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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분의 난 (天文の乱) - 1542년~1548년
게시물ID : history_55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텐분의난
추천 : 2
조회수 : 270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9/04 21:40:23

텐분의 난 (天文の乱) - 1542년~1548년

 

 

 

에이쇼(永正) 11년(1514년)에 도호쿠(東北)에서 다테씨(伊達氏) 제 14대 당주로 등극한 다테 다네무네(伊達稙宗)는

많은 자녀들을 인접한 제후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당주상속 후 30년간에 걸쳐 10개 군을 지배하에 넣고

무츠(陸奧)의 슈고직을 획득하여 텐분(天文)시대 초기에 모가미, 소마, 아시나, 오자키, 카사이 등 남쪽 다이묘를 종속시켰다.

 

도호쿠에서 일대세력으로 성장한 다네무네는 일거에 확대된 다테가문의 통제를 위해 여러가지 통치법과 토지대장을 작성해

중앙집권화를 추진해 나갔다. 또 다테산하의 제후들에게 대하여 유화정책을 폈는데 특히 다네무네에게 협력적이었던

사위인 소마 아키다네(相馬顕胤)에게 다테 영지의 일부를 분할제공했는데 이것이 다네무네의 장남인 하루무네(晴宗)의

거센 반발을 샀다.

 

이에 더하여 더욱 세력확대를 노린 다네무네가 셋째 아들인 사네모토(実元)를 에치고의 슈고였던 우에스기 사다자네

(上杉定実)의 양자로 보내는 안건을 피력하자 부자간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고 말았다. 텐분 9년(1540년)에는 에치고서도

이 제안에 반대하는 아가키슈(에치고의 호족)였던 혼조 후사나가 등이 거병하여 분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다네무네는 이러한 반대파의 위협에 에치고에 들어가는 사네모토에 가신 100명을 딸려 보내어 동반케 했다. 강병을

차출해 빼나가자 다테씨의 약체화를 우려한 하루무네는 나카노 무네도키(中野宗時), 마키노 무네오키(牧野宗興),

고오리 카게나가(桑折景長)등 다네무네의 집권정책에 반발하는 중신들의 지지를 얻은 후 텐분 11년(1542년)에 드디어

아버지인 다네무네를 제거하기로 결의했다.

 

6월에 하루무네는 매 사냥에서 돌아오던 다네무네를 체포하여 니시야마 성에 유폐했다. 하지만 다네무네는 측근인

고야나가와 무네토모(小梁川宗朝)에 의해 구출되어 사위인 가케다 도시무네(懸田俊宗)의 거성인 가케다 성으로 탈출해

소마 아키다네를 필두로 한 친족관계의 각 다이묘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다테씨의 내분은 일거에 도호쿠의 각 다이묘를

몰아넣는 대란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초반에는 다이묘의 대다수가 가담한 다네무네 쪽이 우위에 서서 사태를 전개해 무츠와 도바를 진압했다. 그러나 텐분 16년

(1547년)에 다네무네 쪽의 다무라 다카아키(田村隆顕)와 아시나 모리우지(蘆名盛氏)가 불화하여 양자가 다투기 시작하자,

아시나 가문은 하루무네 편으로 돌아섰다.

 

이 때문에 전황은 일변하여 하루무네 파가 우세하게 되어, 결국 이듬해인 텐분 17년(1548년) 9월에 쇼군이던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중재로 다네무네가 은거하고 하루무네에게 당주자리를 물려주는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었다. 동시에 에치고에서도 사네모토의

양자입적 추진파와 반대파 사이에서 전투가 일어났는데 양자 찬성파의 우에스기 사다자네, 나카조 후지스케 등이 반대파였던

나가오 하루카게와 에치고 호족들에게 패하여 사네모토의 양자 건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6년간에 걸친 전란으로 다네무네가 당주가 된 뒤부터 확대일로를 걸어온 다테가문은 단숨에 쇠퇴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테가에

복속했던 다이묘들 중 아시나, 소마, 모가미씨는 혼란을 틈타 독립해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특히 아시나씨는 다테씨와 어깨를 겨룰

정도로 유력 다이묘로 성장하였다. 또한 오자키, 가사이 양 가문도 양자로 들인 다네무네의 자식들이 축출당하며 다테씨의 영향력이

사라졌다.

 

한편, 다테씨 내에서도 다네무네 파였던 가케타 도시무네 등이 화평안에 불복하여 하루무네에게 계속 반항하였기에 이들을

진압하는데 5년이 걸렸다. 그리고 하루무네파의 중신인 나카노 무네토키가 전란 중에 아들인 히사나카(久仲)를 마키노씨(牧野氏)의

후계자로 보내는 등 세력을 길러 가문 내 최대 실력자로서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다.

 

하루무네는 전란 종결 후 가문을 정리 후 다시 집권화를 추진하려고 했지만 도움을 받은 하루무네 파의 중신들에게 세금 면제 등

특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혼란의 후유증은 하루무네의 아들인 테루무네(輝宗)대에서야 겨우 정리되었다. 한편

에치고에서는 덴분 19년(1550년)에 우에스기 사다자네가 후사없이 사망해 에치고 우에스기 가문은 단절되었다.

 

이에 나가오 하루카게의 동생이며 슈고 대리였던 나가오 카게토라(長尾景虎, 훗날의 우에스기 겐신)이 에치고의 주인이 되어

명실공히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출처 : 고바야시 히로시 <다테가 연구>


원글 - 도위창님의 http://blog.naver.com/mirejet/110145730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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