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곡 계책에 대한 삼국지 정사의 기록.
- 8년(230), 서쪽의 강중羌中으로 진격하도록 위연에 명했는데, 위魏의 후장군後將軍 비요費瑤, 옹주자사 곽회郭淮와 양계陽谿에서 싸워 곽회 등을 대파했다. 전군사前軍師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올리고 가절假節 하고 남정후南鄭侯에 봉했다
위연은 제갈량을 수행해 출진할 때마다 병력 1만을 청하고 제갈량과 다른 길로 진격하여 동관에서 만나 한신韓信의 고사故事를 따르고자 했지만 제갈량이 제지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위연은 늘 제갈량을 겁쟁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음을 한탄했다.
위략의 기록.
- (위략) 하후무夏侯楙가 안서장군으로 임명되어 장안을 수비하고 있었다. 제갈량이 남정南鄭에서 수하 장수들과 의논할 때 위연이 말했다, “하후무는 위나라 주군의 사위인데 겁이 많고 지략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저 위연에게 정병 5천과 양식을 짊어질 5천명을 주신다면, 곧장 포중褒中을 출발해 진령秦嶺을 돌아 동쪽으로 가서 자오子午에 당도하여 북쪽으로 간다면 열흘이 지나지 않아 장안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후무는 제가 갑자기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들으면 틀림없이 배를 타고 도망갈 것입니다. 장안에는 어사御史와 경조태수京兆太守만이 있을 것이고 횡문橫門의 저각邸閣(옛날 군량과 물자를 모아두는 창고)과 흩어지는 백성들의 곡식으로 군량을 충당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위나라가 동쪽에서 병력을 모으는 데는 20일은 걸릴 것이므로 공公이 야곡斜谷을 빠져나와 충분히 장안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일거에 함양咸陽 서쪽 지역을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갈량은 이 계책이 위험하여 안전하게 평평한 도로로 나아가 농우隴右를 평정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 십전필극(十全必克:십전십승)하면서도 후환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위연의 계책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정병 5천으로 돌격 앞으로 해서 점거해야할 장안성의 실측 규모.
전체 둘레는 약 25.7km. 한나라 때의 62리와 근사한데
예상도에서 보이듯 동서남북의 길이가 모두 달라서
동쪽은 6km, 서쪽은 4.9km, 남쪽은 7.6km, 북쪽은 7.2km가 된다.
성의 외각은 빙 두른 해자가 있는데 폭이 40~45m이며 깊이는 3미터였고
성벽과 해자가 떨어진 평균 길이는 30m였다.
(여기서 해자란 성주위의 판 구덩이를 말한다.)
보통 해자를 건너기 위해선 호교라는 해자를 건널 수 있는
휴대용 다리쯤인 장치를 사용하는데 장안성의 해자는 그 폭이 너무 넓어 이 호교의 상용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각 성벽의 평균 높이는 10m이상이고 성벽의 두께는 7~8m였으며
높이 36~27m에 이루는 각루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적국의 동태를 쉽게 살필 수 있었다.
(출처 : 삼갤 자명님)
.........
높이 30미터의 각루의 시야를 피해 5천명이라는 병력을 어떻게 들키지 않고 성에 접근시킬 것이며,
30미터에 육박하는 해자는 대체 어떻게 건널 것이며,
높이 10미터의 두께 7미터의 성벽은 대체 어떻게 넘을 것인가.....
그것부터 말해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