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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보어 인의 '보어 전쟁(Boer War)'
게시물ID : history_54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보어
추천 : 12
조회수 : 138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8/18 19:00:53

1899~1902년 영국과 트란스발공화국이 벌인 전쟁.



(출처: <a target="_blank" class="con_link" href="http://freepages.genealogy.rootsweb.ancestry.com/~niloc/vanVuren/BoerWar.html" >http://freepages.genealogy.rootsweb.ancestry.com/~niloc/vanVuren/BoerWar.html</A>)


1880년 이후 몇 유럽나라들은 더 많은 아프리카의 땅을 차지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는 벌써 100백여 년 전부터 유럽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사는 유럽 사람들은 '보어 인(Boers)' 이라고 불리며 케이프 타운(Cape Town)으로 불리우는 네덜란드 무역항에서 일했던 네덜란드 사람들의 후손이었다.

이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곳에 눌러앉아 농사를 짓다가 나중에는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

라는 이름의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후로 100년 후, 영국이 그 케이프 식민지를 보어 인들로 부터 빼앗어 버리고 케이프 식민지는 대영 제국의 영토가 되어 대영 제국의 법으로 다스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법들 중 한가지가 보어 인들에게 불만을 사게 되었다.

그 법은, 케이프 식민지의 모든 노예가 자유인이 되었고 자유의 몸이 된 아프리카 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 이었다.


그때의대부분의 보어 인들은 아프리카 인은 백인의 노예로써 한평생을 살다가 죽는 게 신의 뜻이 라고믿었었다. 그리하여 보어 인들은 빼앗긴 케이프 타운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오렌지 자유 주(Orange Free State)' '트란스발(Transvaal)'이라는 이름의 식민지를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그들을 '아프리카너(Afrikaners)'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은 네덜란드 인이 아닌 유럽혈통의 아프리카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지도에서 노란색이 오렌지 자유 주, 트란스발은 민트색)


대영 제국은 다른 일로 바빴는지 네덜란드 후손들이 북쪽에서 식민지를 만들든 안 만들든관심을 갖지 않고 오렌지 자유 주 와 트란스발을 남아프리카의 두 독립국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렌지 강(Orange River)' 에서 양 떼를 몰던한 소년이강가를이리저리 돌아다녔다.소년은 강가에서 돌아다니다가 특별히 눈에 띄는 돌멩이 한 개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는 부모에게 보여주었다. 부모는 또 그 돌을 이웃에게 보여주었고 그 이웃들중에 그 돌을 갖고 싶다고 하자 그 부모는 그 돌멩이를 이웃에게 주었다.

(지도에서 파란글씨가 강이름인데요. '오렌지 자유 주' 왼쪽 아래에 보면또Orange라고 적혀있는데 아마 그 쪽이 다이아 몬드가 발견되된 지역 같습니다.)


그런데 그 돌멩이가 바로 '다이아몬드(Diamond)' 였다.

오렌지 강가에 광산업자들이 몰려 들었다.그곳에는다이아몬드가 모래 속에 드문드문 박혀 있고,

자갈틈에 끼어 있었다. 니콜라스 드비어와 디에데릭 드비어 라는 이름의 형제의 농장에 우연히 다이아 몬드가 발견 되었다. 그 형제는 포트· 엘리자베트 회사에 농장을 매각하였다. 매각한 가격은 이 형제는 그 농장을 50폰드 에 구입하였는데 126배인 6300폰드에 매각하였다.이 회사는 '빅홀' 이라는 거대한 광산을만들었다.그러나 그 형제는 광산 이름을 '드비어스(De Beers) 연합 광산'으로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회사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 회사는 아직도 현재 세계의 다이아몬드의 70~80%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빅홀은 박물관이 되어있다.


그런데 다이아 몬드가 발견된 땅은 보어 인이 만든 두 개의 식민지와 영궁이 지배한느 케이프 식민지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그 전까지 영국, 보어 인 누구도 그 땅을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었는데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마자 영국인들과 트란스발 공화국 사람들은 1881~841차 보어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다이아몬드가 지천에 깔려있는 땅이 발견되고 얼마 후인 1886, 보어 인의 땅인 트란스발에서 광부들이 엄청난 금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금을 다 파낼 만큼 의 돈은 트란스발 사람들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트란스발 정부가 영국과 거래를 했다. 영국의 광산업자들이 트란스발에 들어가 금을 캐내고 일부를 트란스발이 가진다는 것이었다. 이 거래가 성사되고 4년 후에, 케이프 식민지의 영국 총독 세실 로즈는 영국 관리들을 오렌지 자유 주와 트란스발의 북쪽으로 보내어그의 이름을따서 '로디지아' 라고 불렀다.



(출처:<a target="_blank" class="con_link" href="http://www.sangam.org/2007/03/Boer.php?uid=2257" >)


이제 오렌지 자유 주와 트란스발은 영국의 세력권 사이에 끼게 되었다.

사실, 그 이전부터 영국인 사업가들이 트란스발에 설치고 다니면서 금을 캐내고 보어 인의 정치에 간섭할 일이 있으면 간섭을 했다.


트란스발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오렌지 자유 주와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양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188910, '2차 보어 전쟁(Boer War)' 이 발발하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이틀째에 아프리카너 병사들이 마페킹이란 작은 도시를 포위했다.

(맨 윗사진에 트란스발 지역 왼쪽에 Mafeking 이라고 적혀있음.)

마페킹은 영국 영토인 케이프 식민지의 철도 거점 도시인데, 트란스발에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마페킹의 영국군 사령관 로버트베이든 포웰은 갑작스런 공격을 받아 당황했다.



마페킹의 영국군 사령관 로버트 베이든 포웰(Robert Baden-Powell)

1857~ 1941

(출처: <a target="_blank" class="con_link" href="http://www.britishempire.co.uk/forces/armyunits/britishcavalry/13thhussarsbadenpowell.htm" >http://www.britishempire.co.uk/forces/armyunits/britishcavalry/13thhussarsbadenpowell.htm</A>)


로버트 베이든 포웰 에게는 고작 1천 명의 병사뿐이 었다. 그러나 그는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깊은 참호를 파고, 성벽에는 흙을 덮으라고 했다. 그리고 참호 안에 가짜 요새를 세우게 했다. 아프리카너 병사들이 그 가짜 요새를 보고 사격을 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는 또 병사들을함석으로 만든 메가폰을 들고 적진에 다가가서 잠을 못자게 하라고 시켰다.

그리고 그는 또 도시의 어린 소년들을 모아서 전령을 시키거나 부대의잔심부름을 시켰다.

'소년 단원' 들이 바로 지금의 '보이 스카우트(Boy Scout)'의 시초였다.

(메가폰: 사람의 목소리가 보다 멀리까지 전달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계이다.)


그러나 마페킹 이외의 다른 곳에서도 영국군에게 불리하고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첫 싸움이 시작된지두 달이 지난 12월에 영국군은 세 차례의 대규 전투에서 형편없이 졌다.

마페킹이 포위된 지도 217일 이나 지났다. 양쪽은 너무 지루해서 어느 때부터는 일요일에는 전투를 하지 않고 서로 고래고래 고함도 지르지 않기로 약속했다.전쟁은 끝나지 않을거 같았지만,19006월 영국군은 트란스발에 침입, 점령하고 9월 트란스발공화국의 영국병합을 선언하였다. 오렌지자유국도 전쟁이 개시되자 트란스발 측에 가담하여 참전하였으나, 2월 영국군은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5월에 오렌지자유국의 영국병합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수많은 영국 사람들이 그들의 정부를 수치스럽게 여길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일을 저질러 버렸다. 그것은 아프리카너 군대와 영국군 사이의 공식적인 전쟁은 끝났지만, 아프리카너 병사들은 아직 곳곳에서 작은 무리를 지어서 영국군의주둔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의 게릴라 공격은 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에영국군은인구 50만 명에 총동원 병력 약 7만 보어인을 정복하기 위하여, 45만 군인을 동원하여 보어인의 전답·가옥을 불사르고, 21만의 비전투원을 강제적으로 집단수용소에 집어 넣었다.

백인만 가둔 집단 수용소는 66곳이나 되었고, 흑인만 가둔 곳이 50곳이나 되었다.

흑인은 더욱 가혹한 대접을 받았다. 흑인 한 명이 먹는 하루의 값이 고작 1페니(지금 우리나라 돈으로는 20) 도 못되었다고 한다. 홍역, 닭 천연두, 결핵 같은 질병이 수용소를 휩쓸어 수천 명이 죽어 나갔다. 2만 명의 백인 아프리카너들이 수용소에서 죽었고, 흑인 사망자 수는 4만 명정도 였는데, 당시 영국 사람들은 흑인이 죽어 나가는 데는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기에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1902년에 마침내 보어 인들은 항복을 하고 아프리카너들과 영국인들이 '베레니깅 평화 조약(Peace of Vereeniging)' 이라는 조약을 맺었다.


남아프리카의 모든 식민지들을 하나로 묶어서 영국의지배를 받는 '남아프리카 연방(Union of South Afrika)'라는 나라를 만든다는 '평화 조약' 이었다.


원글 - 알렉세이님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kathakd541&logNo=40059327724&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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