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연결된 인도 세계와 동남아]
1. 대륙에서 따로 떨어진 ‘인도’라는 독립세계
(히말라야 산맥이 장벽이 되어 독자적인 세계가 탄생했다. 기원전 2300년경-)
가. 다양하고 복잡한 인도사회
인도의 국토면적은 남한의 약 32배이다. 인구 역시 10억 2700백만 명으로 남한의 약 21배이며,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다.
그마저 오는2025년 경에는 추월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인더스 강에서 유래한 이름인 ‘인도’의 정식 명칭은 힌디어로 ‘바라트’이다. 바라트는 고대 서사시 [바하바라티]에 등장하는 바라다 왕에서 유래했다. 인도는 현재 인구 1억 6천만 명인 파키스탄(우르두어로 맑은 나라)과 더불어 인도양으로 돌출된 인도 반도를 무대로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해왔다. 인도는 인구의 70%가 농촌에 사는 농업국이다.
인도의 공용어는 힌디어(Hindi language)이다. 하지만 이 밖에도 10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가 무려 59개나 되며, 전체적으로 1600개 이상의 언어가 있다. 또한 북부의 아리아계 언어와 남부의 드라비다(Dravida)계 언어로 크게 구별되는데, 이 두 언어는 영어와 한글만큼이나 다르다고 한다. 인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복합적인 사회이다.
나. 히말라야 산맥 때문에 대륙에서 멀어진 세계
동서로 평행하게 자리한 복합적인 산맥 여러 개와 해발 7600m 이상 되는 고봉 30여 개로 이루어진 히말라야 산맥 때문에 대륙에서 격리된 인도반도는 흑인인 드라비다인(주로 남부에 거주)과 백인인 아리아인(Aryan), 카이바르 고개(Khaibar Pass)를 넘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침입한 여러 민족(주로 북부에 거주)의 손에 의해 고유한 역사가 전개되었다.
히말라야 산맥 남쪽에는 동서로 약 2400km, 남북으로 약 280km-400 km에 이르는 광대한 힌두스탄 평야(Hindustan:페르시아어로 힌두교도의 땅)가 있다. 이곳은 인더스 강(주요 작물은 밀)과 갠지스 강(주요 작물은 쌀)이 만들어낸 충적평야로 이후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로 마우리아 왕조를 비롯해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 하는 무대가 되었다.
특히 갠지스 강 유역은 세계 유수의 비옥한 토지로, 방대한 인구를 부양하고 있다. 이 평야에는 12세기 이후부터 이슬람교도가 침입했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무굴제국(1526~1858)이 성립되어 평원 전체를 지배하기도 했다.
다. 두 개의 산맥 사이에 위치한 광대한 데칸 고원
힌두스탄 평원 남쪽에 위치한 용암으로 형성된 고지대가 바로 데칸(Deccan) 고원이다. 이 고원과 북인도 상이에는 나르마다(Narmada) 강이 흐르는데, 이 강은 기쁨을 준다는 의미이며 시바신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동쪽으로 경사져있는 데칸 고원은 해발 600m 정도의 고원으로 주요 하천은 모두 동쪽의 뱅골 만으로 흐른다. 게다가 인도양에서 부는 계절풍(몬순)이 서고츠 산맥(Western Ghats)으로 인해 차단되기 때문에 우량이 매우 적고, 1년 가운데 6개월~9개월은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이다. ‘고츠’라는 말은 계단 모양의 경사면을 뜻한다.
인도 반도의 동서 해안선을 따라 각각 동고츠 산맥과 서고츠 산맥이 자리 잡고 있다. 동고츠 산맥은 평균 높이가 약 450m로 완만한 편이며, 뱅골 만의 해안선을 따라 약 80~240km의 폭으로 펼쳐진 평야는 ‘코로만델(Coromandel) 지방’이라고 불린다. 이 지방은 해안선이 단조로워 항구가 많지 않다. ‘코로만델’이라는 이름은 과거 번영했던 초라만다람 국의 ‘초라 지방’ 에서 유래되었다.
험준한 서고츠 산맥과 아라비아 해 사이에 위치한 약 50~110km의 폭일 가늘고 긴 해안 평야가 ‘마라발 지방’인데 ‘마라발’이라는 이름은 드라비다어의 ‘마라(산)’와 아랍어의 ‘발(지방)’의 합성어로 ‘산이 있는 지방’이라는 뜻이다. 고온 다습한 열대 몬순 기후인 이 지방은 후추 등과 같은 향신료 산지로 유명하며, 이런 배경으로 인도양 교역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한편 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코모린 곶(Cape Comorin:힌두교의 시바신의 부인인 두르가(쿠마리)에서 유래)은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 벵골 만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이곳은 여신 쿠마리가 목욕한 장소라고 하여 힌두교의 성지가 되었다.
2. 인도에 두 개의 인종군이 있는 이유
(흑인 드라비다인을 쫓아낸 백인 아리아인. 기원전 2300년경-)
가. 드라비다인의 인더스 문명이 사라진 이유
기원전 2300년경 인도 북서부(오늘날 파키스탄)를 흐르는 인더스 강 유역에 ‘인더스 문명’이 일어났다. 인더스 강은 길이가 3180km이고, ‘인더스’라는 명칭은 산스크리트어로 ‘강’을 의미하는 ‘신도프’에서 유래했다.
문명이 일어난 중심지는 인더스 강에서 700km나 떨어진 지점에 있는 모헨조다로(신도어로 ‘죽은 자의 언덕’이라는 뜻)와 하라파였다. 이 두 도시에 사용된 벽돌이 동일 규격인 것으로 미루어 인더스 문명을 대표하는 이 두 도시는 모두 같은 문화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인더스 문명의 여러 도시는 페르시아 만을 경유해 메소포타미아와 교역을 했다. 이 사실은 화물의 봉니(문서의 귀중품을 봉함을 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0를 누르기 위한 인더스 문명의 고유한 활석제 인장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 페르시아 만 서안의 교역 중심인 바레인(Bahrain) 섬에서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바레인 섬은 아라비아 반도의 페르시아 만 쪽에 위치해 있는데, 이 섬은 오지의 담수층과 페르시아 만 바깥쪽의 염분이 짙은 바다가 연결되어 출입구에 위치해있어서 아랍어의 ‘바르(바다)’와 레인(두 개)’ 이 합성되어 섬 이름이 되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인도와 교역을 하는 거점으로서 16세기에는 포르투갈에 점령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86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사이에 길이 24km의 다리가 건설되어 현재는 아라비아 반도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다.
활석제 인장에 새겨진 250~400종류의 글자를 통해 인더스 문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지만, 인장에 새겨진 글자 수가 너무 적어서 아직 글자의 의미를 해독하지 못해 인더스 문명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다.
전성기 때 인구가 3만 명이었다는 사방 1.6km의 도시 모헨조다르는 폭이 각가 10m와 3m인 ‘바둑판’ 모양으로 정연하게 시가지를 정비했고, 각 집에는 오수대가 설치되어 있어 오수가 오수대의 4분의 3에 달하면 자연히 폭이 30cm인 하수구로 배출되는 시스템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면직물을 왕성하게 생산했고, 소와 보리수를 신성시했다. 또 도시에는 큰 목욕탕을 만들었고 ‘물의 정화력’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현재의 인도 문화의 토대는 인더스 문명에 의해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명을 담당한 사람들은 흑인인 드라비다인(드라바다어는 현재 남인도에 거주하는 타밀(Tamil)인이 계승하여 현지 약 1억 7천만 명이 드라비다어를 사용하고 있다)이었다. 하지만 도시 건설에 필요한 벽돌을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 인더스 강 유역의 많은 주목을 함부로 베어내는 바람에 여러 차례 홍수가 발생했고, 강의 수로가 변경되어 기원전 1700년경 인더스 문명은 붕괴하고 말았다. 환경이 이변이 문명의 기반을 무너뜨린 것이다.
나. 카이바르 고개로 들어온 아리아인이 인도의 주역으로
대륙에서 인도로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한 나라가 바로 아프가니스탄이다. 이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파키스탄 북서부에는 ‘카이바르 고개’가 있는데, 이곳은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파상적으로 침입하는 여러 민족의 침입경로였다.
고대에도 아리아인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연결하는 카이바르 고개(해발 1000m 정도이며 고갯길이 40km 정도 이어진다.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1029m)를 넘어 인도에 침입하여, 기원전 1500년경에 충적평야가 펼쳐진 ‘펀자브 지방(Punjab: 페르시아어로 ‘5개의 강’)에 정착했다.
펀자브 지방은 의미 그대로 인더스 강 본류와 상류의 지류 5개가 합류하는 지역인데, 1947년에 동서로 분할되어 동쪽은 인도령, 서쪽은 파키스탄령이 되었다.
한편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은 이 지격의 원주민이며 흑인인 드라비다인을 평균 고도가 600m 정도인 데칸 고원을로 쫓아냈다. 데칸 고원은 산스크리트어의 다크시나(오른손)와 파토하(나라)의 합성어로 ‘오른손의 나라’ 즉 ‘남쪽 나라’라는 뜻인데, 당시 인도사회에서는 정면을 향해서 볼 때 오른쪽이 남쪽이고, 왼쪽이 북쪽을 가리켰다. 산스크리트어는 인도.아리아계이므로 아리안인의 침입경로에서 본 위치를 나타낸 말인 듯하다.
다. 인도 문화의 중심이 인더스 강에서 갠지스 강으로
기원전 1000년경 아리아인 가운데 일부는 원주민을 정복하면서 습하고 풍요로운 갠지스 강 유역으로 진출했다.
길이가 2500km인 갠지스 강의 ‘갠지스’는 산스크리트어의 ‘강가를 영역한 것이다. ‘강가’는 신성한 설산인 히마바드(히말라야:눈의 집)의 말을 의미한다.
갠지스 강이 힌두스탄 평원에 접어들면 하구까지 약 1000km를 가는데, 이 1000km의 해발 차이가 불과 100m 밖에 안 된다. 이 강은 히말라야를 수원으로 하여 유유하게 흐르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비가 내리는 지대인 아삼(Assam)을 흘러, 갠지스 델타에서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강 (힌두교의 3대신 가운데 하나인 ‘브라만의 아들’)과 합류한다.
평탄한 평야를 흐르는 갠지스 강은 2~3년에 한 번씩 대홍수를 일으켰지만, 유역은 곡창지대로써 인도 문명의 중심이 되었다.
7억 명 이상의 힌두교도에게 갠지스 강은 신 그 자체이며, 사후에 이곳으로 유골을 흘러 보내면 극락왕생할 수 있는 ‘성스러운 강’이었다.
라. 고대인도의 중심도시 파트나
기원전 6세기에는 갠지스 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도시인 파탈리푸트라(산스크리트어로 ‘파탈리라는 나무의 아들’)가 인도의 중심이 되었으며, 마가다국 등 16개 나라들이 서로 싸우게 된다.
파탈리푸트라는 마가다국, 마우리아 왕조, 굽타 왕조 등이 수도로 정했던 도시로, 오늘날 비하르 주의 주도이며 쌀의 집산지인 파트산(산스크리트어로 마을)를 말한다.
카트만두(Katmandu) 관광지 입구에 위치한 파트나는 인구 9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대도시인데, 이곳도 고대 인도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도시이다.
오늘날에도 갠지스 강 중류에 위치한 바라나시(영어이름은 베나레스, 지류인 바라 강과 아시 강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두 강의 이름을 합성한 것이다)는 힌두교도의 최대 성지로써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강가를 따라 5km나 이어지는 고츠(Ghat:목욕장)는 기도와 목욕, 장례식에 이용된다.
아리아인은 [베다(지식)]라는 성전에 뿌리를 두며 복잡한 의식을 중시하는 브라만교(바라문교:Brahmanism)를 발달시켰고, 드라비다인 등의 원주민과 자신들을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4가지 계층의 신분제도(카스트)를 만들었다.
카스트는 나중에 다양한 직업을 가진 집단이 편입되면서 세분화되고 복잡해졌다. 직업과 신분은 세습되었고, 서로 다른 카스트간의 결혼을 금지시겼다.
3. 불교가 융합되면서 힌두교 세계로 통합된 인도
(여러 왕조가 교체되는 가운데 침투한 힌두교. 기원전 4세기~기원후 4세기)
가. 7억 명 이상의 신자를 보유한 힌두교의 세계
힌두교의 ‘힌두’란 인더스 강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의 ‘신두’에서 유래했으며, 기원전 5세기경에 페르시아인이 인더스 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가 이윽고 ‘인도 사람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7억 명 이상의 신자를 보유한 힌두교는 인도 풍토에 뿌리를 내린 다양한 신앙과 풍속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었으므로 특별히 창시자는 없다.
힌두교도는 브라만(신관)과 소를 중요하게 생각하고(쇠고기를 먹지 않는다), 카스트 집단 안에서만 결혼하며, 해가 뜰 때 태양신을 찬양하는 찬가를 부른다. 또 파괴와 부활의 신인 시바와 유지의 신인 비슈누로 이어지는 다양한 신들과 마을, 집, 종교집단 고유의 작은 신들을 믿고 있다.
나. 알렉산더의 원정을 계기로 성립된 마우리아 왕조
인도 최초의 대 제국인 마우리아 왕조가 성립된 계기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대군의 서북 인도 침입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원정에 실패하고 철수한 뒤, 대군을 조직했던 마가다국 찬드라굽타(Chandragupta)가 기원전 317년경에 마우리아 왕조를 일으켜 힌두스탄 평야를 정복했다. 또 제3대인 아소카 왕은 남인도의 드라비다인 정복에 나서 비참한 전쟁을 펼친 끝에 남단 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반도 대부분을 지배했다.
아소카 왕은 지방의 자립성을 인정하면서, ‘불교’라는 이데올로기로 인도 세계를 통합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결국 아소카 왕이 죽은 뒤 반세기만에 마우리아 왕조는 멸망하고 만다.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한 뒤,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로 진출한 크샤나 왕조가 간다라 지방의 프루샤프라(산스크리트어로 ‘인류의 마을’에서 유래, 무굴 제국의 악바르 황제가 오늘날의 페샤와르로 개명)와 중부에 위치한 자무나 강(브라마푸트라 강: Brahmaputra), 우안의 마투라(‘신에 속하는 것’이라는 뜻, 오늘날에는 힌두교의 크리슈나 신의 성지)를 중심으로 하여 갠지스 강 유역까지 지배 지역을 넓혔다. 이 왕조의 전성기는 카니시카 왕 시절이었다.
동서교역이 요충지를 지배한 크샤나 왕조에서는 간다라 미술로 알려진 불교 예술과 대승 불교가 번성했는데, 오늘날 인도에서는 이 왕조를 정복 왕조라고 부른다.
다. 힌두교가 통일한 인도세계
크샤나 왕조가 서아아시아의 사산 왕조의 공격을 받고 쇠퇴하면서, 320년에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중심으로 찬드라굽타 1세가 굽타 왕조를 건설했다.]
이 왕조의 왕들은 자신들을 ‘왕 중의 왕’이라고 칭했고, 힌두교의 비슈누신(태양신)을 숭배했으며 산스크리트어를 공용어로 삼았다.
또 왕의 비호 하에 각지에 힌두사원이 건립되면서 불교는 갈수록 힌두교에 눌리게 되었다.
힌두교도들의 생활에 기준이 된 [마누 법전]과 민족서사시 [마하바라타], [라마야냐]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으며, 아라비아 숫자의 기원이 되는 인도 숫자와 제로 관념도 이 시기에 태어났다.
4. 중앙아시아에서 온 무굴 제국
(힌두교를 잘 이용해 지배했지만……16세기)
가. 터키인의 무굴 제국이 인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
티무르 제국(1370~1507)은 중앙아시아에서 몽골 제국의 부흥을 꾀했지만 이를 이룩하지 못했다. 결국 이 제국의 최후의 왕인 바부르는 터키계 유목인 우즈베크족에게 서 투르키스탄을 빼앗겨,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수도인 카블(페르시아어로 ‘창고)로 도망쳤다.
민첩한 아프가니스탄의 왕 ‘바부르’는 북인도사회가 혼란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서 뛰어난 화포를 보유한 군대를 동원해 10배나 되는 병력을 갖춘 북인도의 지방정권군을 물리치고, 자무나 강부터 갠지스 강 유역의 입구에 위치한 요해의 땅 델리(Delhi:입구. 현관)를 점령했다. 이어서 갠지스 강 유역을 평정한 뒤 자신의 부하에게 통치를 맡긴다. 이로써 1526년 인도에서 ‘무굴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무굴’은 ‘몽골’의 사투리다. 무굴 제국은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삼은 국가로 지배층은 이곳을 침입한 터어키계 민족(이슬람인)인 전형적인 정복 왕조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조종을 받았던 무굴 제국이 인도사회에 뿌리를 내린 것은 3대 황제인 악바르 황제(제위 1566-1605) 시대였다. 13살 9개월이 나이로 즉위한 악바르 황제는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힌두교도를 회유하지 못한다면 무굴 제국을 인도 제국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유력한 힌두교도 부족에서 왕비를 맞이하는 한편으로 힌두교도에 대한 차별적인 세금을 철폐했으며 유력자를 정부의 고위관리로 맞이했다. 그는 또 ‘위대한 정복자’로서 힌두스탄 평야를 평정해 아프가니스탄과 통합된 대 제국을 실현했다.
악바르 황제는 인도 지배의 효충지로 자무나 강 오른편에 새도시 아그라(아리아인의 집)를 건설했으며, 성새와 화려한 건축물을 제국의 상징으로 삼았다. 또 자무나 강과 갠지스 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성지에 아그라성을 구축한 뒤, 이슬람교의 신 알라에서 따와 알라하바드(알라의 도시) 명명했다.
또 페르시아어의 지명 접미사인 ‘아바드’를 붙인 이슬람 식민 도시를 인도 각지에 건설했다. 예를 들어 남인도의 대도시 하이데라바드는 페르시아어의 ‘사자(라이언)의 도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파키스탄에도 같은 이름의 도시가 있다.
나. 이슬람교의 지배로 혼란스러워지는 무굴제국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맞이한 제5대 황제 샤자한은 페르시아계의 절세미인 뭄타즈 마할(왕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과 결혼하여 19년 동안 살면서 모두 14명의 자녀를 뒀다. 그리고 몸타즈 마할이 14번 째 자녀를 출산하다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에 대한 사랑의 증거로 2만 명의 장인과 노동자를 동원하여 2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묘를 건조했다.
이 묘가 바로 사방 57m의 건물로, 높이 약 58m의 돔 지붕을 가진 타지마할(타지는 몸타즈의 애칭)이다.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흰색 대리석에 새긴 섬세한 조각과 격자 세공을 갖춘 이 건물은 ‘환상의 대리석’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는 전성기 시절의 무굴 제국의 부를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했다. 현재 타지마할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샤자한의 뒤를 이은 아우랑제브 황제는 이슬람교도라는 사명감이 매우 투철한 왕이었다. 그는 군사 활동을 반복하여 데칸 고원 이남으로 영토를 확대해, 제국의 영토를 가장 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전 인도의 이슬람 화를 추진하면서, 힌두교도에 대한 차별적인 세를 부과하는 등의 정책을 펼친 탓에 각지에서는 힌두교도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제국은 혼란과 분열이 일어나 ‘전국 시대’와 같은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세포이(Sepoy: 페르시아어로 병사를 의미하는 ‘시파시’에서 유래)’라는 인도인 용병을 고용한 영국과 프랑스의 동인도회사가 세력을 확장해나간다.
5. 종교 대립으로 나라가 대분열되다
(뿌리 깊은 힌두와 이슬람 문제. 19세기~20세기)
가. 영국에 의해 완전히 식민지화된 인도
영국은 인도인 용병 ‘세포이’를 이용해 인도 각지의 번왕(마하라자)를 잇따라 무찔러 19세기경까지 인도의 주요 지역을 지배하에 넣었다. 이로써 인도는 영국의 실질적인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이 인도를 자국의 공업제품 시장으로 바꾸어 놓자, 인도의 전통산업인 면직물 산업은 쇠퇴하고 말았다. 그러자 1957년 그때까지만 해도 영국의 세력 확대를 도와온 ‘세포이’가 일제히 붕귀했다(세포이 항쟁)
봉기군은 영국의 세력을 인도에서 쫓아냈지만 영국 동인도회사는 네팔의 그루카 병(그루카는 산스크리트어의 목동을 의미하는 고라크샤에서 유래)과 본국에서 온 원군을 이용해 반격을 가했고, 옛 지배층의 분열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1859년에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은 그렇게 무굴제국을 무너뜨리고 동인도회사를 해산시킨 다음 1877년 빅투리아 여왕을 황제로 하는 ‘영국령 인도제국’을 성립시켜, 인도를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 때 영국은 인도 전체 면적 45%를 차지하는 지역에 있는 크고 작은 562개의 번왕국(번왕은 힌두교도인 경우에는 ‘마하라자’이고, 이슬람교도인 경우에는 ‘나와브’라고 불렀다)이 반독립국가 상태로 존속하는 것을 허용했다. 하지만 이 때 맺어진 조약에 따라 번왕국은 영국 주둔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전시에는 식민지 정부에 협조하게 되었다.
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대립이 낳은 대혼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 70년에 걸친 영국의 지배가 끝난다. 이로써 이슬람교도의 동서 파키스탄과 힌두교도의 인도 연방도 분리 독립하게 된다.
인도의 국명은 인더스 강 유역을 의미하지만, 인더스 강 유역은 파키스탄 령이 되었다. 파키스탄은 1958년에 새 수도를 건설해 ‘이스라마바드(Islamabad:이슬람의 도시)라고 명명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 분리 독립할 때, 1500만 명의 주민 가운데 힌두교도는 인도로 , 이슬람교도는 파키스탄으로 대거 이동했는데, 이 때 큰 혼란이 생겨 20만 명에서 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 교도의 융화를 주장한 비폭력 불복종의 독립운동 지도자 간디도 이 소동 속에서 암살당했다.
다. 진흙탕 싸움으로 변한 카슈미르 문제도 모두 종교 대립 때문에 발생
독립을 하면서 큰 문제가 된 것이 자로 식민지 시대에 영구의 보호국이었던 562개의 번왕국을 처리하는 문제였다.
이런 번왕국이 처리는 1951년까지 거의 해결되었지만, 번왕이 힌두교도이면서 주민 대다수는 이슬람교도였던 카슈미르 지방의 귀속과 관련해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 양보하지 않자,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1947-1949)이 일어난다.
1949년 유엔 결의로 정전 라인이 결정되어 남쪽의 인도 지배지역과 북쪽의 파키스탄 지배지역으로 나뉘었지만 양측 모두 이에 납득하지 않고 1965년과 1971년 두 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1972년에 잠정적으로 경계선이 결정되긴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문제점을 안고 있는 이것이 바로 ‘카슈미르 문제’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에 둘러싸인 인구 약 1100만 명의 산악지대이다. 카슈야파 왕(원서에는 왕이라고 되어 있어나 ‘카슈야파’라는 한 수도승이 광대한 호수를 간척하여 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카슈미르 라는 지명은 이 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지방의 특산품은 캐시미어 염소의 어린 털을 원료로 만든 직물 ‘캐시미어’이다. 1971년에 일어난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파키스탄의 일부였던 동파키스탄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발생했다. 즉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진압하기 이해 파키스탄이 군사행동을 일으키자 인도군이 동파키스탄을 지원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 전쟁은 인도의 압승으로 끝났고, 그 결과 방글라데시가 독립을 선언했다.
한편 1998년이 되자 두 나라는 잇따라 핵실험을 실시, 지역 분쟁이 핵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원글 - 호원님의 http://blog.daum.net/kp180/2374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