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연의에 보면 '몇십만 대군'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죠. 삼국지의 시대적 배경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184년부터 진이 오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 280년까지 약 100여년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약 1800년 전 이야기인데, 그 당시에 이미 몇십만 대군이 흔히 등장한다는 것은 아무리 역대 중국의 인구가 많았다 해도 쉽게 납득하기 힘든 규모죠. 게다가 삼국지 '연의'가 팩션이라는 점도 과장이 들어간 한 요인이 됩니다. 게다가 소설의 특징상 과장이 클수록 재미 역시 부가되기 때문에 연의를 통틀어 과장이 많이 첨가됐죠. 뭐 병력의 규모뿐 아니라 제갈양이 동남풍을 불게 했다던지 등을 말합니다.
삼국지를 통틀어 10만 정도의 규모는 국지전에서도 자주 등장하지만(하후돈과 제갈양의 박망파 전투, 장료와 손권의 합비 전투 등)몇십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전쟁은 크게 3번으로, 이른바 삼국지 3대 대전이라 불리우는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의 3개 전쟁을 뜻합니다. 3번 다 공격측이 70만 이상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지만, 방어측이 거의 몇분의 1에서 심지어 10분의 1 정도의 병력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공격군을 대파했다는 점도 소설의 드라마틱함을 더해 주는 대목입니다. 헌데, 과연 정말로 그 시절에 그만큼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할 수 있었을까요?
일단 병력의 규모를 보기 전에 당시의 인구를 살펴보죠. 병력 자체는 인구수에 걸맞게 정해지니까요. 정사에는 당시 각국의 인구수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의나 기타 삼국지 관련 서적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순서는멸망한 순입니다.
촉(263년 기준) : 1주 28만 호, 군사 8만, 인구 94만 위(263년 기준) : 9주 66만 호, 군사 20만, 인구 443만 오(280년 기준) : 4주 52만 호, 군사 15만, 인구 230만
오는 17년의 차이가 나긴 하지만, 인구수가 대폭 변화할 정도의 큰 차이는 아닌 만큼 동일 선상에서 비교를 해 보겠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의 인구가 770만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당시 중국 인구 추정치에 비해 너무 적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 수치에 대한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게다가 삼국의 호수를 다 합하면 146만 호로 1호당 인구 수가 5.3명에 불과함).실제로 같은 해(280년)에 발행된 서적인 진서지리지에 따르면 통일 직후 진의 인구는 1616만으로 기록됨으로써, 삼국지에 기록된 인구보다 900만 명이나 많습니다. 오차 범위가 너무 커서 둘 다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을 정도죠. 이에 따라 770만이라는 수치가 납세인구만을 따진 것이다, 당시 호적체계가 현대처럼 치밀하지 못하여 기록이 안 된 인구가 엄청나 위와 같은 차이가 난 것이다, 1616만도 치밀하게 등록된 호적은 아닌 만큼 실제인구는 더 많았을 것이다 등 명확한 결론이 없는 상황이죠.
그럼 간단한 정보를 좀 알아볼까요. 삼국지의 기록을 기준으로 촉은 인구대비 군사비율이 8.5%, 위는 4.5%, 오는 6.5%입니다. 과연국력이 제일 약하지만 위를 어쩔 수 없이 상대해야 하는 촉이 가장 병력 비율이 빡빡하네요. 1호당 인구수는 촉이 3.4명, 위가 6.7명, 오가 4.4명입니다. 문제는 인구수와 호의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66만 호에 인구가 443만이나 되는 위가 있는 반면 52만 호로 호수는 별 차이 없는 오의 인구는 겨우 230만입니다. 게다가 촉은 1주에만 28만 호가 있고, 당시 인구가 가장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북 지역을 차지한 위가 1주 평균 호가 7~8만 호밖에 안되는 등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수치죠. 병력 역시 촉은 1주에서 8만명을 징병했는데 위는 1주 평균 병력이 2.2만밖에 안되는 등, 삼국의 군사대비 인구비율은 국력차이를 감안해서 이해하더라도 가족 구조는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위나라의 호수와 병력을 대폭 늘리면 균형이 맞겠습니다만 기록이 저리 되어 있으니 참 답답하군요.
일단 770만을 기준으로 하면 1호당 평균 인구수가 5.3명밖에 안 되는데, 대가족 제도였던 당시를 감안하면 말이 안 되는 수치라 생각하여 진서지리지의 인구를 기준으로 하겠습니다. 770만 명 중 촉의 비중이 12.3%, 위가 57.7%, 오가 30.0%정도(약간의 올림과 내림이 있습니다)됩니다. 그걸 다시 1616만에 적용시키면 촉의 인구는 199만 명(1호당 인구수 7.1명), 위는 932만 명(1호당 인구수 14.1명), 오는 485만 명(1호당 인구수 9.3명)이 되네요. 아직도 1호당 인구수에서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촉과 오가 위에 비해 더 전란에 영향을 많이 받아 1호당 인구수도 줄었을 것으로 생각하여 이는 넘어가겠습니다.
일단 이 수치를 삼국의 인구로 정하고, 다음은 병력입니다. 처음에는 각국의 원래 인구대비 군사비율로 나누려 했는데, 그럼동일한 기준에의 비교가 되지 않으니 삼국의 평균인 6.5%로 계산해보겠습니다. 이리하면 촉의 병력은 13만, 위는 61만, 오는 32만입니다. 또한 촉은 1주에서 13만, 위는 1주에서 6~7만, 오는 1주에서 8만 정도의 병력을 유지할 수가 있군요. 대충 평균인 1주당 8~9만의 병력 유지 비율이 나왔네요. 만약 인구대비 군사비율 5%를 기준으로 계산한다면 촉의 병력은 10만(1주당 10만), 위는 46만(1주당 5만), 오는 24만(1주당 6만)명으로 1주당 평균은 7만 명 정도입니다.이로써 어느 정도의 평균값이 나왔으나, 3대 대전이 일어난 시기는 280년을 기준으로 60~80년 전 이야기인 만큼평균을 조금 줄여'1주당 병력 5만 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임의의 기준'으로 병력 평가를 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굳이 1주당 병력 몇 명이란 것을 계속 들고나오는 이유는, 처음에는 총인구대비 병력 비율로 계산하려다가 당시엔 총인구를 확실하게 계산하여 그것의 몇%를 칼같이 징병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각 주의 자사나 목에게 명령하여 "1개 주에서 (임의의)몇 명을 모집할 수 있으니 너희 주에서는 이번 원정에 몇 명을 동원해라"라고 지시하는 게 당시 기준으로는 더 현실적일 것 같아 위의 기준치를 계산한 것입니다.
완전히 자의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일단 참고 자료가 너무 부족하고 인구수와 호수 비율도 너무 차이가 나며 촉의 인구수는 완전한 측정이 불가능한 만큼 그냥 위의 기준은 너그럽게 이해해주세요(각 주마다 인구수의 차이도 있겠지만 그 역시 정보가 없는 관계로 일단 각 주의 인구는 모두 동일할 것으로 가정했습니다). 먼저 관도대전부터 시작됩니다.
1. 관도대전(서기 200) - 원소군 70만 vs 조조군 7만(연의 기준)
먼저 3대 대전 중 가장 먼저 일어난 관도대전부터 보겠습니다. 연의에서관도대전의 병력 규모는 원소군이 70만, 조조군이 7만으로 병력 차이가 무려 10배에 달합니다. 여기서 일단 7만이라는 조조군의 규모는 딱히 문제삼을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당시 조조가 차지한 영역이 중원의 거의 전부(연주, 예주, 서주의 3개 주와 사예 지역, 회남 등)였기 때문에 영토나 물자, 병력은 충분했을 것이고, 다만 중원에 위치하다 보니 서북지역의 마등, 한중의 장로와 인접한 장안, 수춘과 하비를 중심으로 한 손권과의 국경, 항복한지 오래되지 않은 완의 장수와 그 남쪽의 유표를 모두 경계해야 하다 보니 국경에 방어병력을 많이 주둔해야 했으므로 실제 병력에 비해 대전에 동원한 병력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조군의 병력 7만은 일단 기정 사실화 하죠. 문제는 원소의 병력입니다.
한 가지 확실히 해 두어야 할 사실은, 원소가 70만 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일단 원소가 차지한 하북 영역만 해도 유주, 기주, 병주, 청주의 4개 주였고(조조보다도 1개 주가 더 많았습니다)게다가 그 하북 지역이 당시 가장 중국에서 가장 발전한데다 인구도 가장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물자나 병력이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예를 들어 '1개 주에서 5만 명'씩만 뽑는다 해도 벌써 20만입니다. 좀 더 무리해서 7만씩 뽑아도 28만, 즉 30만에 육박하고요. 게다가 중요한 사실은 3대 대전 중 관도대전은 유일하게 병력 규모가 엄청난 전투가 연이어 발생한 대전이라는 거죠. 적벽대전은 조조가참패한 후 아무런 반격이나 저항을 못한 채 중원으로 쫓겨 갔으며(향후 몇 년간국력회복 때문에 대규모의 병력 운용이 불가능해집니다), 이릉대전 역시 유비가 이릉에서 참패한 후 더 이상 반격을 못한 채 영안으로 퇴각합니다(역시 내부반란인 남만평정전을 제외하면 국력을 회복하느라 몇 년간 병력 운용을 못 하게 되죠). 반면 원소는 관도대전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창정에서 조조와 다시 맞섭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치명적인 패전을 당한 원소는 결국 무너지게 되죠.
이것만 봐도 원소의 세력 규모와 잠재력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위에서 예를 들어 추정한 대로 관도대전 당시 원소의 병력이 20~30만이라고 생각해 보죠. 군량고 오소가 조조군에게 함락된 이후 원소군은 자중지란이 일어나 궤멸적인 타격을 입습니다. 전사자나 실종자, 포로 또는 도망병을 제외하고 기주의 업으로 복귀한 병력이 겨우 1만 명이라고 나온 만큼, 일단 관도대전에서 원소는 20여만명의 병력을 잃은 셈입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닙니다. 참패한 아버지 혹은 친척을 돕기 위해 장남 원담이 청주에서, 차남 원희가 유주에서, 삼남 원상이 기주에서, 친척 고간이 병주에서 병력을 새로 모집하여 업으로 집결합니다. 게다가 관도대전 당시 도망병들 중 많은 수가 원소가 건재함을 알고 다시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원소는 다시 수십만(최소 10만 이상, 약 20만까지도 되었을 것으로 보임)의 병력을 모으지만, 다 아시다시피 정욱의 십면매복계에 넘어가 처절하게 격파당하고 다시 병력의 대부분을 잃습니다. 이 패전을 계기로 원소는 홧병에 걸려 얼마 후 사망하게 되죠.
사실 연의 기준으로는 단서가 너무 적어서 명확한 추정은 불가능하군요. 다만 원소의 세력을 감안했을 때 위에서 언급한 20~30만의 규모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럼 다음으로는 정사를 보겠습니다.
원소는 벌써 공손찬과 군사를 합쳐 사주의 땅을 갖고 십수만 명의 군사도 거느리고서 허도를 공격하려 했다. - 정사 삼국지 위서 무제기
당시 조조의 병사는 만 명이 채 못 됐는데, 부상을 입은 자가 10분의 2 내지 3이나 되었다.- 정사 삼국지 위서 무제기
그는 수십만의 군사를 모아 전풍, 순심, 허유를 참모로 하고 안량과 문추를 장수로 임명하여 통솔하게 했으며, 정예 부대 10만 명과 기병 1만 기를 뽑아 허도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정사 삼국지 위서 원소전
좀 충격적인 내용이로군요. 정사에 따르면 당시 원소의 병력은 최소 11만(그 이상, 즉 수십만까지 가능)명인데 비해 조조의 병력은 고작 1만이랍니다. 원소군의 병력은 제가 추정한 규모보다 작거나 비슷한 정도인데 반해, 조조의 병력 숫자는 말이 안 되죠..-_-;; 이는 배송지도 이의를 제기한 부분입니다. 진수가 쓴 부분에 배송지가 이의를 제기한 부분을 옮기겠습니다.
1. 조조가 세력을 일으켰을 때 5천의 병사를 갖고 있었고, 그후 황건적의 잔당 30만을 항복시키고, 기타 수많은 세력을 병합하였다. 그런데도 겨우 1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적다고 생각된다. 2. 원소는 수십 리에 걸쳐 둔영을 연결하며 군대를 진군시켰는데, 조조가 원소군의 1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전력으로 이에 똑같이 대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3. 원소군이 조조군의 10배였다면 이치상 포위하고 출입을 단절해야 하나, 조조가 별군을 나눠 원소군을 공격할때도 이것이 저지된 일이 없었던 것은 원소의 군사수가 조조를 완전히 압도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4. 원소군이 붕괴한 후 원소군의 병사 8만을 붙잡았다고 하는데, 고작 1만에 불과한 병사로 8만 명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아주 명쾌한 이의제기입니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고 당시 상황에도 맞죠. 자신의 최대의 라이벌 원소와 천하를 놓고 대결하는데 겨우 1만을 동원한다? 게다가 그 20~30%는 부상병이었다? 연의 못지않은 낯뜨거운 허풍으로, 이는 조조를 돋보이게 보이기 위한 과장일 가능성이 명백합니다. '정사' 삼국지라고 왜곡이 없을 수는 없죠. 특히 정사 삼국지는 조조를 정통으로 삼아 오나 촉, 기타 세력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만큼 이런 왜곡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오히려 4번의 항목을 보면 조조군의 병력이 연의에서 언급된 7만보다 더 많을 가능성도 생기는 거죠. 원소군 역시 최소로 언급된 규모는 11만이지만, 십수만 혹은 수십만이란 말이 계속 언급되는 걸 보면 못해도 15만 이상은 충분히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위에서 예를 들은 '1개 주에서 5만 명'과도 얼추 들어맞고요. 관도대전의 병력 규모는 이것으로 결론 내겠습니다.
추정치 결론 : 관도대전의 원소군 약 15~30만(창정전투에서 동원된 잠재병력까지합하면 최대 50만) vs조조군 7~10만
여담으로, 원소가 죽고 원소의 아들 중 원담과 원상이 서로 내분을 일으켜 원담이 조조와 손잡는 등 어리석은 행동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업의 심배, 청주의 원담, 병주의 고간, 남피의 원상 등 원소의 잔당과 벌인 전투마다 몇만 명을 상대해야 했고, 관도대전 이후 화북 전토를 통일하는데 무려 7년(서기 200~207)이나 걸렸습니다. 이것만 봐도 화북의 원소 세력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여실히 보이죠.
2. 적벽대전(서기 208) - 조조군 80만 vs 손권군 3만(연의 기준)
다음은 적벽대전입니다. 적벽대전은 3대 대전 중 가장 유명하죠. 연의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면서 전율이 이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3대 대전 중 가장 비중이 크고 서술 분량도 엄청나게 많으며, 별의별 신묘한 계책과 전략이 발휘되고 무엇보다 차후 위, 촉, 오가 되는 삼국이 한 데 어우러졌다는 점에서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대전입니다. 연의에서 적벽대전의 병력 규모는 조조군이 80만(본대 50만에 새로 얻은 형주 병사 30만), 손권군이 3만이었습니다. 조조군이 손권군의 26배 이상이나 되는, 말 그대로 안드로메다 급의 규모 차이죠. 이것만 봐도 과장이 너무 심한 걸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손권군의 경우, 많은 기록에서 3만이라는 수치가 보이는 데다 딱히 과장할 부분도 없는 만큼 일단 3만은 기정사실화 하겠습니다(다만 연의에서는 수군만 3만인지 수군+육군 합쳐서 3만인지 나오진 않는 탓에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헌데 적벽대전의 조조군 규모는 다른 대전과 달리 서술이 좀 더 상세합니다. 연의에서 제갈양이 손권에게 항전을 독려할 때 말한 조조군의 규모를 볼까요?
"조조가 연주를 손에 넣었을 때 이미 청주 군사가 20여만, 원소를 공격해 50~60만을 얻고, 중원에서 새로 모은 군사가 30~40만, 형주 군사 20~30만을 얻어서 총 병력은 150만에 달합니다. 저는 강동사람들이 놀랄까 봐 백만으로 줄여 에둘러 말한 것입니다."
이는 물론 제갈양이 손권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여 역으로 설득하기 위해 과장한 수치이기 때문에 이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얼마 후 주유가 손권을 결심을 굳히기 위해 조조군 병력 숫자의 허실을 말합니다.
"조조군은 중원 병력이 15~16만이며 오랜 전투에 지쳐 있습니다. 원소의 병력 역시 7~8만에 불과한 데다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습니다. 유표군의 병력은 몇만에 지나지 않는데다 훈련이 안 되어 말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 주유에게 5만의 병사를 내주시면 주공을 위해 적을 완전히 섬멸하겠습니다."
주유는 이 때 조조의 병력을 20~30만 정도로 평가합니다. 관도대전 당시 원소와 비슷하게 추정된 수치네요. 혹여 위에서 예를 든 대로 '1개 주에서 5만 명'을 기준으로 하여 조조가 7개 주를 차지했으니 최소 35만~50만은 되지 않겠나 하지만, 관도대전 시기와 달리 이번엔 상황이 좀 다릅니다. 여기엔 몇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조조가 화북 점령을 마무리한 시점이 207년인데, 적벽대전은 208년으로 화북 영토를 재건하기도 전에 바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무려 7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아무리 비옥한 화북이라도 주민들이 굶주려 조조가 직접 세금을 탕감해주는 상황이 많이 발생하는데, 이런 지역에서 원소가 통치하던 시절처럼 병력을 많이 모으기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당시엔 직업군인 제도가 아니라 농사짓던 젊은이들 중 일부를 징병하던 시절이라, 전쟁이 끝난 지 1년밖에 안 되어 화북의 젊은이들 전부를 농경에 종사시켜도 재건이 빠듯한 시기였던 만큼, 화북에서는 병력을 그다지 많이 모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약 5~10만 정도로 추정해 봅니다.
둘째, 중원지역 역시 마찬가집니다. 비록 이곳은 전화의 영향을 직접 받지는 않았다 하나 7년 동안 계속된 전쟁을 수행한 병력은 모두 중원의 병력이었던 만큼 이 지역도 많은 젊은이들이 징병되고 희생되었을 것입니다. 연이어 전쟁이 계속된 만큼 중원에서도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바로 동원하지는 못했을 것이며, 예전과 마찬가지로 서북지역의 장안이나 손권과 맞보는 수춘, 하비 등을 방어하는 병력은 남아야 하는 만큼 형주 침공에 동원된 중원 병력은 약 15만 정도로 추정됩니다.
셋째, 연의에서는 유표군의 대장 채모가 조조에게 항복할 당시 병력 규모를 보병 15만, 기병 5만, 수군 8만으로 무려 28만이라고 보고하는데(그래서 본대 50만+형주군 30만=80만의 병력이 완성)형주군은 많아야 10만 정도로 추정되며 그보다 더 적었을 수도 있습니다. 형주 1개 주에서 28만 명이나 병력을 모으는 것은 지금까지의 추정과 완전히 상반되며, 혹시 지금까지의 추정이 완전히 잘못되어 1개 주에서 수십만의 병력을 징병하는 것이 가능하다 쳐도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연의의 수치를 믿는다 하면 수군만 해도8만 명에 전투함이 수천 척인데, 예전부터 형주에 있어서 수군에 정통했던 채모와 장윤이라면 이 병력을 가지고도 충분히 오와 싸워볼만 했습니다. 오의 명장 주유도 경계했던 두 명이 아닙니까. 게다가 오와의 첫 교전에서 패배한 채모와 장윤은 훈련량이 부족하다는 변명을 하며 수군의 훈련에 나서는데, 수군만 훈련시킨 것이 아니라수전이 익숙지 않다는 조조의 본대까지 합쳐 전 병력의 해상전을 훈련시킵니다. 이건 납득이 안 되는 것이, 어차피 수전에 익숙한 형주 수군만 훈련시켜도 충분할 텐데(연의 기준으로 8만 명이나 되니)언제 50만이나 되는 조조의 본대를 다 훈련시킨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수군은 해상전에서만 활약해주면 되고 손권의 영토에서 점령전을 벌이는 병력은 육상군일 텐데, 마치 수군이 수십만은 되어야 이길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것입니다. 이를 토대로 추정해보면, 형주 병력(주로 수군)이 단독으로 오를 이길 수는 없을 정도로 숫자가충분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수군은 8만 명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적으며, 형주 병력을 다 합쳐도 몇 만에 불과할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 제 추측입니다. 형주는 오랫동안 전란이 없었으니 인구가 충분할 것을 감안, 형주 병력은 10만 명으로 추정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제 의견으로는 화북의 병력 5~10만, 중원의 병력 15만, 형주 병력 10만을 합쳐서 조조의 병력이 약 30~35만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주유가 평가한 병력 숫자보다는 다소 많지만, 아무래도 당시의 주유는 손권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조조의 병력을 깎아내린 측면도 있는 만큼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게다가 핵심적인 수군의 규모만 따진다면 양군이 비슷하거나 조조군이 약간 우세한 정도로, 단순한 병력 차이는 컸어도 핵심적인 전력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으로는 정사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적벽대전은 정사에서 정통성을 가진 조조가 패배한 전쟁인 만큼 무제기의 기록이 너무 단순하여 참조할부분이 없습니다(역시 역사왜곡된 부분). 상대편인 오서나 촉서에서 참고할 만한 부분이 보입니다.
조조가 그의 수군을 얻어 수병과 보병이 수십만 명이나 되니, 오나라 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두려워했다. - 정사 삼국지 오서 주유전
손권은 매우 기뻐하며 곧장 주유, 정보, 노숙 등 수군 3만 명을 보내 제갈양을 따라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가서 힘을 합쳐 조조에게 맞서도록 했다. -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양전
손권은 주유, 정보 등 수군 수만 명을 보내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와 적벽에서 싸워 크게 깨뜨리고 그 군선을 불태웠다. - 정사 삼국지 촉서 선주전
주유와 정보는 좌우 독이 되어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유비와 함께 진격해 적벽에서 맞부딪쳐 조조 군대를 크게 깨뜨렸다. - 정사 삼국지 오서 오주전
이상의 기록을 보면 손권군의 병력은 일단 수군이 3만이며 육군까지 합하면 최대 5만으로 늘어날 수 있습니다. 반면 조조군의 병력 수는 구체적이진 않지만 대략 수십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희생자 수는 철저히 삭제되어 있는데, 모든 대목에서 "사망자가 많았다", "죽은 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등의 추상적인 말만 있을 뿐 얼마나 전사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역시 조조의 패전을 가리기 위한 의도적인 삭제로 보입니다. 적벽대전의 경우 참고자료가 너무 부족한데다 그나마 있는 자료마저 간략화된 모습이 많아 명확한 추정을 하긴 어렵군요. 적벽대전의 규모는 이것으로 결론짓겠습니다. 그래도 적벽대전이 3대 대전 중에서는 가장 큰 병력차를 뒤집고 승리한 전쟁입니다(수상전이라는 특징이 가장 큰 이유긴 했지만요).
추정치 결론 : 적벽대전의 조조군 약 30~35만 vs손권군 3~5만
3. 이릉대전(서기 221~222) - 유비군 75만 vs 손권군 5만(연의 기준)
마지막으로 이릉대전을 보죠. 연의에서 이릉대전의 병력 규모는 유비가 이끄는 촉한의 병력이 75만이었으며, 육손이 이끄는 오의 병력이 약 5만 정도였습니다. 단순 수치상으로는 무려 15배나 되는 엄청난 병력 차이죠. 그러나 저는 3대 대전 중 이릉대전의 병력 규모 뻥튀기가 제일 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관도대전의 원소와 적벽대전의 조조의 경우, 충분히 대병력을 모집할 여력(영토의 넓이나 인구수 등)이 되었던 반면 이릉대전 당시의 촉한의 세력만 가지고는 75만은 커녕 그 10분의 1인 7만 5천을 모으기도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너무 축소한 게 아니냐구요? 몇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로 유비의 영토와 세력이 너무 작았습니다. 이릉대전은 손권의 형주점령 이후에 벌어졌기 때문에 유비의 당시 영토는 겨우 익주 지역에 불과했습니다. 후한의 14개 주 중에서 딱 1개 주만 영유하고 있었죠. 게다가 익주 전토를 완전히 손에 넣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중전투가 벌어진 것은 219년으로 한중 지역을 점령한 지 겨우 2년만에 이릉대전이 일어난 데다가, 한중은 조조의 장안과 서로 맞보고 있는 최전선으로 그 중요성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병력을 뺄 수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한중은 게임 속에서는 그냥 1개 성에 불과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한 고조 유방이 한중왕이 된 곳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고, 동시에 실제로 인구수나 영토 규모가 촉의 중심지인 성도와 맞먹는 거대한 지역이었습니다. 당시엔 한중을 동천, 한중을 제외한 익주 지역을 서천으로일컬어 둘을 합쳐 양천이라 부를 정도였죠). 또한 건녕을 포함한 남중과 남만 지역은 촉의 중심부와 너무 먼 남쪽에 위치한 데다가, 유비의 지도력이 크게 미치지 못한 지역이라 역시 그 지역에서 병력을 모집하긴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이 지역을다스리던 남만족이나 옹개 등은 유비가 사망하자 바로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유비가 이릉대전을 위한 병력을 모집할 수 있던 영토는 장비가 다스리던 파서(자동 주변), 유비가 머무르던 성도와 강주, 영안 주변에 불과했습니다.
두번째로 정사 삼국지 촉서 장비전의 내용에 중요한 힌트가 있습니다.
"(전략)유비가 오나라를 토벌할 때, 장비는 병사 만 명을 인솔하여 낭중으로부터 나와 강주에서 유비와 만나기로 했다.(후략)"
뭔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겨우 만 명? 물론 만 명이 적은 건 절대 아닙니다만, 지금은 몇십만 명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중이니 그건 덮어두도록 하죠. 파서는 성도와 한중을 잇는 중요한 길목인데다, 농지가 비옥한데다 반면 산세가 험준한 지역도 많아서 검각, 부수관, 가맹관 등의 촉의 중요한 관문이 모두 파서에 위치해 있죠. 그 정도로 방어의 요충지인데다 인구수도 많고 중요성이 엄청나 유장 시절에는 한중의 장로를 막기 위해 유장이 방희를 파견하여 파서를 틀어막게 할 정도였습니다. 헌데 그런 중요한 지역에서 가능한 한 모든 병력을 끌고 가는 상황인데 겨우 1만 명이라...?
여기서 다시 돌이켜봐야 할 것은 이릉대전의 특징입니다. 앞의 관도대전, 적벽대전과 다르게 이릉대전은 천하를 걸고 벌인 전쟁이 아니라, 동생 관우를 위한 사적인 복수를 위한 전쟁입니다. 설마 이릉대전의 주 목적이 형주를 되찾기 위해서라고 주장하시는 분은 없겠죠? 그러한 연유로 원소나 조조와 달리 유비는 이릉대전을 일으키면서 상당한 무리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용할 수 있는 전 병력을 이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원소나 조조는 아시다시피 대전에서 참패했어도 바로 망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만, 유비는 이릉대전 패배 후 거의 촉한이 무너질 정도의 피해를 입었죠. 다행히 기둥인 제갈양이 건재한데다 중요 지역을 수비하던 마초나 조운 등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기에 바로 멸망하진 않았지만요.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아마 유비는 자신이 직접 성도와 강주, 영안 등에서 가능한 한 전 병력을 모집하여 출발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장비가 이끄는 파서의 병력이 합류할 예정이었습니다. 헌데 파서의 병력이 겨우 1만 명이라면, 다른 3곳에서 2만 명씩을 모아도 총합 7만을 겨우 달성하게 됩니다. 또한 이건 위에서 관도대전 이야기를 할 때 언급한 '1개 주에서 5만 명씩 모집'으로만 생각해도 벌써 2만이나 초과하는 수치입니다. 무리해서 더 모았다 해도 10만 명이 한계였을 정도로 추정됩니다.
물론 반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익주와 형주 요 2개 주는 1개 주 치고는 영역이 아주 넓었는데, 그러니 다른 주에 비해 인구수가 훨씬 많지 않았을까 하는 거죠. 형주만 해도 형북과 형남으로 나눠서 부르기도 했고 익주 역시 익주와 남중으로 나누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물리적 영역이 넓다 해도 인구가 많다고 보장해주는 단서가 하나도 없을 뿐더러, 실제로 1개 주의 영역이 작은 화북 지역이나 중원 지역은 당시 중국에서 최고로 발전하였고 인구도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는 사실은 정설입니다. 그래서 관도대전 이후 조조가 화북을 통일했을 때 이미 천하는 통일되었다는 말이 나오는 거죠.또한 당시엔 양쯔 강 남쪽 지역을 오랑캐의 지역 또는 덜 발달된 지역으로 천시했는 만큼, 더더욱 인구수나 물자 면에서 중원 쪽보다 유리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일단 그런 이유로 인구 숫자에 대한 반론은 접어 두도록 하죠.
그럼 정사에서는 어떨까요. 정사 삼국지 오서 육손전에서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유비가 대군을 이끌고 서쪽 변방 지역으로 향해 오자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삼고 가절을 주어 주연, 반장, 송겸, 한당, 서성, 선우단, 손환 등에게 5만 명을 지휘하여 막도록 했다."
여기서는 촉군은 그냥 대군으로, 오군은 5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네요. 오군의 규모는 연의와 비슷한데다, 적벽대전 당시의 오군 규모와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 만큼 이는 사실일 것입니다. 또한 촉군의 규모는 촉군의 패배 기록에서 얼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육손이 군대를 격려하고 지휘하여 사방에서 이곳으로 육박해 오자 유비의 진영은 무너지고 와해되었으며, 죽은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 정사 삼국지 오서 육손전
전쟁터에서 목이 베이거나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 촉나라 병사는 수만 명이나 되었다. - 정사 삼국지 오서 오주전
공통적으로 수만 명을 언급합니다. 이릉대전에 참전했던 촉의 병력 거의 전원이 전사하거나 실종, 포로가 된 만큼 위에서 추측했던 7만이나 10만 정도가 사실적으로 보입니다. 굳이 '대군'이란 단어를 감안한다면 10만으로 생각할 수 있겠죠. 이로써 이릉대전의 규모는 결론짓겠습니다.
추정치 결론 : 이릉대전의 촉한군 약 7~10만 vs 오군 5만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이, 앞선 두 대전에 비해 이릉대전에서는 병력 규모에 큰 차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전 초반엔 오군이 왜 그리 밀렸을까요? 몇 가지 이유를 추정할 수 있는데, 일단 촉군은 유비라는 촉한의 군주가 직접 출전한 반면 오군은 손환이나 한당, 주태 등 총사령관급이 아닌 일개 군단장이 방어를 위해 출진함으로써 지도력과영향력 면에서 부족한 면이 있었습니다(이는 육손이 전 병력을 이끄는 대도독이 되면서 급변합니다). 또한 초반엔 관우의 복수라는 명백한 목적을 내세움으로써 군의 사기 진작과 정당성 홍보에 큰 효과가 있었습니다(당시 촉한, 아니 중국 전토에서 관우라는 이름의 위풍은 상상을 뛰어넘었습니다). 또한 전쟁은 보통 시작하는 측이 한동안 기세를 잡는 법인데, 촉군은 개전 이후 한동안 연승을 거둠으로써 기세가 나날이 불어나 오군이 막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육손은 이를 눈치채고 시간을 끔으로써 촉군의 기세를 내리고 점차 군율을 늘어지게 만든 후 자신의 병법과 지략을 이용하여 승리를 거두게 되죠.
ps. 만약 촉과 오의 외교관계가 잘 이루어져 형주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제갈양의 생각대로 한중과 형주에서 동시에 조조를 정벌하는 촉한의 북벌군이 편성됐다면 그 규모는 어땠을까요? 서촉 지역에서 5~8만 명은 충분히 모였을 것(이릉대전 때와 달리 안정된 시기였음을 생각하여)이며 형주 지역에서도 조조의 남정 시기와 형남 평정전 시기를 제외하고는 전쟁이 10여년 간 없었기 때문에 충분히 발전이 잘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8만 명 정도는 1개 주라도 편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15만 명 정도는 되었을 것이고 약간 더 국력을 기울이면 20만 명은 되었을 테니, 북벌의 가능성은 이 때가 가장 높았을 테죠. 허나 역사엔 if가 없는 만큼 이러한 예상도 단지 상상 속으로만 남겠군요.
4. 결론
이렇게 해서 3대 대전의 병력 규모의 허실을 제 나름대로 추정해 보았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추정치인 만큼(나름대로 참고자료는 찾아 봤지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는 이상 명확한 추측은 불가능하겠죠...^^;;)너무 이 결과에 민감해 하실 분은 없으셨으면 하는 게 제 희망입니다(건전한 토론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그냥 재미로 읽어주세요. 모처럼 연구소 라는 제목에 알맞은 글을 한 번 써 봤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