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0년간 미뤄왔던 쌀시장 개방을 18일 공식 선언키로 한 것은 '의무수입물량(MMA)'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쌀시장 개방을 미루는 것에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쌀시장 개방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농민을 설득하려는 노력은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17일 국회 예산결산특위 결산 심사에서 "관세화를 유예하면서 20년간 최소시장접근 방식에 따른 의무수입물량을 도입했는데 그 양이 더는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졌다"면서 "그래서 높은 관세를 부과해 쌀을 지키자는 데 취지가 있다"고 밝혔다.
농민과 농민단체 회원들이 17일 저녁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18일로 예정된 정부의 '쌀시장 전면 개방 발표' 철회를 요구하며 노숙 농성을 벌이고 있다. 정지윤 기자
세계무역기구(WTO)는 한국·일본 등 쌀시장 개방을 유예한 국가들에 일정 물량의 외국쌀을 의무 수입하도록 했다. 이들 국가가 자국의 쌀시장 개방을 막았으니 미국 등 쌀 수출국의 최소한의 요구 사항은 들어줘야 한다는 논리였다. 1995년 5만1000t으로 시작한 의무수입물량은 매년 늘어 올해 40만9000t까지 늘었다. 국내 쌀 소비량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의무수입물량은 매년 늘어나다보니 국내 부담이 커졌다.
의무수입물량 부담에도 한국은 2004년 한 차례 더 시장 개방을 유예했다. 당시 국산 쌀은 미국·중국산 쌀보다 가격이 4~5배 높았기 때문에 시장을 개방해도 경쟁력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2004년 쌀 재협상 결과 한국은 가공용으로만 사용되던 의무수입물량의 일정 부분을 밥쌀용으로 확대했다. 밥쌀용 수입쌀의 판매를 위해 국산 쌀과의 혼합미도 허용했다.
정부는 '10년 전과는 판세가 많이 달라졌다'는 입장이다. 국제 쌀가격이 오르고 국내 벼농사에도 기계화·대규모화가 진행되는 등 경쟁력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국산 쌀은 2011년 이후 ㎏당 1900~2100원으로 묶여 있다. 반면 미국·중국산 쌀은 10년 전보다 2배 이상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국산 쌀은 미국·중국산 쌀보다 2.1~2.8배 비싸다. 지난해 기준 국산 쌀 20㎏ 도매가격은 4만3780원으로 미국산 중립종 쌀보다 2만7960원, 중국산 단립종 쌀보다 2만2480원 비싸다.
농식품부는 높은 관세율을 매기면 국내 쌀산업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날 이동필 장관도 "(수입쌀에) 높은 관세를 부과해 (국산) 쌀을 지키자는 데 취지가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관세율이 300%라면 미국산은 20㎏에 6만3280원, 중국산은 8만2200원으로 높아진다. 고율관세를 유지할 경우 국산 쌀은 가격경쟁력이 높다.
문제는 고율관세가 한시적이라는 데 있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후속인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타결돼 한국이 개발도상국 지위를 잃으면 관세율을 낮춰야 한다. 현재 DDA 협상은 개도국은 현행 관세율을 유지하고 선진국은 23~46% 낮추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쌀시장이 개방되면 자유무역협정(FTA)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에서 쌀 관세 하향·폐지 압력을 받게 된다. 쌀시장을 개방한 일본은 TPP 참여 과정에서 쌀 관세를 대폭 낮추라는 미국의 압력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농업계에서는 관세화 시 관세를 얼마나 높게 가져갈지, 추후 시장 개방에서 쌀 관세 폐지 압력을 어떻게 막아낼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쌀시장 개방을 부분적으로 찬성하는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나 쌀시장 개방을 반대하는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양대 농민단체들은 그동안 고율관세 유지 약속, 쌀 대책 등을 내놓으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 요구 사항을 모두 거절했다. 'WTO 통보 전 고율관세 공개'에 대해서는 쌀 수출국과의 협상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며 거부했다. WTO에 시장 개방을 통보하기 전 국회의 사전 동의를 받으라는 야당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쌀시장 개방 결정 전 '농민-정부-국회'의 3자 협의체를 구성하자는 제안도 거절했다. 결국 쌀농사를 짓는 300만 농민의 이해관계가 걸린 쌀시장 개방 문제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해 밀어붙였고, 향후 이에 관한 책임도 정부가 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