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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아티스트의 되찾은 색깔 .8
게시물ID : panic_5010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Yoima
추천 : 4
조회수 : 211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6/12 20:05:49
흑백 아티스트의 되찾은 색깔 .prologue 
흑백 아티스트의 되찾은 색깔 .1
흑백 아티스트의 되찾은 색깔 .2
흑백 아티스트의 되찾은 색깔 .3
흑백 아티스트의 되찾은 색깔 .4
흑백 아티스트의 되찾은 색깔 .5
흑백 아티스트의 되찾은 색깔 .6
흑백 아티스트의 되찾은 색깔 .7
 
 
 
#8
 
“목욕하는데요.”
 
“아, 그래..?”
 
욕실, 그 생각을 미쳐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혜선 씨를 만난 뒤로 정신없던 탓이었을 것이다.
 
나는 괜스레 무안해져 본래 용무인 심부름으로 화재를 전환했다.
 
“네가 말한 거 사왔는데 이거 어디다..”
 
“거기 적당한데 놔두세요.”
 
욕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천장을 타고 울려 퍼졌다.
 
나는 침대위에 생리대를 올려놓고 지하실을 나가려던 중 다시 한 번 테이블 위에 있는 그림을 보았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붉은 색감이 감도는 불길에 휩싸인 집.
 
너무도 활활 불타오르고 있어서 집안에 있는 것들은 모조리 불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불타는 집 창문에 무언가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검정색의 사람 실루엣. 불타고 있는 집 안에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고정된 자세로 뻣뻣이 서 있었다.
 
역시나 섬뜩한 기분은 떨칠 수 없는 그림이다. 유림이 이걸 그렸을까? 아니, 의심 따윈 필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이 방 안에서 있었던 사람은 유림밖에 없었으니깐.
 
나는 지하실을 나와 철창문을 닫고 유림이 있는 욕실을 힐끗 보고는 복잡한 머리를 흩트리며 1층으로 올라갔다.
 
별로 한 것도 없는 하루였지만 너무 피곤했다. 역시 그녀를 만났던 충격이 너무 컷 던 탓일까..
 
나는 몸이라도 풀 겸 욕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 욕조 안으로 발끝부터 천천히 몸을 뉘었다.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자 저절로 기분 좋은 한숨이 세어 나왔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며 환기창 쪽으로 빠져나갔다.
 
‘나중에 만나는 거예요 꼭!’
 
혜선 씨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나는 물속으로 얼굴을 집어넣고 숨을 참은 체 일렁이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콧구멍에서 공기방울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수면위에서 터졌다.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너무 쪽팔렸으니깐.
 
그녀에겐 줄곧 잘난 듯 말해왔으면서 현실은 거짓말쟁이 도박꾼신세라니.. 폐가 괴로움에 요동쳤다.
 
그녀는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마 배신자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공기방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가슴의 상하운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숨을 뱉어낸 나는 상체를 물 밖으로 힘껏 들어올렸다.
 
“푸- 하-”
 
찬바람과 적절히 뒤섞인 뜨거운 공기가 폐 속으로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해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난 욕조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여자애가 붉은 방 안에 엎드린 채 쓰러져 있었다.
 
“언니!”
 
쓰러진 여자애를 언니라 부르며 울부짖는 또 다른 여자애.
 
누군가 많이 닮아있었다. 자세히 보니 유림이 아닌가.
 
아니, 한 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울고있는 그 아이는 유림이었다.
 
유림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여자애를 매만지며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여자애를 다그치는 남자. 전에 꿈에서 본 그 남자였다.
 
“기절한척 하지 말고 빨리 안 일어나? 네 년도 네 애미 닮아서 거짓말만 쳐 하시게? 어!”
 
“아빠! 그만해! 언니 피 흘리고 있단 말이야!”
 
“뭐?”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남자가 여자애를 들어 올리자 여자애의 팔과 고개가 힘없이 밑으로 축 늘어졌다.
 
여자애의 머리에서는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씨발..”
 
남자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여자애를 등에 업었다.
 
“넌 여기서 바닥에 묻은 피나 잘 닦고 있어. 어디 갈 생각하지 말고. 알았어?”
 
“그럼 언니는..”
 
“알았냐고! 너도 언니처럼 되고 싶어? 어!”
 
그러자 유림은 두려움에 고개를 움찔 하더니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곤 남자는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갔다.
 
피가 흥건한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유림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점점 더 커져가는 울음소리. 
 
그리고 유림이 내 쪽을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똑.’
 
욕실 천장위에 맺혀있던 차가운 물방울이 내 콧잔등 위에 떨어졌다. 나는 발작하듯이 누워있던 몸을 반사적으로 일으켜 새웠다.
 
“헉..”
 
또다시 시작된 악몽. 나는 미지근하게 식은 욕조 안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꿈..”
 
전에 봤던 꿈과 이어지는 꿈이었다. 정체불명의 남자와 여자애. 그리고 유림..
 
나는 불어 튼 몸을 일으켜 수건을 치마처럼 걸친 체 욕실을 빠져나왔다.
 
거실은 어두컴컴하며 너무나 조용했다. 분명 집에 들어왔을 때 거실 불을 켜둔 것 같았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착각이려니 하며 과도한 목욕으로 인해 빠져나간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부엌으로 가 냉장고문을 열고 캔 맥주 하나를 꺼냈다.
 
캔 맥주를 따자 ‘칙-.’ 하며 경쾌한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난 맥주를 사정없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맥주의 톡 쏘는 쌉싸름함이 내 목을 쓰리게 했다.
 
나는 맥주의 청량감에 “캬-.” 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다 마신 캔을 찌그려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꿈속에서 봤던 피를 흘리며 쓰러진 여자애가 날 보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 헉 소리도 내기 전에 뒤로 자빠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술기운에 환각 인가싶어 눈을 마구 비비자 어느 세 사라진 여자애.
 
나는 고개를 정신없이 흔들고는 서둘러 내 방으로가 침대위에 몸을 던졌다.
 
머리가 지근지근 아파왔다.
 
이렇게 정신없을 때는 빨리 자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또 악몽을 꾸면 어떻게 하지? 
 
그러나 그런 걱정도 잠시 더 이상 깨어있다간 정말 무슨 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난 두려운 잠을 청해야만 했다. 또 악몽을 꾸지 않길 기도하면서..
 
 
 
 
 
다음날 아침이 되자 내 휴대폰에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혜선 씨의 문자였다.
 
[오늘 저녁에 시간 돼요?]
 
나는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을 있다가 키패드를 꾹꾹 눌려 내키지 않는 글을 써 내려갔다.
 
[아마도 안 될ㄱ..]
 
그렇게 써 내려가던 중 나는 손을 멈추고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졌다. 언제까지 그녀를 피하고 만 있을 순 없었다.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고 용서를 구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을까.
 
혹시 모르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게 될지도. 그리고 나는 급하게 문자 내용을 지우고 다시 써 내려갔다.
 
[아마 될 것 같네요. 언제 만날까요?]
 
나는 우유부단한 망설임 끝에 확인 버튼을 눌러 문자를 보내고야 말았다. 내 심장이 심각하게 쿵쾅거렸다. 이젠 되돌릴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혜선 씨로부터 답변이 돌아왔다.
 
[그럼 2시에 한강 공원에서 만나요. 어딘지 모르시면 지도 보내드렸으니 보고오세요. ^_^]
 
그녀와의 약속이 체결되었다. 이제 난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저녁까진 시간이 많으니 그녀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방 안에 있는 전신 거울 앞으로 가 내 모습을 가만히 감상했다.
 
부스스하고 정리 안 된 머리하며, 폐인이라고 하면 믿어 줄 정도로 초라한 몰골의 옷이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하긴 잘 보일 사람도 없었는데 이런 꼴이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이었다.
 
그리고 나는 유림에게 아침식사를 주고 밖에 다녀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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