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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지조론 - 변절자를 향하여
게시물ID : sisa_3962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가인40
추천 : 1
조회수 : 74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5/29 19:18:09


                   지조론(志操論)
                               - '변절자'를 향하여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 확고한 집념)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엄숙한 차림새)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와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배신하는 변절자를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의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깨우침의 각성)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정치가와 경제활동하는 상인의 결합)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口腹)과 명리를 위한 부동(浮動,떠다님)은 무지조로 규탄되어 마땅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한 직업정치인보다 지사적 품격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전체의 충정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염결(廉潔,청렴과 결백), 공정(公正), 청백(淸白), 강의(剛毅,굳고 의연함)한 지사정치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唾罵,침뱉고 꾸짖음)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를 장사꾼의 이욕과 계교와 음부적 환락의 탐혹(眈惑)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極言)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선 이미 시대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나 홀아비가 개가(改嫁)하고 재취(再娶)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 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寡婦)나 환부(鰥夫,홀아비)가 사랑하는 옛짝을 위하여 또는 그 자녀를 위하여 개가나 속현(續絃,아내를 여읜 뒤 새 아내를 얻음)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능히 어려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本能苦)를 이성과 의지로써 초극(超克)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와 고위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일찌감치 집어던지고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口腹)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떡거리는 것이 자연한 일이지, 못나게 쪼를 뿌린다고 굶주리고 얻어 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 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 방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도 자기를 이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문제이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을 늘어 놓는 것은 분반(噴飯,웃음이 터져 나옴)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고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 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자시(自尊自恃)를 위해서는 자학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 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기이한 성벽)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 단재(신채호)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 선생의 지조가 낳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들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이다. 한 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譚)]의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야당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교활한 슬기)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綻露)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라는 뜻이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에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變節)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가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의 변절자로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전선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치욕에 김상헌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당시 민족 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전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침을 뱉음)되기는 했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 앞에 든 최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일제 말기 말살되는 국어의 명맥을 붙들고 살렸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 해방의 날을 위한 유일한 준비가 되었던 <맞춤법 통일안>, <표준말모음>, <큰 사전>을 편찬한 조선어학회가 국민총력연맹 조선어학회지부의 간판을 붙인 것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간판은 변절의 비난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옹(佐翁), 고우(古愚), 육당, 춘원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말의 대일 협력의 이름은 그 변신을 통한 아무런 성과도 없기 때문에 애석하나마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을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반민특위에 불리었고, 거기서 그들의 허물을 벋겨주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못하고 누명만 쓸 바에는 무위(無爲)한 채로 민족정기의 사표가 됨만 같지 못한 것이다. 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 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숙제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이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 다거나, 바람이 났거나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을 획책(劃策)도 못해 봤다면 그건 변절의 낙인밖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 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의 황음(荒淫)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 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그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도 나중에는 화간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은가.

   만근(輓近) 30년래에 우리 나라는 변절자가 많은 나라였다. 일제 말의 친일 전향, 해방 후 남로당의 탈당, 또 최근의 민주당의 탈당, 이것은 20년이 넘은, 사상적으로 철이 난 사람들의 주착 없는 변절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궤이다. 감당도 못할 일을 제 자신도 율(律)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민족이니 사회니 하고 나섰더라는 말인가. 지성인의 변절은 그것이 개과천선이든, 무엇이든 인간적으로는 일단 모욕을 자취(自取)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쫓으면 한 평생 분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苦節)이 아랑곳 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늦게 배운 잘못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을 더욱 힘 쓸 것이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든 탓으로 바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飜然, 깨달음이 갑작스러움)히 깨우치라. 한일합방 때 자결한 지사시인 황매천(黃梅泉)은 정탈(定奪)이 매운 분으로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이란 평을 듣거니와 그 [매천야록]을 보면 민충정공, 이용익 두 분의 초년 행적을 헐떧은 곳이 있다. 오늘에 누가 민충정공, 이용익 선생을 욕하는 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 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도도히 밀려오는 망국의 탁류 - 이 금력과 권력, 사악 앞에 목숨으로써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지조의 함성을 높이 외치라. 그 지성 앞에는 사나운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천하의 대세가 바른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때에 변절이란 무슨 어처구니 없는 말인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어도 자기를 위한 36년의 선견지명(?)은 가졌었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형색은 딱하기 짝이 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소인기(小忍飢.배고픔을 조금 참다)하라.'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가 있다.
광해군의 난정(亂政) 때 깨끗한 선비들은 나아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어떤 선비들이 모여 바둑과 청담으로 소일하는데, 그 집 주인은 적빈(赤貧)이 여세(如洗.씻은 듯하다)라, 그 부인이 남편의 친구들을 위하여 점심에 수제비국이라도 끓여 드리려 하니 땔나무가 없었다. 궤짝을 뜯어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쪼개다가 잘못되어 젖을 찍고 말았다. 바둑 두던 선비들은 갑자기 안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다. 주인이 들어갔다가 나와서 사실 얘기를 하고 초연히 하는 말이, 가난이 죄라고 탄식하였다. 그 탄식을 듣고 선비 하나가 일어서며, 가난이 원순 줄 이제 처음 알았느냐고 야유하고 간 뒤고 그 선비는 다시 그 집에 오지 않았다. 몇 해 뒤 그 주인은 첫뜻을 바꾸어 나아가 벼슬하다가 반정 때 몰리어 죽게 되었다. 수레에 실려서 형장(刑場)으로 가는데 길가 숲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한 다음, 가지고 온 닭 한 마리와 술병을 내 놓고 같이 나누며 영결(永訣)하였다.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자네가 새삼스레 가난을 탄식할 때 나는 자네가 마음이 변한 줄 이미 알고 발을 끊었다고 했다. 고기 밥맛에 끌리어 절개를 팔고 이쏠이 되었으니, 죽으면 고기맛을 못 잊어서 어쩌겠느냐는 야유가 숨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찾은 것은 우정이었다.

   죄인은 수레에 다시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탄식하였다.
     '소인기, 소인기(小忍飢)하라.'고-
   변절자에게도 양심이 있다. 야당에서 권력으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실세(失勢)한 사람도 있고, 지금 요추(要樞.중요한 요직)에 앉은 사람도 있으며,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명은 버젓하나 뜻 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良心)이란 것이다. 

   구복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명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핑계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개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는가.

   양가(良家)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自任)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全文)  

[p.s.1]
친일매국노를 처벌하기 위해 해방 후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反民族法)'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어 친일매국노들을 처벌 시작하였으나,
당시 이승만과 친일잔재세력(경찰등)의 반대 음모가 계속되었다.

 이승만은 담화를 통하여 반민특위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요지는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반되며 안보상황이 위급한 때 경찰을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대법원장(반민특위특별재판부장) 김병로는 반민특위활동이 불법이 아니라는 담화를 발표하고 정부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계속 비협조로 일관하더니 2월 24일 반민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반민법 법률개정안을 제2회 39차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결과는 부결되었으며, 특위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8 ·15광복 직후 무엇보다도 신속히 친일파를 척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초기에 기회를 놓쳤고, 이후 미군정은 남한에 반공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공산세력에 대항할 세력으로 친일파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친일파의 청산은 미국의 국익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로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의 통치구조를 부활시키고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어 등장한 이승만정권 역시 미군정의 통치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았고, 친일파는 이승만의 정권장악과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또 이를 위하여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무력화시켰다. 그 결과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의 활동은 실패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친일세력이 그 후에도 한국사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길을 열어준 것은 물론이고, 한국민족주의의 좌절과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p.s.2]
임시정부 측은  ‘이 반민족행위자 문제는 민족적인 양심으로 논의되어야 할 지상명제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해 이 문제가 당리당략 차원에서 접근되는 데 대해 경계하고 있다. 일반 국민들에게 친일파 문제가 당리당략이나 한풀이 식으로 접근할 사안이 아니라 ‘민족적인 양심'으로 접근해야 할 ‘지상명제'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임정에서 친일매국노의 핵심으로 숫자가 높은 친일반역 열성분자로 분류한 자들은 다음과 같다.
이성환(국민동원총진회 이사장)·이승우(국민동원총진회 이사)· 춘원 이광수(소설가,시인)로 이들은 모두 正자가 셋, 15란 숫가가 매겨져있고,  다음으로는 윤치호(연희전문 교장, 45년 12월 사망), 주요한(시인)으로 13이라는 숫자가 매겨져 있으며, 뒤이어 김동환(시인)이 12, 고원훈(중추원 참의)·조병상(종로경방단장·중추원 참의)·한상룡(조선총력연맹 사무총장)’등에게는 10이라는 숫자가 매겨져 있다.

박인덕(청화여숙장)·이종린(천도교 간부)·김활란(金活蘭, 창씨명 天城活蘭, 1899∼1970, 이화여전 교장)·신흥우(목사)·유진오(고려대 총장 역임, 교육자) 등은 9, 김연수(경성방직 사장, 김성수 동아일보 창업사장 형)·손영목(도지사)·모윤숙(시인)·최린(천도교 간부) 등은 8, 박흥식(조선비행기공업회사 사장)·장덕수(보성전문 교수)·백철(문학평론가)·이성근(每新사장)·황신덕(여성교육자)은 6, 신태악(변호사)·김동원(평양상공회의소 회주)·박상준(귀족원 의원)·허하백(여성계 인사)·정인섭(교육자) 등은 5의 숫자가 매겨져 있다.
5 이상의 비교적 높은 숫자가 매겨진 인물들은 대부분 잘 알려진 친일파들이다. 

[조지훈 시인 약력]

 조지훈(趙芝薰 1920-1968) 시인. 본명 동탁(東卓). 경북 영양(英陽) 출생.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혜화전문(惠化專門)을 졸업하였다.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1940년 “봉황수(鳳凰愁)”로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박두진(朴斗鎭)·박목월(朴木月)과 함께 46년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 불리게 되었다. 
1952년에 시집 <풀잎 단장(斷章)>, 1956년 <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을 간행했으나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어 민권수호국민총연맹, 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시집 <역사(歷史) 앞에서>와 유명한 <지조론(志操論)>은 이 무렵에 쓰인 것들이다. 
62년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 <신라가요연구논고(新羅歌謠硏究論考)>,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 등의 논저를 남겼으나 그 방대한 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詩碑)가 있다.

[ 結  語 ]
마무리 합니다.

조지훈 시인의 지조론의 교훈은 
"선비(교육자,문인,소설가,시인,언론인)인 척 하면서 일신의 영달(부귀영화,권세)을 위해 창녀같이 살아가고 결국 지식을 팔아먹고, 민족과 국가를 반역한 변절자들은 인간말종이다"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이런 친일매국노들은 일제 초기의 중립주의자, 민족주의자,독립투사의 길을 걸었다고 언필칭 변명하곤 합니다.

친일행위자 중에 이당 김은호(화가), 운보 김기창(화가), 김경승(조각가), 김성수(동아일보 창업자), 방응모(조선일보 창업자) 등은 처벌도 회피하고 반성도 않은 자들이고,
단지 육당 최남선(문인)은 해방 후 반민족행위, 친일행적을 철저하게 사죄하였을 뿐입니다.

후에 김활란의 측근자였던 김옥길의 {김활란 박사 소묘}에서는 그가 1944년경 악성안질에 걸려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조선 남아들을 징용에 자원입대하라고 연설하고 다닌 사실을 말함),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당연한 형벌이다"라고 말하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위는 역사적 사실이며 변명꺼리가 없는 엄연한 반민족 친일매국행위자의 기록입니다.
교육자로서 일평생 살았어도 후반에 학교운영공금 횡령하였으면 '횡령전과자'로 기록되는 것이고, 교육자로 일평생 살았어도 후반에 여제자를 성추행하였으면 '성추행전과자'로 기록되는 것입니다. 무슨 미사여구가 필요합니까?
나찌 3년 치하에 친나찌 비시정권과 나찌에 협력했던 프랑스국민은 수천명, 수만명이 숙청 처형되었지요. 친나찌 매국노를 처단했다고 그 어느 누구가 프랑스를 욕합니까. 
해방 후 드골은 이렇게 천명했습니다. "이후 프랑스 역사에 결단코 매국노는 없다. 프랑스가 다시 외국에 식민지가 될 지언정, 결코 매국노는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의 다양성은 존중하여야 하나, 역사적 사실이 엄연한데, 糊塗(풀을 바른다는 뜻으로, ①성정()이 흐리터분함 ②근본적()인 조처()를 하지 않고 일시적()으로 얼버무려 넘김. 어물쩍하게 넘겨 버림)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겐 미래란 없다!!라고 피를 토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삶의 길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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