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셔먼의 고대 근동사 (2) - 우루크 혁명
게시물ID : history_55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우루크
추천 : 1
조회수 : 329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8/27 23:51:48
-우루크 시대의 빗각 테두리 그릇. 이전 시대의 것과 달리 아무런 문양이나 장식이 없다. 다시 말해 후졌다(...)-

인 류 역사에서 B.C 3000년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 몇몇 문화 발전들이 최고점에 이르고 그 후 이것이 국가, 도시, 문자와 같은 문화 혁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이 시기에 위계질서와 특화된 노동에 의해 조직된 복잡한 사회가 존재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 문화 발전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시작되어 고대 근동 전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전시대의 용기들은 세밀하게 제조되고 장식되었던 반면 B.C 3000년대 초기부터는 거칠고 장식이 없는, 순수히 실용적인 용도를 가진 후진도 자기가 등장했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도시를 이루고 살다 보니 더 많은 수요가 필요했고, 그 때문에 용기를 대량생산한 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시대 전체에 걸친 우루크(Uruk) 시대에 상당한 규모의 사회 변화가 발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우루크 혁명'입니다. 이것은 기원후 19세기의 산업 혁명과 맞먹는 사회 변혁이었습니다.

우 베이드 시대 말기인 B.C 3000년경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정착지 수가 늘어나고 주거지의 크기도 다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정착지는 주변에 위성 도시를 지니기도 했습니다. 파괴되거나 버려져서 그 수가 감소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우루크 시대가 시작함과 동시에 정착지의 수와 규모는 현저히 늘어났는데, 특히 수메르의 중부와 남부 지방이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인구 수는 두 지역이 거의 비슷했으나 중부에서는 사람들이 30~50헥타르 크기의 세 중심지에서 생활한 반면 남부는 우루크라는 하나의 정착지가 지배하였으며 그 크기가 70헥타르에 달했습니다. 당시 정착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으며, 반 유목민족의 정착이나 외부인들이 기후 변화 혹은 다른 이유로 그곳에 이주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중 부와 남부 수메르의 차이를 유지하면서 후기 우루크 시대에도 도시 발전의 과정은 지속되었습니다. 수메르 중부에 영구 정착한 사람들의 인구 증가는 그다지 크지 않았고 자연 증가로 설명됩니다. 우루크를 중심으로 한 남부 수메르 지역에서는 역구 정착민들이 사는 지역이 81헥타르에서 210헥타르로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 증가의 많은 부분은 우루크 자체에서 일어났으며, 그것의 크기가 100헥타르를 넘어섰을 때 주변에 위성 도시를 거느린 명실상부한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 

-본격 문명 5 수메르/길가메쉬 버전. 유닛이 명령을 기다립니다-

이 런 발전이 왜 메소포타미아의 최남단에서 발생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아직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주변의 다양한 생태적 환경이 중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우루크는 페르시아 만의 머리에 있는 늪지대에서 조금 떨어진 내륙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농업은 유프라테스강의 지류를 통한 관개수에 의존하였는데, 이러한 관개 농업으로 곡물과 과수 작물의 풍부한 농작이 가능했습니다. 농지 안쪽에는 스텝 지역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양과 염소 사육이 이루어져 사냥 활동을 보충하였습니다. 근처의 늪지대에서는 풍부한 물고기와 새가 있었고, 물소를 사육하여 우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각 생태적 환경에서 나온 다양한 음식은 식품 생산의 노동 특화로 이어졌습니다. 한 직업에 전문화된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자원을 얻는 노력에 투자했기 때문에 아주 효과적으로 상품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 기술적 발전은 각종 직업을 전문가의 기술을 요하는 어려운 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급자족적이지 않게 되었고, 교환 체계 없이는 생존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지역의 중심지인 우루크가 그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이처럼 교환의 필요성은 우루크라는 도시가 발생하게 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물론 교환의 필요성 이외에도 기후의 변화와 강물 지류의 흐름 변화, 바닷물의 역류 등으로 보다 큰 규모의 관개 시설을 필요로 했고 그로 인해 나타난 협력의 필요성도 중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산업폐기물 빗각 테두리 그릇과 다른 토기 유물들-

도 시 거주민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농사를 지었으나 도시 사회 소수의 사람들은 주변 지역의 행정 중심지로서 도시가 새로운 역할을 갖게 됨에 따라 농경과 관계없는 일들에 특화하여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생산 분야에서는 다양한 전문 장인들이 성장했는데, 우루크 시대 초기에 이미 장식 없는 실용적 도자기들이 등장한 것도 특화된 대량 생산 체계의 결과였습니다. 그릇 형태를 띄고 있는 도자기는 '빗각 테두리 그릇'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비교적 단기간에 생산되었으며 도시 중앙에서 전문 집단이 생산에 관여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른 용품도 전문 장인들에 의해 생산되었는데, 초기에는 그런 생필품 생산이 가족 구성원의 여러 의무 중 하나였습니다. 그 중 직물 직조는 지역 경제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생산은 중앙에서 관리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전문화된 대량생산체계가 잘 나타난 것으로는 발달된 주조틀을 보유한 금속 제련소가 있었습니다.
-우루크 시대 말기 실린더 인장(B.C 3000~2800년 경 유물로 추정) 수메르판 워낭소리 찍냐-

후 기 우루크 시대에 처음 등장했던 한 유물은 메소포타미아 역사 전체를 통틀어 그 지역 문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실린더 인장입니다. 이것에는 문양이 거꾸로 새겨져 있는데 그 인장을 부드러운 진흙판 위에 눌러 굴리면 쉽게 읽을 수 있는 부조 문양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새기는 데 필요한 기술 지식은 초기 신석기 시대에 이미 나타난 도장보다 훨씬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며 인장에 들어가는 장면은 더욱 정교하고 세련되었습니다. 그것은 전문적인 석공이 인장 생산에 관여했음을 시사합니다. 마찬가지로 후기 우루크 시대에는 최초의 거대 미술, 부조, 조각 등이 나타나는데 이 역시 전문가가 아니면 생산할 수 없는 수준의 것들입니다.

-이안나 신전 유적 필요 생산력 : 100 / 유지비 : 2 / 필요 연구 : 철학 / 필요 건물 : 성소-

생 산 노동의 특화는 자급자족적인 가정 경제의 몰락을 가져왔고 그것은 물건 교환을 조직화할 권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 권력은 경제체제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는 이념적 토대를 필요로 했는데 우루크 시대의 메소포타미아에서 그 이념은 바로 종교였습니다. 도시의 신이 물건들을 수납해 백성들에게 재분배했고, 신전은 그 경제체제를 운용하는 중앙 제도였습니다. 우루크를 대표하는 신전으로는 이안나(Eanna) 신전이 있는데, 이는 여러 번 재건축되었으며 외벽으로 둘러싸인 지역 안에 있는 몇 개의 거대 건물들이 동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평지에 위치한 우루크를 중심으로 한 정착지에서 그 건축물이 가진 제의적 기능은 그 지역에서 생산된 물건들이 신들에게 바쳐진다는 명목으로 그곳에 모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역의 생산품들은 신에게 바치는 것처럼 이안나 신전으로 모였으며, 성전 조직의 수장인 제사장-왕이 중보자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신전은 산물의 집산지로서의 새로운 전문 계급인 행정가가 필요했습니다. 우루크 경제는 매우 복잡하여 중앙 기관에 들어오고 나가는 물건을 기록하기 위한 회계 체계나 관료적 기술과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전문인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각종 단위를 측정하는 표준 단위가 생겨났고, 그것들이 필요할 때 참조하기 위해 기록하는 기술인의 기호도 생겼습니다.

-신전의 쫑파티제사 의식. 우측에 금색 옷을 입은 자는 성전 조직 수장인 제사장-왕(EN)일 것이다.-

남 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생활의 형성을 특징짓는 노동의 특화는 그 사회의 근본적인 재창조로 이어졌습니다. 사회 분화의 과정은 위계 사회의 탄생에서 절정에 달하고 자신의 하는 일에 따라 계급이 정해졌습니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이 농부, 어부, 목동이었으며 그들은 가정을 넘어서는 사회적 분화를 겪지 않은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수입원의 일부였던 도시와 지류적 관계를 유지했으며, 자유를 누리면서 개인 토지를 소유했습니다. 

반면 도시 거주민의 대부분은 신전 조직의 일부로 생존을 위해 신전에 의존하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조직은 철저한 위계 질서를 따라 구성되었습니다. 당대 도시의 위계 질서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직업의 표준 목록'이라는 문서가 있는데 후기 우루크 시대에 처음 나타나서 그로부터 1300년 간 충실하게 전승되었습니다. 여러 개의 단으로 구성된 그 목록은 관료의 칭호나 직업의 이름을 위계 순서에 따라 높은 직위로부터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루크 사회의 정점에서는 신전 안에서의 역할에 그 권력을 의존하는 제사장-왕이 있었습니다. 신전 위계의 가장 밑바닥에는 농업을 비롯한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B.C 2000년대에 신전은 내부의 모든 필요를 자족할 수 있을 정도의 인원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신전 노동자들은 배급을 노동의 대가로 받았으며, 후기 우루크 시대에 그런 제도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B.C 3000년대 중반에 빗각 테두리 용기가 처음 등장한 것도 그 당시 이미 곡식 배급 체제가 가동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도시 주민들과 주변 농민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도시의 신전에 의존한 도시 주민들은 안정된 수입원이 있으나 신전에 매여 있는 신세인 반면, 주변의 거주민들은 자유롭지만 흉작과 같은 재난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신전은 모든 사람들의 삶의 중심지였으며, 생산품들의 재배급을 통해 신전은 전 지역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도시가 통제력을 조직적으로 장악했던 B.C 3000년대 후반에는 비록 적은 규모이지만 도시국가도 발달했습니다.

-To be continued-

참고 문헌: 고대 근동 역사(마르크 반 드 미에룹 저)

P.S 1편의 '자연적 경계'파트의 내용이 일부 수정, 추가되었습니다.


원글 - 셔먼님의 http://xpfkxmfhs.egloos.com/2967056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