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엔하위키에 투고했던 항목을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그쪽 내용이랑 겹치는 부분 많을 겁니다.
1099년에 건국되어 1291년에 멸망한 레반트 지역의 십자군 국가이자 기독교 왕국. 그 유명한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세워진 국가인데 좀 웃긴 것은 비잔티움 제국의 입장에서는 성지탈환 자체는 그냥 떡밥이고, 서유럽의 원병을 타내서 무슬림과 튀르크족들의 압박을 좀 해소해보고자 한건데 진짜로 쳐들어가서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위업을 세웠습니다.
십자군의 성공에는 당시 콩가루가 된 무슬림 세계의 영향도 어느정도 있었습니다. 파티마 왕조는 비실비실거리고 있었고, 셀주크 제국도 국내 문제로 서로 아웅다웅하느라 거의 아작난 상태였고, 다마스커스와 같이 무슬림 내부에서도 이방인들에게 더 우호적인 세력이 있는 상황이라 통일된 지도력 발휘가 안되니 아무래도 성지탈환과 수호를 내세워 뭉친 기독교 군대에게 깨질 수 밖에 없었죠,
당초 비잔티움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와 십자군 사이에는 맹약이 맺어져 있었지만 서유럽에서 온 귀족들은 그 맹약보다는 새로운 영지와 전리품에 더 관심이 많았다보니 결국 점령지에는 십자군 국가들이 난립하게 됩니다. 나중에 알렉시오스 1세가 재건을 마친 제국군을 투입해 소아시아 해안가의 통제권은 확보하긴 했습니다만 결국 십자군 국가들과는 등을 지게 됐습니다.
어쨌든 예루살렘을 탈환한 십자군은 지휘관 고드푸르아의 부용을 예루살렘의 왕으로 추대됐지만 본인은 정작 예수 그리스도만이 예루살렘의 왕이고 자신이 감히 왕을 칭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성묘의 수호자"란 타이틀에 만족합니다. 역사가들의 경우에는 십자군 국가,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왕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실제 예루살렘 왕국이 선포되고 왕이 된 사람은 부용의 동생인 보두앵 1세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가 당시 십자군에서 가장 서열 높은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이후 각지에 선포된 십자군 영지의 종주권자가 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은 외부의 침략들이 세운 국가였고, 기독교들의 성지라고 해도 비잔티움 제국이 레반트 지역을 내준 이후로는 이미 무슬림화가 진행된 곳입니다. 요컨데 해당 지역에서 세력을 계속 유지하려면 싫어도 무슬림들을 아우르는 정책을 펼쳐야 했던 상황입니다. 하지만 유럽 본토에 계시는 교황 성하나 주교들이 그런 꼴을 볼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 딜레마로 인해 예루살렘 왕국과 십자군은 골머리를 썩게 됩니다. 게다가 시리아 같은 곡창지대가 있긴 했어도 이러한 지역을 완전히 점령한 것은 아니었고, 물이 부족하거나 척박한 곳도 제법 끼고 있었기 때문에 성지탈환은 했다고 해도 실제 레반트 지역의 알맹이는 다 못먹은 상태라 자생력도 그리 대단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초기에는 십자군 열풍에 휩싸인 서유럽의 지원이 있었기에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는데 예루살렘 왕국이 수립되고, 여러 기사단의 활약으로 레반트 지역이 어느정도 안정화되자 서유럽에서는 십자군에 대한 열기가 서서히 식어나갑니다. 이는 서유럽의 지원이 줄어드는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게다가 비잔티움 제국과 십자군은 오월동주였고, 맹약 파기 후로는 이미 서로 관계가 악화되어 제국에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일부 혈연관계가 맺어진 제후들을 구제하기 위해 배상금이나 몸값에 필요한 돈을 지운한 적은 있습니다만 십자군 국가를 도와준 적은 없습니다. 예루살렘 왕국이나 십자군 제후들이 굽신거리면서 용서를 구하고, 로마 교황이 아니라 비잔티움 정교회를 따르겠다고 빌어야 겨우 지원해줄까 말까인 상황이었으니...
결국 무슬림의 혼란이 마무리되고 이슬람의 사자 장기가 등장하자 예루살렘 왕국과 십자군은 서서히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144년 십자군 국가중 하나였던 에데사 백국이 장기에게 박살납니다. 이는 서유럽을 깜짝 놀라게 만들어서 2차 십자군 원정이 촉발된 계기가 됐고, 예루살렘 왕국도 다시 서유럽의 지원을 받아 한숨 돌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레반트 지역의 정세를 모르는 서유럽의 왕들이 거하게 삽질을 해주면서 물자와 인력만 날려먹고 실패. 되려 장기의 후계자인 누르 앗 딘(누레딘)이 다마스커스를 제압하는 등 무슬림들에게만 좋은 일을 해주고 말았습니다.
일단 2차 십자군이 실패했어도 그 때 들어온 기사와 인력들 일부가 돌아가지 않고 남아있었기에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는 이들을 활용하여 상황 반전을 노립니다. 당시 파티마 왕조의 경우에는 거의 망해가던 상황이라 이집트 지역을 장악하면 상황반전을 노릴 수 있을 거라 기대한건데 문제는 누르 앗 딘도 이집트의 중요성을 인식한 상태였고, 부장 시르쿠를 파견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행동을 견제합니다. 그리고 시르쿠의 조카 살라흐 앗 딘(살라딘)이 이집트 지역을 장악하게 되고, 게다가 원정을 주도하던 아모리 1세가 사망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의 이집트 원정은 실패. 이후 파티마 왕조가 무너진 자리에는 살라흐 앗 딘이 주도하는 아이유브 왕조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한편 아모리 1세의 후계자는 보두앵 4세였는데 젊고 유능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애석하게도 나병이 발병했습니다. 이로 인해 왕의 권위를 제대로 내세우기가 힘들었고, 십자군 제후들이 따로 노는 사태까지 겹치게 됩니다. 더불어 살라흐 앗 딘 아래 통일된 무슬림은 예루살렘 왕국을 압박하는 상황. 그래도 완전히 망했어요 상태는 아니고 성당기사단이나 구호기사단과 같은 종교 기사단들이 건재했고, 왕국군도 이 때는 그럭저럭 강성했기 때문에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흐 앗 딘을 관광태우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무슬림과 기독교 세력의 휴전이 성사되어 간신히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일단 외부의 위협에서는 한숨 돌렸다고 해도 보두앵 4세의 문둥병으로 인해 내부의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보두앵 4세는 죽고 그 후계로 내세운 보두앵 5세도 1년만에 죽으면서 예루살렘의 시빌라가 여왕이 되고 그의 부군인 기 드 뤼지냥이 예루살렘 왕국의 공동왕이 됩니다. 게다가 주요 기사단장들은 기 드 뤼지냥을 지지하지만 선왕의 섭정이던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 티베리아스는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면서 내전 직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결국 레몽 3세는 기왕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독자노선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이게 나중에 한 건 합니다.
이 무렵 무슬림과 기독교 사이에 임시로 봉합된 상처도 거의 곪아 터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일부 강경파에서는 휴전협정 따위 무시하고 계속 이슬람 상단을 습격하고 있었고, 보두앵 4세 이후 왕권이 많이 약해진 상태라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뭐 애초에 이런 제후들이 가신이라기 보다는 복속된 영주에 가까운 위치라 종주권자라 해도 예루살렘의 왕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점도 있었고요. 어쨌든 이 도발에 대해서 살라흐 앗 딘은 점잖게 사절을 파견하여 처벌을 요구하거나 혹은 직접 병력을 동원하여 응징하려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력충돌의 경우에는 아직 십자군 세력의 힘이 그런대로 남아있어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르노 드 샤티용이 이끄는 십자군 강경파들이 이슬람 상단을 습격하고 살라흐 앗 딘의 혈족들이 살해되자 결국 상처가 터지게 됩니다. 이 때 기의 대립 세력인 레몽 3세는 살라흐 앗 딘과 독자적으로 휴전협정을 맺고, 살라흐 앗 딘의 군대가 레몽 3세의 영지를 지나갈 수 있도록 양해를 구하자 선선히 이를 수락합니다. 근데 이 때 하필 기와 화해를 주선하고자 오던 십자군 기사단 간부들이 무슬림 군대와 마주치고 개털리는 바람에 레몽 3세가 기존 노선을 철회하고 기 앞에서 잘못을 사죄하고 충성을 맹세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로 인해 반대세력을 일소한 기는 마음놓고 무슬림과의 전쟁에 올인할 수 있게 됩니다.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 왕국군과 기사단을 끌어내기 위해 티베리아스를 포위하여 공격하는 척 시간을 끌었고, 여기에 낚인 예루살렘 왕국군이 구원을 위해 출동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군 주력과 십자군 기사단이 전멸합니다. 예루살렘도 함락됐고, 하틴 전투에서 간신히 탈출한여 끝까지 사수한 레몽 3세의 영지 트리폴리와 콘라드의 영지 티레 정도만이 기독교 영역일 정도가 됩니다. 사실 여기서 왕국이 한 번 망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예루살렘의 상실과 왕국이 거의 망할 지경에 놓였다는 소식은 다시 십자군 원정을 촉발시키게 되고, 서유럽 먼치킨 왕들이 모였다는 3차 원정군이 레반트 지역에 들어오게 됩니다. 덕분에 함락됐던 아크레를 탈환하고 팔레스타인 해안 지역을 탈환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거기까지. 애초에 3차 원정군도 지도부간의 분란이 심각했던 터라 예루살렘 탈환까진 성사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시빌리 여왕이 사망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의 왕가 계보도 사실상 끊기게 됩니다.
이후 왕국은 거의 십자군 원정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으로 전락했고 그나마 제6차 십자군 원정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교교섭으로 예루살렘을 사는 기행을 저지르며 잠시 과거 수도를 회복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1244년에는 다시 내줄 수 밖에 없었고,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놓고 분쟁이 잦아서 국가도 제대로 유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나마 탈환했던 땅도 거의 다 상실하고 수도 아크레와 그 주변만 간신히 유지하는 수준. 그리고 1291년 맘루크 왕조의 술탄 칼릴이 아크레를 함락시키면서 왕국도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