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예전 명칭 한국과학기술원.
수능보다 수시로 들어온 사람이 더 많아 수능보고 온 사람을 신기해하는 학교.
과학고 출신이 90%에 육박해,
다른 애들 자기들 출신 과고끼리 모일때, 일반고는 전국의 모든 일반고 출신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
국가 비밀기관이랍시고 배달 차량이 학교 안에 못들어와서,
쪽문이나 아파트단지쪽 담장 너머로 돈과 야식을 주고 받는 학교.
적어도 내가 입학할 당시의 카이스트는 그런 학교였다.
내가 그냥 대학생이 아니라는 기분이 저절로 드는 학교. 무언가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 같은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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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간의 방황을 끝내고 돌아와, 축제 따위는 신경도 쓸 수 없는 냄새나는 복학생이 되어 있다 보니, 축제 관련 소식을 한 박자 늦게 알았다.
하하.
이게 무슨 개소린가.
축제마다 왔던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는 항상 나중에 슬럼프를 겪는다 해서 우리끼리 '카이스트의 저주' 랍시고 낄낄대던 것이
원더걸스가 왔을때 '(아이러니) 말도안돼' 를 징그러운 남정네들의 목소리로 외쳐대던 것이
포카칩? 아니죠~ 카포칩? 맞습니다~ 포카리스웨트? 아니죠~ 카포리스웨트? 맞습니다~ 라는 지나가던 오리연못의 거위들도 코웃음칠 개그를 아무렇지 않게 카포전때 하고 다니던 것이
불과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전부 의미 없는 낄낄거림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 의논했고, 덕분에 그 의미없는 낄낄거림 속에는 누군가를 해하는 소리 따윈 전혀 녹아 있지 않았었다.
적어도 내게 있어 축제는 그런 의미였다. 어김없이 과제와 퀴즈는 있고 휴강 따위는 없지만, 그래도 그냥 노는 기간. 그래도 개념있게 노는 기간.
근데 이게 무슨 개소린가.
단순 무개념 발언이 아닌, 민주주의의 근간을 부정하는 발언을 한 가수에게 누가 '괜찮다'고 소리쳐줄 수 있단 말인가.
그 발언을 한 가수가 그 발언을 알고 했다면, 더더욱 용서할 수 없거니와,
그 발언을 한 가수가 그 발언을 모르고 한 것이라면, 자기들보다 나이가 많은 누나인 가수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응당 알아야 할 것 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분개했어야 하였다.
가수 한 명을 무작정 거부하는 것 때문에 축제의 흥이 깨지는 것은 물론 옳지 않다.
하지만 축제의 흥을 위해 전 국민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말을 한 가수를 우리가 '괜찮다'고 용서하는 것은 더더욱 옳지 않다.
후배들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괜찮아'를 연호한 것인가?
어떤 의미의 '괜찮아' 인가? 5.18 민주화 항쟁 유가족을 비롯한 국민 다수의 분노 따위, 우리 축제의 흥겨움을 위해선 무시되어도 '괜찮아' 라는 얘기인가?
단언컨대,
그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줄 자격이 있는 사람은 너희들, 나를 포함 카이스트 구성원 중 단 한 명도 없다.
그들 개인적인 문제거나 카이스트 구성원에게 한 잘못이라면 우리는 괜찮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경우처럼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그들이 그들의 발언을 잊고 아무렇지 않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도 '괜찮다'고 용서해 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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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 직후 아버지께 자주 듣던 잔소리가 생각난다.
'아버지로선 너 자신을 위해 공부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국민으로선 국민의 세금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것 또한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나 또한 생각하지만,
적어도 이런 말이 통할때의 그, 카이스트라는 네 글자가 주는 무게감과 책임감 만큼은 조금.. 유지해도 괜찮지 않나.
한시간 뒤 9시 수업이고, 잠은 덜 잤는데,
기분은 존나 더럽고, 씁쓸하고, 송구하다.
시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