르시아 총독과의 첫 회전이다. 그라니쿠스 강은 소아시아 북서쪽에 트로이 유적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여기서 대국 페르시아를 상대로 한 서전을 승리로 시작하게 된다.(b.c 334)
1. 병력과 지형
알렉산드로스 - 마케도니아군과 그리스동맹군 연합군으로 기병 5,000에 보병 30,000(팔랑크스, 경무장 보병 포함)
페르시아 총독 - 페르시아 보병 (levy, 징집병) 12.000, 그리스 용병 (보병 5,000), 페르시아 기병 15,000
총병력을 비교하면 알렉산드로스 쪽은 약 3만 5천, 페르시아 총독은 용병포함하여 3만 2천이다. 보명과 기병비율을 따져보면 알렉산드로스 쪽은 1:6이고 페르시아는 거진 1:1이다. 기병만 놓고 보면 페르시아군이 3배로 압도적이지만, 총병력은 약간 열세에 해당한다. 이쯤에서만 해도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일종의 무력시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b.c 396년에 소아시아로 진격해온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때처럼 소아시아에 있는 그리스 식민도시를 두고 그에 대한 파워게임에서 이기려는 정도로 생각한게 아닐까?
그리스 용병대장으로 페르시아쪽으로 이 전투에 참가하게 되는 로도스 출신의 멤논만이 알렉산드로스의 의중을 제대로 본 듯하다. 또한 위 전력으로 알렉산드로스에게 이길수 없음을 알고, 알렉산드로스의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청야전술(주거지와 주민을 비우는 전술)을 펼치고, 보급이 여의치 않아 후퇴하는 마케도니아군을 육지와 해전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한편,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분열하기 쉬운 경향을 이용하여 배후에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폭동을 사주할것을 제안하지만, 페르시아 총독들은 그의 제안을 무시해버린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총독들은 멤논이 그리스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믿지 못하고 거의 보병에서는 유일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용병을 후위로 보내버리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아주 기뻐했다고 한다.
뭐 일단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대한 폭동사주야 그것이 성공하든 하지 않든간에 페르시아 자신의 그리스 침공이 전부다 보급실패로 인해서 전쟁을 진 것을 생각했더라면 멤논의 주장을 받아드렸을까? 그리스군을 너무 얕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임진왜란에도 이순신장군에 의해 병참에서 쓴맛을 본 일본군이 결국 물러난것과 마찬가지로 병참은 전쟁에 기본이다.
어찌햇든 지형은 양군이 그라니쿠스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형태로 시작된다.
(부연설명하면
빨간색 직사각형 - 그리스 용병, 빨간줄 사선사각형 - 페르시아 기병,
가운데 노란색 줄 - 강 언덕
강
왼쪽(파르메니온 지휘) 파란줄 사선 and 파란색 사각형- 테살리아 기병 (그리스 기병) and 경보병
중앙 - 팔랑크스
오른쪽(알렉산드로스 지휘) 파란사각형 - 히파스피스트
파란줄 사선 and 파란사각형 - 마케도니아기병, 알렉산더와 컴패니언 기병, 경보병)
(히파스피스트는 큰 방패를 들고다니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팔랑크스보병보다는 짧은 창을 사용하는 부대로 중앙의 팔랑크스보병과 기병대사이의 틈을 메꾸며, 융통성있게 방어하는 부대를 말한다.
컴패니언 기병 - 기병의 보다 효율적인 쓰임을 위한 중무장 기병)
2. 전투
그라니쿠스강에 먼저 도착한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용병을 믿지 못하고 강둑넘어 후위에 두고 기병을 전위에 배치하고 바로 뒤에 페르시아 보병을 배치한다. 조금 늦게 도착한 알렉산드로스군은 위 사진과 같이 배치된다.
도강이 새벽시간에 몰래 되엇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설명하는 학자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도강에 별 저항을 받지 않은 것을 보면 새벽에 몰래 된거 같으나, 정정당당한 회전을 알렉산드로스가 좋아햇다는 것을 생각하면 좀 의심스럽기도 하다. 어찌됏든 간에 알렉산드로스군이 강을 건너서 페르시아 군을 공격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전투는 알렉산드로스군의 좌익을 지휘하는 파르메니온이 경보병과 그리스기병의 양동작전으로 시작됐다. 알렉산드로스가 지휘하는 우익보다 약한 파르메니온의 좌익에 대해 페르시아 군은 자신의 우익에 상당한 병력을 배치했던 관계로 파르메니온의 양동작전을 격퇴시킬수 있었다. 페르시아 우익기병대가 파르메니온을 격퇴하는 그 순간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정예기병이 중앙을 들이쳤다. 페르시아기병도 꽤나 선전했으나, 중앙기병대를 지휘하던 페르시아 총독 스피트리다테스가 죽었다. 알렉산드로스도 페르시아 기병의 도끼를 맞고 죽을 뻔 했으나 다행이 부장 클레이토스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이후 술취한 알렉산드로스의 난동으로 창에 찔려 죽는 클레이토스와 알렉산드로스의 이 에피소드는 영화 알렉산더에서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묘사된다. 그런데 알렉산더의 일생을 단 3시간 짜리 영화에서 다 담으려는 감독의 욕심 때문에 스토리는 간데 없는 다큐멘타리 영화가 되어버렸다. 뭐 약 전반부에 묘사되는 15분간의 가우가멜라 전투만 봐도 영화의 90%는 본 셈이다. -_-;;)
중앙기병대가 모두 퇴각하자 중앙이 비어버렸고, 이어 중앙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부대가 강을 건너 중앙을 장악하기 시작햇다. 페르시아 중앙의 기병대가 비어버린 자리에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부대를 만난 페르시아 보병은 상대가 되질 못햇다.(가끔 페르시아군이 보이는 소극성은 각부대를 나눠서 지휘통솔하는 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각부대를 부대별로 나누고, 부대장을 둠으로써 각부대가 유기적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일수 있게 했고, 로마군의 유동적 움직임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따라서 총지휘관이 죽거나 도망가면 그대로 괴멸되버리는 모습을 보이는게 페르시아군의 큰 약점이 되버렸다.) 일방적으로 밀리고 괴멸되버렸다. 중앙이 괴멸된 것을 본 페르시아군의 양익 기병대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전투가 끝나버렸다. 페르시아 총독들의 의심 때문에 강둑 너머로 후위에 배치된 멤논이 지휘하던 5천의 그리스용병들은 전력도 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군대에 의해 포위된 그리스용병들은 항복을 했으나, 소아시아에 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5천명의 그리스 용병중 3천명은 죽임을 당했다. 포로로 된 2천명은 마케도니아로 끌려가서 광산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해야했다. 멤논은 다행이 그 전투에서 달아나 에게해 어느 섬으로 숨어서 목숨을 건지고, 페르시아 함대 지휘관으로 변신하여 알렉산드로스를 괴롭히지만 곧 병으로 죽는다.(b.c 333)
마케도니아군의 피해는 100명에서 200명 사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페르시아 쪽은 포로로 잡힌 그리스 용병 2천과 기병은 만명, 보병은 3천이 죽고 나머지는 도망쳤다고 한다. 이 전투로 인해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의 침입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일설에 따르면 (역사학자 Peter Green), 그라니쿠스 전투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수 있으며, 전반부에서 알렉산드로스가 그라니쿠스의 강에 도착하자마자 강을 건너 공격했으나 언덕을 등지고 유리한 위치에서 싸우는 페르시아군에게 격퇴당한 후에 파르메니온의 제안으로 밤사이에 강을 건너 새벽에 기습작전으로 위와 같이 승리했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페르시아군의 좌충우돌식으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설명된다는 것인데, 이후 알렉산드로스가 틀렸고, 파르메니온이 옳았다는 사실은 덮혀졌다는 것이다. 어찌했던 그라니쿠스 전투 이후 다리우스는 그리스에게 "본 때"를 보여줄 필요성을 느끼고, 알렉산드로스도 자신이 바라는 다리우스와의 정면 대결의 챔피언 도전권 티켓을 쥘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