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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vs 자연. 처녀지개간메달.
게시물ID : history_54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SKY!
추천 : 2
조회수 : 157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8/27 16:25:48


http://mirror.enha.kr/wiki/%EC%B2%98%EB%85%80%EC%A7%80%EA%B0%9C%EA%B0%84%EB%A9%94%EB%8B%AC#rfn2



Contents

1 개요
2 삽질 : 처녀지 개간 사업
3 참고항목

1 개요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우랄, 볼가 강, 북코카서스의 처녀지를 개발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훌륭한 성적으로 크게 이바지한 노동자, 농민, 조직, 당 활동가, 콤소몰 단원 및 지회 등등...[1]에게 수여되는 메달. 1956년 10월 20일에 제정되어 1,345,520명이 받았다.

개인에게만 수여되지는 않았고 조직에게도 수여되었다. 참고로 유리 가가린에게도 이 메달이 수여되었다. 우주에 맨 처음 나간것도 처녀지 개발로 쳐준듯.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0/0b/For_Development_of_the_Virgin_Lands_REVERSE.jpg

훈장의 뒷면. 왼쪽은 밀이고 오른쪽은 옥수수이다.


이 메달은 흐루쇼프가 주도하여 소련의 국가적 사업으로 자리매김한 처녀지 개간 사업을 독려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는데, 처녀지 개간 사업은 소련 역사상 최고의 삽질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사업이다.

2 삽질 : 처녀지 개간 사업


이오시프 스탈린의 뒤를 이어 새로이 소련의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하루 빨리 미국을 따라잡고 싶어 했다.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라는 드립까지 쳤는데 당연하지 않겠는가. 흐루쇼프는 우선 농업 생산에서 천조국의 위엄을 따라잡고 싶어했다. 물론 불가능 당시 흐루쇼프의 공약이 얼마나 허황 ㅤㄷㅚㅆ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위엄찬 공약이었다. 겨우 3~4년 안에 소련의 버터, 우유, 육류 1인당 생산량에서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해버린 것. 참고로 미국의 소고기 생산은 소련보다 세 배 많았다.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공약이 레알 말도 안됨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는 정말로 공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북부 카자흐스탄, 서시베리아, 북캅카스, 우랄 지역의 거대한 처녀지를 개간하면 농업 생산이 치트키를 친 듯이 늘어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흐루쇼프는 통이 크고 화끈한 사람이었기에 그래서 축출ㅤㄷㅚㅆ지 1,200만 헥타르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처녀지 개간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계획의 골자는 이랬다.

어린이도 알기 쉬운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계획

1. 우선 소고기 생산을 늘려야 쓰겄다.
2. 그런데 소를 키우려면 사료가 어마어마하게 필요하겠지?
3. 그 사료는 옥수수로 때우면 된다.
4. 근데 옥수수는 소련에서 키우기 기후가 안 맞잖아?
5. ????
6. PROFIT!

어쨌든 흐루쇼프는 이 계획이 농업 좆망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파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국가적으로 이 사업을 팍팍 밀어줬기에 젊은 공산당원 수천명이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대부분 농사 경험도 없었고 농기구를 다룰 수도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지원도 거의 받지 못했다. 게다가 정부의 지시도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다. 상식적인 농학자들은 이곳은 원래부터 강수량이 부족하던 지역이라 휴경을 많이 하고 파종을 늦게 해야한다고 말했으나 사이비 과학자인 트로핌 리센코는 조기 파종과 휴한기 없는 집약적 경작이라는 개소리을 계속 노래해댔다.

흐루쇼프는 거기다가 계속 삽질을 추가해댔다. 흐루쇼프는 국가에 판매한 육류의 량을 세 배인 15만톤으로 늘리겠다는 약속을 지킨 라쟌 지역의 당 제1서기 알렉세이 라리오노프를 사회주의노력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물론 이건 개구라였다. 그는 장부상 수치를 부풀리기 위하여 종자용 가축과 젖소를 도축장으로 보내고 농민들에게 소를 사서 되팔고 또다시 매입해서 목표를 달성했다. 라리오노프는 죄책감에 못 이겨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이런 비극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처녀지 경작을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 되었고 드디어 그 후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트로핌 리센코의 조기 파종과 휴한 없는 정책은 엄청난 잡초 번식을 초래했다. 그런데 소련의 제초제 생산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소련에서는 잡초가 제초제를 죽입니다! 게다가 전문가들이 경고했듯이 가뭄으로 카자흐 처녀지의 표토가 죄다 말라 붙었고 이쪽의 특징인 강한 바람이 그 말라 붙은 표토를 멀리 멀리 날려버려 600만 헥타르의 토지가 황폐화 되었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흐루쇼프의 비장의 카드인 옥수수는 3400만 헥타르에 파종했으나 640만 헥타르에서 밖에 수확할 수 없었다. 패왕의 작물 옥수수를 재배하려고 하다니 건방진 흐루쇼프그야말로 총체적 난관. 아무리 근성의 공산주의도 기후와 자연에 깝치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옥수수 경작 등의 삽질로 원래 소 사료로 애용되던 건초용 목초 수확량은 처참했다. 결국 미국 생산량을 뛰어 넘겠다던 낙농과 육류의 생산량은 잉여가 되었고 가격이 3분의 1이나 폭등하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북캅카스[2]의 노보체르카스크의 노동자들은 "흐루쇼프를 갈기갈기 찢어 소세지로 만들자!"라고 외치면서 지역 당 본부로 행진을 벌였다. 이 행진을 잘 보기 위하여 아이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상황이었는데 중요한 건 군대가 시위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허공에 대고 총을 쏘아 버린 것. 그 때문에 아이들은 군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브라이언 모이나한은 이 사건을 평하면서 "소련 체제는 확실히 땅에서보다 우주에서 더 잘 나갔다"라고 말했다.






참고 : 흐루쇼프의 농업정책 실패

http://mirror.enha.kr/wiki/%EB%8B%88%ED%82%A4%ED%83%80%20%ED%9D%90%EB%A3%A8%EC%87%BC%ED%94%84#s-5.2


위에서 설명한 냉온탕을 오가는 대외정책과 군부의 반발뿐만 아니라, 농업정책의 실패도 흐루쇼프의 몰락에 큰 영향을 끼쳤다.

흐루쇼프는 소련에 있는 광대한 처녀지를 개간하고자 하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실시한 게 처녀지 개간 사업인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처녀지개간메달을 참조.

그런데 그가 개간하려는 처녀지의 대부분이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이런 곳이었던 지라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에 별로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다. 우선 춥다. 그리고 메말라 있었다. 제대로 농사 시작하면 망하기 딱 좋은 땅이라는 말. 하지만 그는 스탈린도 구워 삶았던 트로핌 리센코의 '춘화이론'을 신봉하고 있었다. 리센코의 춘화이론을 대충 요약하자면, 종자를 냉각시키는 춘화처리를 하면 추위를 이기는 품종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근데 이것은 1대에 그치는 형질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것.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황우석처럼 실험데이터 조작도 서슴치 않았고, 언플력도 상당했는지 공산당 고위 관리조차 낚아서 많은 연구비를 타내기도 했다.

어쨌든 이것은 용불용설의 변형으로 대부분의 소련 생물학자는 이를 유사과학이라고 주장했으나, 흐루쇼프는 무학이었기 때문에 리센코 이론이 공산주의 원리에 맞는다고 주장하면서 대대적으로 종자에 춘화 처리를 실시했다. 다만 당시 리센코는 흐루쇼프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지식이 별볼일 없던 여러 공산당 고관들을 낚았으므로(심지어 스탈린도 낚였다.) , 흐루쇼프가 무식해서 리센코를 추종했다기보단 어쩔수 없이 리센코를 따른것이라고 보는것이 옳다. 소련 생물학회에선 1930년대까지만 해도 니콜라이 바빌로프를 필두로 한 유전자설[20]이 대세였고 바빌로프 역시 아메리카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돌아다니며 무려 40000개의 품종을 들여오는등 열정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대숙청 당시 스탈린과 친분이 두터웠던 리센코와 달리 인맥이 없던 바빌로프는 고작 5분동안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 형무소로 끌려갔고 아이러니하게 소련인민의 굶주림을 해결하기위해 평생을 바친 그는 3년후 형무소에서 굶어죽고 만다.

그후 리센코는 소련 생물학회 아니 소련 과학계를 지배하게 됐으니 흐루쇼프가 설령 지식인 출신이라 해도 이건 어쩔수가 없는 상황이었다.[21]

뭐가 어찌되었든 결과는? 소련 농업은 망했어요. 안그래도 집단농장체제의 비효율 때문에 생산성이 저하되었는데, 멀쩡한 종자를 냉동시키다가 결국 종자에 손상만 줘서 농업생산량이 급감하였다. 때문에 적국인 미국에서 대규모의 식량을 수입할수밖에 없었고 이는 그의 지도력에 흠집을 냈다. 처녀지개간메달 문서에 이때의 참상이 잘 나타나 있다.

여담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다른 공산국가에서는 한 독재자가 이에 질세라, "저 새는 해로운 새다" 는 모토로 농업 증산을 실시했다가 비슷하게 농업을 말아먹었다. 다만 흐루쇼프는 잘못을 인정하고 재빨리 부족한 곡물을 수입해서 대규모 기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이를 감추고 "우리 풍년이 들었다"며, 외국에 곡물수출을 계속하다가 수천만이 굶어죽게된다. 이런 것을 보면 공산국가 지도자들이 자주 벌이는 현지지도라는게 얼마나 병크가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독재자가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저새는 해로운..)이나, 잘 모르고 한 말("리센코 이론은 공산주의 이론에 ..")이 성구가 되어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그래도 흐루쇼프는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받았다. 뭐 자기가 집권하고 있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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