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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장군들 (유일한 외국인 원수 포니아토스키)
게시물ID : history_55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마레샬
추천 : 1
조회수 : 99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9/09 08:28:31

조지프 안토니 포니아토스키는 1763년 5월 7일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Andrzej Poniatowski) 는 폴란드의 마지막 왕의 동생이었다. 아버지 포니아토스키는 폴란드가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삼등분 되어버렸을 때, 오스트리아에 망명하여 육군 원수에 복무했지만, 이는 명예직일 따름이었다.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과 혼인하여 포니아토스키를 낳았다. 어린 포니아토스키는 왕자의 신분으로 세례를 받고, 고급 교육을 받았다. 포니아토스키가 10살이 될 무렵, 아버지가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큰 저택과 든든한 후견인들을 물려받았다.


비록 패망한 나라의 왕자였지만, 포니아토스키는 좋은 대접을 받았다. 왜냐하면, 당시 오스트리아 국왕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그의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포니아토스키는 어린시절을 어머니와 함께 프라하에서 보냈고, 나중에는 왕을 보좌하는 삼촌이 있는 바르사뱌에서 생활했다. 그는 프랑스어, 폴란드 어, 독일어에 능통했는데, 귀족들은 그의 유창한 언어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주로 군대에서 통용되는 규율을 배웠다. 하지만 그것만 배운 것은 아니다. 그는 건반 악기를 다루는 법도 배웠고, 군사적 전술에 대해서도 배웠다.그는 26세 될 무렵 폴란드 군대에 배속되었는데, 거기서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펼치려는 의지를 품었지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얼마 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사망하자, 그는 폴란드 대표 자격으로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는 1787년에 자신의 저택에 돌아와 캐서린이라는 여인과 연애 생활을 보냈다.

 

 


포니아토스키는 1780년에 오스트리아 제국 군대에 입대하여 중위가 되었다. 그리고 1786년에서 1788년 까지, 그는 대령으로 승진하여 군대에 복역했고, 오스트리아가 터키를 상대로 선전포고한 1788년에는 요제프 2세의 보좌관이 되었다. 포니아토스키는 전쟁에 참가하여 Šabac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포니아토스키는 칼 필립 왕자의 목숨을 구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렇게 그는 오스트리아를 위해 싸웠지만, 운명은 그를 오스트리아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폴란드 군대가 재개편되었을 때, 포니아토스키의 삼촌이 그를 폴란드로 불러들였다. 당시 삼촌은 명목상 폴란드의 왕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오스트리아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조카를 불러들이기 위해 오스트리아 권력자들을 설득했고, 오스트리아 측은 이를 순순히 허락해줬다. 1789년 10월, 포니아토스키는 소령에 임명되었다. 그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인들이 밀집된 군단의 기강을 바로잡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이임무를 1791년까지 수행했다. 1791년 3월, 헌법 개정이 통과되는 등 폴란드 지역에 개혁이 실행되었다. 이때 포니아토스키는 개혁의 열광적인 지지자였고, 곧바로 헌법 협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사실상 폴란드 지역 군부의 실력자가 되었다. 군부의 결재사항은 언제나 포니아토스키의 손을 거쳐야 했다.


1792년 5월 6일, 포니아토스키는 우크라이나에 주둔한 폴란드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에게는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국경을 수비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제를 받아야 했지만.) 포니아토스키는 국경 지대에 복무하면서 여러 오스트리아 장군들과 개인적인 친교를 가질 수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이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오로지 혁명 프랑스를 제압하기 위해 계속해서 손을 잡고 있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러시아는 혁명 프랑스를 제압하는 데에 관심을 두었지만, 오스트리아가 획득한 폴란드 영토에 군침을 흘리기도 했다. 이때문에, 혁명 전쟁 도중에도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 군은 여러차례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이때의 전쟁에서, 포니아토스키가 이끈 군대는 숫적으로나 무기로나 러시아군에게 압도적으로 열세였다. 포니아토스키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끊임없이 후퇴를 하면서도 유리한 지역에선 상대를 공격하여 몇차례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Zieleńce 전투도 그가 거둔 승리 중의 하나였다. 이 전투로 그는 주목받는 유망한 장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전투의 승리 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종전 협약을 조인한다. 그때 포니아토스키는 그의 부하인 코지우스코와 함께 장엄한 열병식에 참가하여 깊은 인상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평화는 오래지속되지 않았다. 7월 18일에 코지우스코와 그의 사단은 Dubienka 에서 러시아 군과 격돌했다. 코지우스코의 사단은 5일 동안 벌지 강에서 전투를 치뤘으나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마침내, 저항을 포기한 폴란드 국왕은 협약을 통하여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인정해야 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동맹이 되어야 했고, 폴란드 군의 규모는 통제되었다. 포니아토스키로서는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해야 했다.


군대는 왕의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장수들은 포니아토스키에게 달려가서 그에게 쿠데타를 종용했다. 왕을 납치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포니아토스키는 결국 이를 실행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때 매우 고뇌했었던 모양이다. 1792년 7월 26일에, 그는 깊은 병이 들어 사경을 헤맷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얼마 뒤 회복되었다. 그는 왕의 항복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장군 직을 사임했다. 폴란드 군복을 벗은 포니아토스키에 대해, 병사들의 존경심은 높아ㅤㅈㅕㅅ던 모양이다. 그들은 포니아토스키의 행위에 감사해했고, 그를 기념하는 메달을 만들어주기도 했으며, 프라하에 머물고 있던 포니아토스키의 어머니에게 감사한다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포니아토스키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친러시아파 세력을 비판했다. 러시아 당국은 그를 제거하고 싶어했고, 온갖 압력이 가해졌다. 이에 목숨에 위협을 느낀 포니아토스키는 빈을 떠나 서부 유럽으로 여행했다. 그는 여행 도중 프랑스 혁명의 진행 도중 자행되는 온갖 잔혹한 행위들을 목격하고 깊은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1794년 봄, 폴란드 국왕(포니아토스키의 삼촌)은 포니아토스키에게 코지우스코의 휘하 군단에 복귀할 것을 권유했다. 포니아토스키로서는 옛 부하의 밑에 들어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어쨋든 그는 5월 27일에 돌아와서 코지우스코의 휘하에 복무했다. 그런데 얼마 뒤, 코지우스코는 포니아토스키에게 리투아니아에 일어난 반란을 이끌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포니아토스키는 삼촌이 자신을 필요하는 데 자신이 그를 배반할 수 없다고 결심하고, 이를 거부했다. 그는 대신에 다른 사람을 내세울 것을 종용했다.


그런데 얼마 뒤, 프러시아가 폴란드를 침공해왔다. 포니아토스키는 이를 막기 위한 군대에 합류하여 7월 7일에서 7월 10일까지 바르사뱌 전투를 치뤘으며, Marymont 전투에서는 기병대를 이끌어 프러시아 군을 공격했다. 프러시아 군이 Mokronowsk시를 포위할 때, 포니아토스키는 이 소식을 급히 바르샤바에 주둔하고 있던 폴란드 군에 알렸다. 그리고 그는 힘을 다해 전투를 벌였고, 마침내 도시를 구했다. 그 뒤, 포니아토스키는 8월 5일에서 8월 10일까지 프러시아군과 혈전을 벌여 Szwedzkie 지역에서 프러시아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그는 코지우스코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프러시아군의 반격을 준비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Szwedzkie 지역을 잃고 말았다.  그는 그 지역을 되찾으려고 시도했는데, 그 와중에 말이 총탄에 맞는 바람에 낙마하여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10월에, 포니아토스키는 프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인해 위기에 놓인 아군을 구할 수 있는 데까지 구한 뒤, 바르샤바로 철군한다. 이 전쟁의 실패와 프랑스 혁명의 진행 과정은 그에게 있어서 크나큰 위기상황을 불러일으켰다. 폴란드 국왕은 그의 사상을 의심했고, 그를 소외시켜버린다. 계다가, 포니아토스키는 오랫동안 함께 싸워왔던 동지를 잃었다. 코지우스코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여 체포된 것이다. 포니아토스키는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자신의 토시를 압수당했고, 러시아 당국에 의해 충성을 강요당했다. 그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1795년 4월에 빈으로 도망쳤다.


1796년, 러시아의 캐서린 2세가 사망했다. 그리고 폴 1세가 새로운 황제에 즉위했는데, 그는 포니아토스키의 영지를 다시 돌려주고, 포니아토스키를 러시아군에 고용시키려 했다. 하지만 포니아토스키는 자신은 건강이 좋지 않다며 이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렇지만 1798년에 폴란드 국왕이 사망하자, 포니아토스키는 장례식에 참석하여 국왕의 재정, 상속 및 의무의 적절한 처분을 책임지기도 했다. 이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몇달 동안 머물면서 폴란드의 반환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는 헛수고로 끝나고 만다.


1806년까지, 포니아토스키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지냈다. 하지만 그가 마냥 조용히 지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알려주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놀랄 정도로 진보적인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포니아토스키는 그동안 여러 유명인사들을 접촉하면서 세상의 흐름을 살피기도 했고, 독일의 여러 지역에 여행가기도 했다.

 

 

 

자, 여기까지 보면 그는 나폴레옹과 별로 상관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는 나폴레옹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1806년 무렵, 나폴레옹은 프러시아를 공격하여 예나 전투 등 각지에서 프러시아군을 격파한다. 그리고는 여세를 몰아 1807년에는 폴란드에 침공하여 프러시아와 연합한 러시아군을 공격한다. 이때 포니아토스키는 1806년 11월에 프러시아 왕 프레드릭 윌리엄 3세에 의해 나폴레옹을 막는 일에 동참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는 이에 동의했고, 민병대를 조직하여 진군해오는 나폴레옹군을 막고자 했다. 러시아와 프러시아의 압력을 받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악화되자, 포니아토스키는 나폴레옹에게 저항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나폴레옹에게 손을 내밀기로 결심했다. 요아힘 뮈라가 이끄는 군단이 바르샤바에 입성하자, 포니아토스키는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는 뮈라와 손을 잡고, 폴란드 민병대는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바쳐 러시아군과 맞서 싸우겠노라고 선언했다. 이후 포니아토스키는 나폴레옹의 밑에서 죽을 때까지 그를 위해 싸우게 된다. 나폴레옹은 바르샤바 준거법위원회를 신설하고, 포니아토스키가 이 위원회를 감독하도록 일임했다. 또한, 나폴레옹은 포니아토스키가 폴란드 민병대를 이끌 수 있도록 허락해줬다.


1807년 7월, 나폴레옹에 의해 바르샤바 공국이 창설되었다. 포니아토스키는 10월 7일에 바르샤바 육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아직 그를 그리 신임하지 못했다. 한동안 포니아토스키는 실권을 가지지 못했고,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은 1809년에 공식적으로 포니아토스키를 바르사뱌 공국 군 총사령관에 임명한다.


포니아토스키는 한동안 새로 창설된 폴란드인 군대의 양성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는 곧 재정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그래도 포니아토스키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어느정도 만족스러운 정규군을 키워낼 수 있었다. 그의 부대는 수많은 전쟁에 참가하였고, 프랑스군에 뒤지지 않는 용맹함을 보여줬다.


1809년 봄, 포니아토스키와 휘하 군단은 오스트리아 침공전에 동원되었다. 그는 이 원정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여줬고, 나폴레옹은 그의 군단을 유감없이 활용할 수 있었다. 그는 열세에 놓인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결연히 맞서 싸웠다. 패배한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손실을 최소화하고 다음 전투에 전념했다. 또, 그는 기회를 포착하는 데 재능이 있었기에, 적을 상대로 귀중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1809년 7월 5일, 바그람 전투가 한참일 무렵, 그는 남쪽에서 진군하고 있었다. 7월 15일에 그의 부대가 바그람에 도착하자, 오스트리아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그는 공격을 감행하여 오스트리아군을 도시에서 밀어냈고, 그들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1809년 10월 14일에 그들이 차지한 폴란드 영토의 대부분의 영역을 바르샤바 공국에 넘긴다는 내용이 담긴 조약을 체결했다. 포니아토스키는 국민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바르샤바에 입성했다. 그는 공국의 실권자가 되었고, 나폴레옹의 힘을 빌어 오스트리아에 영토의 반환을 계속해서 요구하기도 했다.


1811년 4월, 포니아토스키는 나폴레옹의 아들의 침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4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계획에 대한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원정군이 따뜻한 남쪽 경로, 즉 우크라이나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 지역을 지나는 북쪽 경로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폴란드를 지나 러시아로 진군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간편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감행할 때, 포니아토스키는 10만명의 폴란드 군을 이끌고 원정군을 따라갔다. 그의 부대는 원정군 제 5군단이 되었다.처음에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 포니아토스키는 나폴레옹의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의 지휘를 받았다. 그의 군단은 재롬 보나파르트 대군의 오른쪽 측면을 이끌었다. 하지만 제롬은 그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가 전투에 전혀 참여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8월 17일에, 스몰랜스크시를 공략하기도 했고, 9월 7일에는 Borodino 시 공략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812년 9월 14일, 포니아토스키의 폴란드 군은 모스크바에 최초로 입성했다. 하지만, 그는 곧 나폴레옹이 이 원정이 실패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뒤, 나폴레옹은 총 철수를 시작했다. 포니아토스키는 러시아 장군 쿠투초프의 군단을 저지함으로서 완전한 패배에서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10월 29일에 Viazma 전투를 치르던 도중 부상당하고 만다. 그는 계속해서 원정군을 따라갔지만, 11월 3일에 자신의 군단을 지휘하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그는 군대를 버리고 바르샤바로 돌아가려 했다. 곳곳에서 러시아군이 출몰하는 바람에 온갖 고생을 치뤄야 했지만, 그는 마침내 돌아올 수 있었다.


부상에서 회복된 뒤, 포니아토스키는 나폴레옹에게 피폐해진 폴란드 군대의 재건을 약속했다. 많은 폴란드 지도자들이 나폴렝옹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포니아토스키는 여전히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러시아 황제의 사면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포니아토스키는 힘겹게 폴란드 군대를 조련시켰고, 뒤이어 나폴레옹군에 합류하여 반나폴레옹 연합군에 맞서 싸우게 된다. 나폴레옹군에 합류한 포니아토스키는 독자적으로 여러 전투를 치뤘고, 여러차례 크고 작은 승리를 거뒀다. 그는 연합군에게 큰 타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고, 연합군은 그의 군대를 상대하는 데 신중을 기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그의 뛰어난 활약을 보상해주기 위해 라이프치히 전투를 치르던 도중인 10월 16일에 포니아토스키를 제국 원수에 임명한다. 이로써 포니아토스키는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 하나가 된 것이다. 하지만 원수로서의 그의 인생은 얼마가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에서 철수할 때, 그는 후방에 남아 아군을 엄호했다. 얼마 뒤, 그의 부대는 서서히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너가려 했다. 그런데 한 멍청한 장교가 너무 일찍 다리를 허물어버렸다. 그 바람에 포니아토스키는 다리를 건너지 못했다. 뒤이어 추격군이 당도하여 항복을 권유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전투를 벌였으나 큰 부상을 당하여 포로가 될 위기에 놓이자 강물에 몸을 던져버렸다. 프랑스군은 익사해가는 그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그의 머리에 대고 총을 ㅤㅆㅘㅅ다.

포 니아 토스키 편입니다.. 나폴레옹 유일의 외국인 원수였죠.. 군사적인 재능도 뛰어났지만 나폴레옹에게는 제대로 쓰이지 못했습니다.. 외국인이란 면이 약점으로 작용했을지도... 그리고 마르몽과는 달리 러시아 황제의 사면 약속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베르나도트와는 다르게 말이죠... 강대한 타국의 영향에서 조국을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라이프치히에서 자신의 생도 끝나게 됩니다..

원글 - 굿캣님의 http://blog.naver.com/taeodore/50110440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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