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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처음으로 사랑하다
게시물ID : panic_549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뿡분
추천 : 25
조회수 : 120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8/06 15:49:14
 
 
 < 처음으로 사랑하다 >
 
 
 
 
남편의 잠자리엔,
오늘도 낯선 여인이 함께였다.
 
고교시절부터 사랑했다는 남편의 첫사랑, 첫연인……,
스물셋 꽃다운 나이를 앞두고 세상을 일찍 떠난 여자.
 
그녀는 세상에 남은 미련을 남편에게 쏟아 붓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3년째 남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적어도 내 앞에 나타난지는 3년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은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오직 내 눈에만 보였다.
 
남편의 눈에도, 아이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
라이벌이라면 라이벌일 내 눈에만 보이다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1년은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기에 모른 척 외면했다.
다음 1년은 여자를 성불시킬 방법을 물색하며 보냈다.
그 다음 1년, 3년째에 접어들자 마음 밑바닥에서 증오심이 스물스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는 모른다.
아이를 둘이나 낳고 가정을 꾸리고도 첫사랑을 못 잊는 남편을 향한 것인지,
그의 뒤에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여자를 향한 것인지.
내 마음을 나도 종잡을 수 없었다.
 
오늘,
 
나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깜빡 선잠이 들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얼굴 위로 시선이 느껴졌다. 남편이었다.
 
“여보. 왔어요?”
 
남편은 소리도 없이 들어와선 나를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명이 꺼진 집안은 정육점의 냉동고 마냥 푸르고 붉었다.
브라운관에서 쏘아져나오는 빛 때문이었다.
냉막한 남편의 얼굴과, 당황한 내 얼굴 위로 무지갯빛 조명이 물결치듯 흘러갔다.
 
“회식 있다기에 더 늦을 줄 알았는데…….”
 
힐끗 확인한 벽시계는 자정을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남편은 소파에 누운 채로 고개만 치켜 든 나를,
텅 빈 공간에 내버려두고 저벅저벅 계단을 올라서기 시작했다.
 
“들어가서 자.”
 
그 한마디만은 내버려둔 채로.
 
우리 부부는 각방을 쓴지 벌써 몇 년 째였다.
막내가 태어난 이후로, 우리는 단 한번도 한 침대에 든 적이 없었다.
아니, 부부관계는 몇 차례 가졌을지 몰라도 밤새 서로의 곁을 지키는 건 불가능했다.
남편은 특유의 무관심으로, 나는 고질적인 불안증으로.
 
그 순간, 갑자기 뒷골이 서늘했다.
역시나, 현관에 검은 그림자가 서있었다.
손님은 아닐 터였다.
사람의 움직임을 포착해 불을 밝히는 센서등은 고요히 잠들어 있었으니까.
 
여자는 어둠속에 몸을 담그곤 남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여자는 표백된 것처럼 그저 하얗기만 했다.
백지장처럼 흰 얼굴에,
거뭇한 눈가,
검푸른 빛을 띠는 입술…….
몇 번을 보아도 소름이 끼치긴 마찬가지였다.
 
어깨 너머로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치맛단 위로 손을 포개어 올린 그녀는 풋풋해보였다.
하기야, 스물셋 생일을 앞두고 죽었다고 하니까. 나보다 열 살은 아래일 터였다.
 
남편의 모습이 2층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는 이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죽은 자의 할 일이란, 그저 산 사람을 관찰하는 게 전부인 것처럼.
 
남편을 애달프게 바라보던 두 눈에 점차 혐오감이 깃들어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의 첫사랑,
그것도 죽어서도 남편을 잊지 못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귀신을 좋게 볼 리 없었다.
 
한 지붕 아래에 한 남자가 있고,
그를 갈망하는 두 여자가 살고 있었다.
드라마의 소재로 쓰일만한 부끄럽고도 자극적인 이야기였다.
가정의 평화가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오직,
그 두 여자중에 한명이 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서재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여자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졌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2층 계단 꼭대기에서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이 보였다.
그녀는 벽을 스르륵 통과해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불륜 형장을 포착하려는 여자처럼 초조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책이 빼곡하게 꽂힌 서재의 한 켠,
초라한 간이침대 위에 웅크린 그림자가 보였다. 남편이었다.
곤히 잠들었는지, 낮게 코고는 소리가 방문 밖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문고리를 꽉 쥐곤 남편 곁에 누워있는 여자를 노려봤다.
여자는 남편의 등을 끌어안고, 그의 체취를 흠뻑 맡으며 누워 있었다.
남편은 세상 모르는 얼굴로 곤히 자고 있었다.
1인용의 비좁은 간이침대 위에 두 남녀의 육체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밀착되어 있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귀신을 상대로 뭘 어쩌자는 거야. 무당을 불러서 굿이라도 할까?
 
여자의 입꼬리가 샐쭉하게 올라갔다.
나의 눈썹이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갔다.
 
우리의 시선이 조용히, 그러나 격렬하게 마주쳤다.
 
“여보…….”
 
남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는 좀처럼 깨지 못하고, 웅얼대며 잠꼬대를 내뱉었다.
나는 좀 더 목소리를 높여서 그를 채근했다.
 
“여보, 안방으로 가요. 왜 만날 서재에서 자는 거예요?”
“……응……누구야, 당신이야?”
 
게슴츠레 뜬 눈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활짝 웃으면서 남편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그래요, 나예요, 당신 와이프.
그러니까 우리, 방으로 가요.
안방으로 가서 함께 자요.
다른 부부들처럼 말예요.
 
한참이 지나도록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은 어느새 다시 곯아 떨어져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빠져나갔다.
여자는 여전히 남편 곁에 누워 있었다. 샐쭉 올라간 입꼬리로 나를 비웃으면서.
 
소년시절의 감성에 젖어서 허우적대고 있는 남편을,
그런 남편의 뒤를 따라다니는 첫사랑의 영혼을, 나보고 어떻게 지우라는 걸까.
나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그저 모르는 척 하면서 살아가는 수밖에는.
 
 
 
 
 
 
“은혜야 일어나. 지각하겠다.”
 
아무렇지 않게 아침상을 차리고 아이의 등원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지만,
밤을 새다시피 한 내 속은 결코 평화롭지 못했다.
10분간의 사투를 벌인 끝에, 아이는 천사같이 예쁜 눈을 깜빡이며 내 품에 안겨들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달큰하고 따뜻한 체취가 콧속을 가득 메웠다.
 
밖으로 나오니 남편은 벌써 신발을 신고 있었다.
 
“가는 거예요? 식사하고 가요. 해장국 끓였는데.”
“늦었어.”
 
매정하게 뿌리치는 남편의 등에 대고 “여보!”하고 외쳤다.
그러자 웬일로 남편이 우뚝 멈춰서며 물었다.
 
“오늘 오랜만에 외식이나 할까?”
“아빠, 우리 뭐 먹으러 가요?”
“은혜 먹고 싶은 거 생각해놔. 아빠 퇴근하면 먹으러 가자.”
“나는 장난감 사러 가고 싶은데.”
“그래, 장난감도 사자.”
 
드물게 다정한 모습이었다.
 
“엄마, 기분 좋아?”
“왜? 그래 보이니?”
“응. 계속 웃고 있잖아.”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좋은 예감. 행복한 하루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집안을 쓸고 닦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잡지에서 본 옷을 사 입었다.
데이트를 고대하는 사람처럼 시계를 힐끔대며 저녁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오후가 되어 애들이 집에 돌아왔다.
간식을 먹이고 말끔하니 씻겨서 외출복으로 갈아입혔는데도, 남편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돌아왔어야 할 시간이었다.
 
“차가 밀리나보다.”
 
차가 밀리면 늦는다고 연락할 사람이었다.
 
“전화를 안 받으시네. 진동으로 해놓으셨나 봐.”
 
둘째의 짧은 인내심이 바닥났다.
외출복이 갑갑하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에게 사탕을 쥐어주며 속삭였다.
 
“금방 오실거야. 오고 계실테니까.”
 
하지만 10시가 되어도, 자정이 넘어서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의 다정한 인사를 끝으로, 그는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연락을 받은 건 새벽녘이었다.
 
실종신고라도 해야겠다고 지갑을 챙겨서 일어나던 참이었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천둥소리를 들은 듯 깜짝 놀라 빽빽 울어대는 전화통을 바라봤다.
끈질기게 울리는 놈의 수화기를 들어올려 귀에 대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철중 씨 댁이죠?”
 
시계의 시침이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병원으로 급히 와주셔야겠어요.”
 
“무슨 일인가요? 집에, 집에……애들이 있는데…….”
“맡길 곳이 없나요? 아무튼 서둘러서 와주세요.”
 
아이들을 데려오면 곤란하다는 투였다.
나는 이유에 관해 깊게 생각하지도 못하고 무작정 자는 애들을 깨워 병원으로 향했다.
졸려서 고개를 못 가누는 둘째를 안고 응급실에 들어서자 남자 두 명이 먼저 다가왔다.
 
“민철중 씨 부인 되십니까?”
“네. 그이는……어딜 어떻게 다친 거예요?”
 
난생 처음 보는 남자들 손에 아이들을 맡기고, 의사가 안내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손을 소독하고 마스크를 쓰고 겨우겨우 안으로 들어갔다.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누워있는 환자들을 보고 나서 이곳이 중환자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곳에서, 남편은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코며 손등에 연결된 호스들이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얼굴이며 목 언저리가 온통 피투성이었다.
얼굴이 부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남편은 아무리 불러도, 흔들어도 대답이 없었다.
 
“운이 나빴어요.”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그 주차장이 평소에는 경비가 순찰도 돌고, cctv도 잘 돌아가는 곳인데, 그날따라 경비업체 휴가에다가 기계는 수리에 들어가서……조금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거라더군요.”
 
“뺑소니인가요?”
“아뇨.”
“소매치기인가요? 퍽치기?”
 
연이은 내 질문에, 그는 절레절레 고개만 흔들었다.
 
“이 사람 도대체, 왜 이렇게 다친 거죠?”
 
“익스트림 스포츠처럼 뭉쳐 다니면서 재미로 폭력을 행하는 패거리가 있어요. 남편분께선 정말……운이 나빴어요.”
 
일주일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의사는 고비를 넘겼다고 했지만 남편은 더 이상 호전되지 않았다.
의식도, 움직임도, 그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어쩌면 평생을 침대 위에서 기계에 둘러싸여 살아갈지도 몰랐다.
 
중환자실 앞 의자에 시체처럼 늘어져 앉아있는 내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 앉았다.
말쑥한 인상의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무언가를 내밀었다.
 
“저, 사모님. 장기기증에 관한 서류인데요, 한번 읽어보시라고 가져왔습니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모두 시댁에 가있었다.
텅빈 집안에 홀로 앉아있으려니 숨이 턱턱 막혔다.
 
며칠 새 자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잊고 지낸 탓에 긴장감이 풀리자 잠이 몰려왔다.
나는 소파에 기대어 앉은 채로 기절하듯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일주일 전 남편이 우두커니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그리움이 밀려왔다. 눈을 뜨기도 전에 눈물부터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디에 숨겼어.”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젊고, 새된 여자의 음성은 질문이라기보다 흐느낌에 가까웠다.
 
그 여자였다.
늘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남편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그 여자.
 
그 창백한 얼굴이 코앞에 드밀어져 있었다.
 
“어딨어!!!! 어쨌어?!!!!”
 
그러더니 갑자기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분명,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촉감이 느껴지는 건 불가능할 텐데도
얼음장처럼 찬 손가락들이 목을 파고드는 느낌이 선명했다.
 
“어디에 숨겼어!!!! 내놔!!!! 내놔!!!!!!!!!”
 
 
 
 
 
 
 
 
 “!!!!!!!!”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물에 빠졌다가 구출된 사람처럼 다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 맺힌 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모두 꿈이었다.
 여자가 내 목을 조른 것도, 야차처럼 무서운 얼굴로 비명을 질러대던 것도.
 잠에서 깨자 숨통을 조여 오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있었다. 너무나 끔찍한 꿈이었다.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몸을 씻고 나왔을 때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주무셨어요?”
 
 남편의 동생이었다.
 
 “아뇨. 어쩐 일이세요? 이 시간에.”
 “형이 깨어났대요. 저도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어요.”
 
 그 길로 뛰쳐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복도에 시댁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형수님, 거긴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었어요?”
 “네?”
 “멍이에요, 그거? 손자국 같은데?”
 
 옷깃으로 목을 감추며 허둥지둥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춰보니 시퍼런 멍이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분명히 꿈인 줄로 알았는데, 멍자국은 대체 뭐란 말인가.
 목을 조르던 얼음장같은 손가락, 여자의 스산한 음성이 떠올랐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목의 멍과 함께 감추면서 남편의 병실로 들어갔다.
 병실에 들어선 순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남편이 깨어나,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아무 소득 없이 1인실로 옮긴 게 바로 엊그제였다.
 
 나를 쳐다보는 남편의 얼굴은 너무나 멀쩡했다.
 지난 일은 모두 꿈인 것 같았다.
 
 “여보, 나 기억나요?”
 “…….”
 “여보……?”
 
 히죽.
 
 남편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내 목 언저리였다.
 목에 찍힌 손자국을 보며 웃고 있었다.
 샐쭉, 올라간 입꼬리가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그는 공포에 질린 나에게 다가올 작정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걸음,
 두걸음……우리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유모를 공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여보. 왜 그래요. 왜 웃어요? 왜……그 여자처럼…….”
 
 달칵.
 바로 그때 문이 열렸다.
 시어머니였다.
 그녀는 일어서있는 남편에게 달려와 얼른 그를 부축했다.
 아픈 사람을 혼자 서있게 하냐는 질책이 쏟아졌지만,
 나는 멍한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시어머니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남편은 과연 나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을까.
 지금은 순한 양처럼 시어머니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다지만,
 조금 전의 남편의 눈빛은 그 여자와 똑같았다.
 나를 바라보던, 그 혐오감 어린 시선.
 
 여자가 남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다음 순간,
 남편은 기적처럼 의식을 되찾았다.
 기뻐해야할 일이었음에도 저 남자는, 저 사람은 내 남편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건 그 여자다.
 
 그 여자가 남편의 몸에 들어간 게 분명했다.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남편이 잠들자, 시어머니는 조용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 일찍 오마. 죽이랑 끓여가지고 올 테니까, 아가 밤새 고생 좀 해라.”
 “……네, 어머님.”
 
 시댁 식구들이 떠나고 나자 병실은 무덤 속처럼 적막했다.
 싸늘한 냉기를 견디지 못하고 간호사실로 가서 담요를 받아가지고 와서 몸에 둘렀다.
 남편의 심장과 이어진 기계에서 나는 규칙적인 소리가 자장가처럼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누워서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복도의 불빛을 보고 있었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이 드는 순간 남편의 손이 내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끼이익.
 
 침대가 비명을 토해냈다.
 남편이 일어서고 있었다.
 침대 아래로 내려선 그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포로 인해 숨이 턱턱 막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어딜 가는 거지?
 
 공포로 인해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문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저건 남편이 아니야, 그 여자야. 그러니 나를 죽이고 말거야.
 
 나는 담요 안에 웅크리고 앉아서, 덜덜 떨며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십분이 지나도, 삼십분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밖에 잠깐 앉아 있는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가 일주일만에 의식을 차린 환자라는 걸 뻔히 알고 있는 간호사들이 그렇게 내버려둘 리 없었으니까.
 
 차츰 공포는 잦아들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마음을 다잡고 남편을 찾으러 가려고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고 했다.
 
 끼익.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남편을 찾아 복도를 헤매고 있을 터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얼른 담요로 얼굴을 덮었다.
 
 터벅터벅.
 
 남편의 발소리였다.
 담요 틈새로 고약한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구역질을 하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아야 할 정도였다.
 축축하면서도 비릿한 냄새였다. 마치 피 냄새 같은.
 
 피?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기겁하고 말았다.
 새벽에 병실을 빠져나가 한참만에 돌아온 사람이 피 냄새를 묻히고 왔다니.
 
 남편이 잠든 걸 확인한 나는 조용히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남편의 몸에 불빛을 조심스레 비춰보았다. 얼굴과 손은 깨끗했다.
 그럼 이 냄새는 도대체 뭐지? 무심코 이불을 들춰본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남편의 발이 피 투성이었다.
 
 “……!!!”
 
 바닥에도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붉은 발자국이 남편이 걸어온 자리를 따라 꼬리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자국을 문질러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였다.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화장시를 한움큼 뜯어서 물을 묻혔다.
 그리고 그걸로 병실과 복도에 이어진 자국들을 벅벅 문지르기 시작했다.
 젖어서 힘없이 찢어지는 화장지를 내팽개치고 가디건을 벗어서 자국을 문질렀다.
 피로 된 발자국은 아직 굳어 있지 않았다.
 덕분에 쉽게 지울 수 있었지만 이 발자국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를 일이었다.
 
 비상구의 계단까지 닦고 돌아오자 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여자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동안 잠자코 남편의 그림자로 사는 걸로 만족했으면서,
 왜 하필 이때, 위기가 찾아온 이때, 남편을 해코지 하는 걸까.
 설마 처음부터 몸을 차지하려고 곁을 맴돌았단 말이야?
 
 밤사이에 일어난 일을 알 리 없는 시어머니는 내 안색을 보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눈 깜빡할 사이에 다시 밤이 찾아왔다.
 나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누워서 남편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하지만 나의 바람을 깨부수듯이 남편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터벅터벅, 맨발로 걸어가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보름이 넘는 시간동안 남편의 외출은 계속되었다.

 흙을 묻혀오는 날도 있었고,
 오물을 잔뜩 묻혀 오는 날도 있었다.
 
 나는 엉망이 된 남편의 발을 닦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도, 안도하고는 했다.
 환자복을 입은 차림으로 거리를 헤매고 다닐 게 눈에 그려지는 듯했지만, 그래도 안도했다.
 그래도 피는 아니니까.
 그래, 피는 아니잖아.
 
 보름이 되던 날이었다.
 우연히 뉴스를 보았다.
 
 최근 이 일대에서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뉴스였다.
 언뜻 봐선 아무 연관성 없어 보였던 세 명의 피해자.
 그들의 공통점이라곤 동호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형사의 말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익스트림 스포츠처럼 뭉쳐 다니면서 재미로 폭력을 행사하는 패거리가 있어요.’
 
 세 명의 피해자.
 그들이 목숨을 잃은 날은 남편이 피를 묻히고 돌아온 날과 정확히 일치했다.
 
 끼기긱…….
 
 침대 소리에 흠칫 놀라 눈을 떴다.
 남편이 머리맡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그 여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남편의 첫사랑.
 여자의 첫사랑.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하나의 육체에 두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여자는 의미모를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목을 졸랐던 그날보다 더한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그녀는 나약하게 주저 앉아있는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너를 대신해서, 내가 정의를 실현하겠노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복도까지 길게 이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남편을 따라갔지만 차마 붙잡지 못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여자가 밤마다 무엇을 하는지,
 뻘건 눈을 굴리며 누구를 찾아 도시를 헤매다 돌아오는지,
 눈치채버린 게 후회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밤새 여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내내 갖고 있던 공포는 여전했지만, 그녀에게 꼭 할 말이 있었다.
 
 하지만 날이 밝도록 남편은 병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혈압을 체크하러 들어온 간호사가 깜짝 놀라며 환자의 행방을 물었다.
 병원에서 연락을 받은 시어머니가 사색이 되어 나타났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남편의 기이한 외출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다음날,
 나는,
 마지막 피해자의 죽음이 뉴스에 보도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남자의 모습이 화면에 스쳐갔다.
 
 그가 입고 있는 환자복을 멍하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 *
 
 
 “참 소름끼치는 일이야. 안 그래?”
 “뭐가?”
 “피해자가 가해자를 죽였다면, 그게 피해자일까 가해자일까.”
 
 최 형사는 침묵을 지키는 동료 형사를 돌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동료 형사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장례식장에서 빠져나오는 일가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독한 마음으로 자길 때린 놈들한테 복수까지 하고 다녔으면서, 목을 맬 건 또 뭐야? 요즘 같아선 살맛이 안 난다. 언론에서 쪼아대지, 위에서 쪼아대지. 하룻밤 새에 목을 매달 줄 누가 알았겠어. 드디어 잡았다 했는데.”
 
 “이제 끝이구나 싶었겠지.”
 
 “그래도……애들이 둘씩이나 있는 가장인데. 와이프로 아직 젊고, 남은 사람들은 어쩌라고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동료 형사의 입이 가로로 길게 찢어졌다.
 
 “너, 결혼하고 싶냐? 애들 쳐다보는 눈이 아주 촉촉하다, 최 형사.”
 “그야……불쌍하잖아. 아빠가 겨우 의식을 되찾았나 싶었더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으니까.”
 
 그 순간 검은 상복을 입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발인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새벽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덕분에 여자의 얼굴엔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형사는 거뭇한 여자의 눈가를 바라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여자도 그를 알아봤는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여자의 남편이 폭력사건의 피해자로 의식불명으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됐을 때
 사건을 맡았던 담당 형사가 바로 그들이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늘 새벽에 발인이 있다기에 한번 와봤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길이었거든요.”
 
 그는 여자의 눈치를 보면서 “애들 생각해서라도 기운 내십시오”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여자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시신이 실린 운구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이는 자살한 게 아니에요.”
 “네?”
 “그이는, 그 남자들한테 폭행을 당한 날 이미 죽은 거였어요.”
 
 최 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여자,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자기 남편이 사람을 넷이나 죽였다는 걸 인정 못하겠단 거야, 뭐야?
 그 네 사람이 사람을 납치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가해왔던 악인이라고 해도,
 면죄부는 주어지지 않는다. 사람을 죽인 건, 죽인 거였다.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형사님은, 첫사랑을 기억하시나요?”
 “예??”
 
 형사의 의문이 더욱 깊어졌다.
 이 여자, 왜 이러는 걸까. 불행에 불행이 겹쳐서 머리가 잘못 돼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동료 형사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또 그새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남자들은 원래 그런 건가요? 첫사랑은 잊혀지지 않는 건가요? 아님, 저 두 사람이 특별한 케이스인 걸까요……저는 모르겠어요. 이제, 함께 할 수 있으니까 행복할까요?”
 “글쎄요…….”
 “쓸데없는 질문을 하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여자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형사를 똑바로 쳐다봤다.
 광기보다는 체념이 깃든 얼굴이었다. 모든 걸 체념하기로 한 사람처럼.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어요. 남편은 결백하다는 걸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손을 피로 더럽힌 것도, 모두 남편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걸 누군가는 꼭 알아줬으면 했어요.”
 “남편분이 범인이 아니라면, 누구라는 거죠? 알고 있는 거라도 있습니까?”
 
 형사가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그녀를 추궁했지만,
 여자는 이미 형사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어딘가를 응시하면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이걸로 전 영영 저 여자를 이길 수 없게 됐어요.”
 
 장지로 떠날 준비가 모두 끝났다.
 죽은 이의 부인이 차에 오르기를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형사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작별인사를 건네었다.
 
 “이제 가나보네.”
 
 어느새 나타난 동료 형사가 최 형사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어디갔다오냐?”
 “물 좀 빼러. 표정이 왜 그래?”
 “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아서.”
 “어? 저 집, 애들이 좀 어리지 않았었나?”
 
 동료 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운구차의 맨 앞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들이 상주였나보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데. 쯔쯧.”
 “무슨 소리야?”
 “머리 긴 여자애랑 나란히 앉아있는 저 남자애 말이야. 아빠랑 똑같이 생겼네.”
 
 최 형사가 미간을 구겼다.
 무슨 헛소리야?  저집은 딸만 둘인데.
 그가 물으려는 찰나 운구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집의 차량이 장례식장의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최 형사가 눈을 벅벅 문질렀다.
 
 차가 커브를 도는 순간에 나란히 앉아 있는 소년과 소녀를 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야. 쓸데없이 이상한 말을 늘어놓아서.
 미망인의 기묘한 발언과 체념한 얼굴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그는 그 모든 걸 지우겠다는 작정으로 동료를 잡아 이끌었다.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하러 가자.”
 
 그 한마디에, 동료는
 “그래, 좋지”,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따라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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