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열강들은 신무기인 영국제 총으로 아프리카 흑인들을 앞다투어 포획하여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아 넘겼다.
위 서술은 모 출판사 역사부도의 한 대목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아주 잘못된 설명이기도 하지요. 한번 볼까요?
일 단,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흑인들이 강제로 끌려가 백인들의 노예가 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주된 수단이 영국제 총 - 일단 이것부터 말이 안 되죠? 프랑스제, 독일제 총도 사람 죽습니다 - , 즉 무력을 동원한 거라는 주장에는 어폐가 있죠. 왜냐 하면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얻기 위해 사용한 주요 수단은 그 초기부터 무력을 통한 납치보다는 상거래였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한번 이야기해 볼께요.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사고팔기 시작한 행위의 시초를 따지자면 로마 시대 이전으로 올라가지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유럽인들의 노예무역은 15세기 이후에 시작됩니다. 그 이전까지, 유럽이 흑인 노예를 입수하는 경로는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이나 이슬람의 아랍인 노예상인을 통해서였지요. 이 시기까지는 흑인이 유럽에서 무척 희귀한 존재였기 때문에 노예로 팔리더라도 그 값이 매우 비쌌고, 당연히 노동을 시키는 존재라기보다는 주인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이국적인 사치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흑인 노예의 이런 희소성은 포르투갈인들이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흑인들이 사는 곳으로 직접 내려가는 항로를 개척하면서 사라지게 되었지요.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리케(1394.3.4~1460.11.13). "인도 가는 중간에 경비 정도는 벌어야지!"
(사진출처 :
여기)
십 자군 정신과 동방의 부에 대한 욕망으로 무장한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리케는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찾고자 끊임없이 탐험대를 내보냈고, 이들은 결국 아프리카가 넘어갈 수 있는 대륙임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1495년에는 드디어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가 서구인 중에서는 최초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지요. 하지만 바스코 다 가마가 성공할 때까지, 그 긴 시간 동안 포르투갈이 인도에 도착하는 것 하나에만 목을 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도로 가는 항로는 아프리카 해안을 지나갔고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 원주민들과의 접촉은 필연이었습니다. 원주민인 흑인들은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가치를 가진 보물, 즉 황금-상아-후추, 그리고 노예를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 눈을 뜬 포르투갈인들은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는 한편으로 발빠르게 서아프리카 기니만 연안에 사는 원주민들과 물물교환 형태의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곧 포르투갈인 뿐 아니라 다른 유럽인들도 이 무역에 뛰어들었고 이런 귀중한 무역품들을 실어내는 해안은 곧 그 물건에서 딴 지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지도에도 남아 있는 상아 해안(ivory coast), 황금 해안(gold coast), 노예 해안(slave coast), 후추 해안(pepper coast)등이 바로 그것이죠. 이중에서도 노예무역을 처음 시작한 포르투갈인들로, 1441년에 현재의 서사하라에 해당하는 리오 데 오로 지역에서 포르투갈 배가 노예를 싣고 온 것이 최초의 기록입니다. 노예 무역이 큰 이익을 낳자 이후로는 포르투갈인 뿐 아니라 에스파냐인, 독일인, 영국인,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등등 수많은 유럽인들이 뛰어들면서 그 규모는 점점 커지게 되지요. 그리고 그 대상지역도 사하라 일대에서 인구밀도가 높은 기니만 연안으로 옮겨갑니다.
저기가 리오 데 오로(Río de Oro, 옛 이름은 Río de Ouro. 영어로는 Gold river(황금의 강))입니다.
(사진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File:Saharaoccidentales.svg)자, 이 유럽인들의 노예 무역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위 역사부도의 서술이 사실이라면, 여러분은 최신식 총으로 무장한 백인들이 평화로운 흑인 마을에 쳐들어가 사람들을 마구 붙잡아서는 끌고갔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실제 백인들은 그렇게 노예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위 문장에 나온 것처럼 자신들이 직접 흑인들을 잡는 대신, 다른 흑인들로부터 노예를 사들였죠.
흑인에게 흑인을 산다? 얼른 납득이 안 가실 수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여러분이 처음 가는 동네에서 목적지를 찾아야 할 때, 지도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하는 게 효과적일까요? 직접 찾아 헤메는 것과 동네 사람 붙잡고 길을 물어보는 것 중에서?
노예를 얻는 것이 길 찾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신다면 다시 이렇게 생각을 해 보죠. 여러분은 상인입니다. 먼 나라에 그 나라에서 나는 특산물(예 : 희귀한 보석)을 사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는 빽빽한 정글과 높은 산, 깊은 골짜기가 널려있고 사람을 잡아먹는 사나운 맹수, 난폭한 원주민, 무서운 질병 등도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떡하시겠습니까? 직접 보석을 찾아 숲과 산을 헤메시겠습니까, 아니면 바닷가에 머물러서 타고 온 배에 편하게 있으면서 원주민 상인들이 가져오는 보석을 사겠습니까? 원주민 상인들이 비싼 값을 불러도 그건 문제가 안 됩니다. 고향에 그 보석을 가져가면 원주민들이 부른 값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값으로 팔 수가 있거든요.그런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보석을 구하러 다닐 필요가 있을까요?^^
자, 예로 든 위 예화에서 보석을 인간으로 치환해 봅시다. 상품이 된 인간, 즉 노예를 가장 잘 구할 수 있는 것은 멀고 먼 외지에서 온 백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지역에 원래부터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죠. 옛날 로마인들은 인접 지역의 야만인들에게 직접 쳐들어가서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만들었지만, 아프리카에 온 유럽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적어도 자기가 살고 있는 땅 바로 옆 동네로 쳐들어갔지만 아프리카는 유럽에서 너무 멀었거든요. 비용 때문에라도 유럽에서 아프리카까지 노예사냥을 위한 대규모 원정대 따위는 보낼 수 없었고, 소수의 백인들이 함부로 노예사냥 같은 것에 나섰다가는 도리어 압도적으로 수가 많은 흑인들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프리카의 풍토는 유럽과 너무 달라서 백인들은 툭하면 말라리아나 황열병, 수면병, 뎅기열 같은 열대병에 걸려 죽기 일쑤였지요.
때문에 유럽인들은 대부분의 노예를 직접 잡는 것이 아니라
흑인들에게 사들였습 니다. 흑인들에게는 서로를 노예로 삼고 사거나 파는 관행이 옛날부터 있었고, 예로부터의 이런 습관에 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백인들에게 노예를 팔았거든요. 따라서 백인들은 위 역사부도의 설명에 나온 것처럼 흑인을 "총으로 포획"할 필요 자체가 거의 없었습니다. 19세기에 서구 사회가 공식적으로 노예 제도를 폐지할 때까지 노예의 주된 공급원은 아프리카인 스스로였습니다.
여 기까지 오면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어떻게 같은 흑인들끼리 서로를 노예로 사고 팔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 팔 수 있느냐고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어때요? 흑인들이 서로를 노예로 삼고 외국에 팔기도 하던 이 시기에 지구의 다른 지역에서는 어떻게 했을까요?
흑인을 노예로 한 유럽의 백인들도 서로를 노예로 삼았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고대의 그리스, 로마인들은 물론이고 중세까지도 유럽인들은 같은 백인을 노예로 삼곤 했었지요. 대부분의 노예는 전쟁포로나 범죄자,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 또는 노예의 자손이었습니다만 아예 노예사냥을 위해 주변의 야만족들과 전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백인이 백인을 노예로 삼는 것은 같은 크리스트교 신자를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크리스트교가 보급되면서 분명히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트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를 노예로 삼는 행위는 여전히 합법이었지요. 그래서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인 동유럽의 슬라브족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서유럽인들에게 노예사냥의 대상이었습니다. 노예라는 의미의 영어단어 slave 자체가 슬라브(slav)에서 온 것이거든요.
심지어 제노바나 베네치아, 마르세유 같은 상업도시의 일부 악덕 상인들은 같은 크리스트교도인 서유럽인들도 북아프리카나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에게 노예로 팔곤 했습니다. 전쟁포로를 노예로 팔다가 적발당해서 교황에게 파문당한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도 있고, 심지어는 전쟁포로도 아니고 십자군에 참가한 어린 소년들을 속여서 노예로 팔아넘긴 일도 있습니다. 유명한 1212년의 소년 십자군의 일부가 바로 그 비극의 주인공으로, 라인란트 지방에서 출발한 이들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해 주었듯이 바다 가운데 길을 열어 자기들을 성지까지 가게 해 주리라고 기대하면서 제노바를 거쳐 남프랑스의 마르세유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당연하게 바다는 열리지 않았고, 두 명의 마르세유 상인들이 '성지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이 소년들을 속여서는 알렉산드리아까지 데려가서 그곳에서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하지만 이 이야기도 변형 버전이 무척 많아서 노예로 팔린 숫자도 확실하지 않을 뿐더러, 마르세유에 도착한 이들이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 소년들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연구자에 따라서는 "소년"이라는 사실 자체에 의문을 표하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그냥 가난뱅이 떠돌이들이었다는 거죠).
유럽만 그랬을까요? 우리나라의 역사도 봅시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아마 학교에서 국사시간에 갑오개혁에 대해 배운 적이 있으실 겁니다. 1894년에 시행된 이 갑오개혁에서 신분제도가 폐지되면서 비로소 우리나라에서도 노비제도, 즉 노예제도가 사라집니다. 우리나라에서 노비가 되었던 사람들은 이민족이었을까요? 천만에요. 조선시대 노비는 양반이나 상민과 똑같은 한국인, 우리 민족이었습니다. 그저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났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벌로 노비가 된 사람들이었지요. 그리고 조선시대의 노비 역시 매매가 가능했습니다. 즉,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서로를 노예로 하고 서로 사고 팔았던 것이 그 시대의 세계적인 상식으로는 크게 비난받을 일도 아니었다는 거죠.
또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흑인"은 하나의 단일 민족일까요?
천 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쉽게 생각해서 "흑인"으로 뭉뚱그려 말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백인"이 게르만-라틴-슬라브로 크게 나뉘고 그 밑에서 또 수많은 민족으로 나뉘듯이, 또 "황인"이 한국인-중국인-일본인으로 나뉘고 서로를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지 않듯이, 아프리카의 흑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 백인이 오기 전에도 아프리카에는 원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수많은 나라들이 있었고, 이들은 서로서로 싸우기도 하고 화친하기도 하면서 교류를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공격하여 그 땅을 빼앗거나 사로잡은 주민을 노예로 만들거나 하고 있었죠. 그와 같이, 서로 노예를 주고받던 것과 같은 관념으로 백인에게 노예를 팔았던 겁니다.
물론 백인 상인들이 개입하면서 더 많은 노예가 잡혀간 것은 사실입니다. 애초에 아프리카인들끼리의 다툼에서 생기는 노예는 다툼의 부산물로서의 성격이 강했지, 노예 그 자체를 잡기 위해서 전쟁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백인들이 노예 거래에 끼어들고, 더 많은 노예를 요구하면서 노예 거래는 점점 팽창하여 아프리카의 수많은 토착사회를 붕괴시켜버릴 정도의 대규모 산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사업에서 백인들이 노예 구입의 대가로 지불한 것은 현금보다는 물건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인들에게 유럽의 화폐는 별 필요가 없고, 자기들이 만들 수 없는 유럽제 공업제품 쪽이 훨씬 가치가 있었거든요. 유럽산의 고급 섬유제품이나 화약무기, 장신구, 럼(rum)이나 진(gin)과 같은 독한 술 등 여러 가지 물건이 교역품으로 쓰였지만 그중에서도 아프리카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물건은 소총과 모조 진주목걸이였습니다. 이런 물건들에 대한 욕망으로 아프리카인들은 얼마 안 가서 순전히 노예를 얻기 위해 서로 전쟁을 벌이게 되었지요. 유럽에서 온 진귀한 물건들을 얻기 위한 최고의 "상품"이 바로 인간, 즉 노예였으니까요.
18세기에 들어서면 아예 연안에 위치한 흑인 왕국들이 유럽에서 수입한 총기로 무장하고 내륙 지방으로 노예사냥을 위한 원정을 나가는 지경에까지 다다릅니다. 자기 나라 사람을 팔 수는 없잖아요? 이런 연안부 국가의 노예사냥이 지속되면서 내륙부의 인구는 격감하고, 서아프리카 연안에 살고 있던 아프리카인들은 노예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습니다. 노예의 국제적인 거래가 완전히 불법화된 1820년대까지도 이 지역에서는 매년 평균 2만 명의 노예가 아프리카인들 스스로의 손에 의해 신대륙으로 "수출"되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 후에도 수십 년에 걸쳐 노예의 밀수는 계속되었습니다.
노 예무역이 어떻게 이루어졌나 하는 것은 위 그림이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포로가 된 흑인 남자들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두 사람이 짝이 되어 나무 형틀에 묶인 채 자신을 붙잡은 흑인 노예상들에게 몽둥이로 구타당하면서 해변으로 걸어갑니다(이 그림에는 나오지 않지만, 여자는 남자만큼 가혹하게 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해변에 있는 성채는 유럽인들의 교역 거점이고, 성채 앞 바다에는 노예선이 떠서 인간 화물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예로 선창이 채워지면 서쪽으로 떠나는 거죠.
노 예들이 잡힌 후의 비인간적인 대우나 노예선의 끔찍한 현실, 아메리카에 도착한 뒤의 삶까지 논의한다면 아마 책 몇 권이 나올 겁니다. 일단 여기에서는 주제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는 일단 막을 내리겠습니다. 노예제를 주제로 한 책은 많으니까, 관심 있으신 분은 참고해 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참고자료 :
라이프 인간 세계사 vol.04 - 信仰時代, 앤 프리맨틀,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78
라이프 인간 세계사 vol.07 - 探險時代, 존 R. 헤일,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78
라이프 인간 세계사 vol.16 - 아프리카, 배질 데이비드슨,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5
리더스 다이제스트 - 원시에서 현대까지 인류생활사, 리더스 다이제스트, 동아출판사, 1995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vol.062 - 흑인노예와 노예상인, 인류 최초의 인종차별, 장 메이에, 시공사, 1998
십자군,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토머스 F 매튼, 루비박스, 2005
히스토리아 문디 vol.02 - 아프리카의 역사, 존 아일리프, 이산, 2002
위키피디아(영) - Children's Crusade
슈타인호프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