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렬이 ML에 진출했다면? II편 -선동렬 VS 페드로 마르티네즈- 참고) 1편 : 선동렬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면 (매니아 분석에 오르고 난 뒤 실제로 찬반의 양론이 매우 많았고 매우 많은 리플이 있었습니다. 선동렬의 메이저리그 진출 가정 하의 예상은 항상 뜨거운 감자이며 흥미진진한 이야기인것 같습니다. 이에 필자는 지난번 편에서 다하지 못한 얘기를 좀더 해볼까 합니다. 심한 논쟁도 좋지만 우리의 선수를 다시한번 평가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진정한 팬들이여 이제 두 눈을 바로 뜨고 한국의 한 선수를 바라보자. 이것은 단순히 스포츠에 애국심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위대한 영웅을 버리는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다 지나간 역사에 가정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만 한편 영원한 꿈이기도 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100년이 넘는 역사를 통해 그들의 기록과 팬들의 증언, 각종 통계 기법을 사용해 선수들의 능력을 비교하곤 한다. 그것은 진정으로 누가 제 일인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마련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보유하고 배출하고 있는 최고의 선수들이 모두 정상급의 선수들임을, 그리고 그들이 써내려간 기록들이 진정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시간을 넘나들며 후세에 알리고자 함이다.. 분명 또 한번의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지만 텅빈 관중석을 배경으로 뙤약볕에서 뛰고 있는 우리 야구의 결코 짧지만은 않은 역사 속에 살아있는 신화 한 명을 다시 한번 조명해보려 한다. 페드로 마르티네즈. 외계인, 신이 내린 선물. 야구 선수중 이처럼 극도의 찬사를 듣고 있는 메리저리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 크지도 않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1999-2000년 시절의 불같은 광속구와 현란한 볼무브먼트를 본 팬이라면 전문가와 비전문가층을 가리지 않고 그를 인간의 능력 이상을 가진 자로 평가함을 주저하지 않는다. 혹자는 이런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능력에 우리의 국보 선동렬을 견주는 것 자체를 꺼린다. 어쩌면 그들의 영웅이 시시한(?) 아시아 야구 영웅에 비교되는 것을 용납하기 싫어함일지도 모른다. 필자 역시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초능력(?)에 반했고 지난 몇 년간의 야구 시청은 그를 추적함에 있었다고 할 정도로 그를 좋아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필자는 한국 야구와 메이저리그의 두 영웅을 감히(?) 비교하고자 한다. 분명한 것은 필자는 두 선수 누구 하나 우열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좋아하며 한 선수를 다른 선수보다 못하다고 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한국 야구의 영웅이 그에 걸맞는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야구팬 모두에게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1. 페드로 마르티네즈 180cm./80kg. 기록 수상경력 사이영 상 : 3회 - 1997(NL), 1999~2000(AL) 올스타 선정 : 4회 - 1996~1997(NL), 1998~1999(AL) 올스타전 MVP : 1회 - 1999 주요기록 5년 연속 200이닝/200탈삼진 이상(1996~2000) 역대 ML 단일 시즌 선발 9이닝당 최다 탈삼진 : 13.2개(1999) 역대 ML 단일 시즌 최다 월간 투수 선정 : 4회 - 1999 방어율 1위 : 1997(NL), 1999~2000(AL) 다승 1위 : 1999(ML) 트리플 크라운 : 1회 - 1999 탈삼진 1위 : 2회 - 1999~2000(AL) 1997 17승 8패 241.1 이닝 방어율 1.90(탈삼진 305)피홈런 16 1998 19승 7패 233.2 이닝 방어율 2.89(탈삼진 251)피홈런 26 1999 23승 4패 213.1 이닝 방어율 2.07(탈삼진 313) 2000 18승 6패 방어율 1.74 2001 부상-7승 3패 2002 20승 4패 199.1 이닝, 방어율 2.26(방어율, 탈삼진, 승률 1위, 다승 3위) 2003 14승 4패 186.0 이닝, 방어율 2.22(탈삼진 206) 위에 나열한 기록들은 말 그대로 엽기적인 작품들이다. 그는 지금도 구장의 크기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만든 조정 방어율에서도 메이저리그 역대 1위에 올라있다. 놀란 라이언, 랜디존슨, 로저클레멘스 등 살아있는 많은 신화들 중 우리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신화를 목격하고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2. 선동렬 기록과 사건 ★총 5차례의 0점대 방어율, 그중 정규이닝 기록하의 0점대 방어율 3회(최고 방어율 0.78) ★방어율 0.99를 기록하며 262.2이닝을 뛴 86년, 24승 중 총 19번의 완투승, 그중 8회의 완봉승. ★통산 최다 완봉승 기록 29완봉 ★최고 방어율 8회(7번이 연속) ★최다승 1위 4회 ★최고 승률 1위 4회 ★최다탈삼진 1위 5회 ★투수 4관왕 3회 ★시즌 MVP 3회 ★노히트 노런 89년 7월 6일(대 삼성전) ★9명 연속타자 탈삼진 2회(95년) ★1경기 최다 탈삼진 18개 ★1186타자 연속 무피홈런 ★49.2이닝 연속 무실점 ★통산 방어율 1.20 1985 7승 4패 111이닝 방어율 1.70(탈삼진 103) 피홈런 2 1986 24승 6패 262.2이닝 방어율 0.99(탈삼진 214) 피홈런 2 1987 14승 2패 178이닝 방어율 0.89(탈삼진 144) 피홈런 2 1988 16승 5패 168이닝 방어율 1.21(탈삼진 200) 피홈런 3 1989 21승 3패 169이닝 방어율 1.17(탈삼진 198) 피홈런 2 1990 22승 6패 190.1이닝 방어율 1.13(탈삼진 189) 피홈런 1 1991 19승 4패 203이닝 방어율 1.55(탈삼진 210) 피홈런 8 1992 부상 1993 클로져 31세이브 10승 3패 126이닝 방어율 0.78(탈삼진 164) 1994 부상 1995 클로져 33세이브 5승 3패 109.1이닝 방어율 0.49(탈삼진 140) 일본기록 1996 35세 클로져 방어율 5.51 3세이브 5승 1패 1997 36세 클로져 방어율 1.28 38세이브 1승 1패 1998 37세 클로져 방어율 1.48 32세이브 1승 무패 1999 38세 클로져 방어율 2.61 28세이브 1승 2패 38세 참고로 당시 선동렬과 마무리 1, 2위를 다투던 일본의 영웅인 사사키의 기록을 비교한다. 사사키 1996 26세 클로져 방어율 2.90 25세이브 1997 27세 클로져 방어율 0.90 38세이브 1998 28세 클로져 방어율 0.64 45세이브 1999 29세 클로져 방어율 1.93 19세이브 분명 사사키는 일본의 수준 높은 마무리였으며 항상 시즌 막판에 선동렬을 리그 구원 1위에서 2위로 내려놓은 선수였다. 그러나 선동렬이 일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데뷔하여 첫해의 부진을 씻고 이듬해인 1997년 상반기 센트럴리그 구원 1위와 방어율 0를 기록하면서 한국 국보의 맹위를 떨치게 되면서 이른바 사사키의 "선동렬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선동렬이 일본야구에 등장하면서 사사키의 기록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27세의 젊은 어깨 사사키와 일본 야구는 이른바 한국야구의 한물간(?) 영웅에게 일본 구원 1위를 내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번번히 3점 정도의 리드를 안고 선동렬이 등판해야 할 상황에서는 오찌아이가 나오고 이른바 너무도 힘든 터프 세이브의 상황에만 내보내는 주니치 감독의 배려(?)와 심판의 편파판정 덕에 선동렬은 그야말로 일본내 전문가들이 기록을 뒤로하고 인정하는 일본 최고의 마무리로 평가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사사키를 폄하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사키는 97년에는 세이브 수에서 선동렬과 동등한 기록을 보이면서도 방어율 0점대를 찍고 있다. 이른바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조금더 질적인 비교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단 1군과 2군을 오가던 1997 첫해의 선동렬의 기록은 제외하고 97(36세), 98(37세)의 선동렬과 같은 두해 동안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사사키(27, 28세)의 기록을 비교한다. 1997 선동렬 / 사사키 방어율 1.28 / 0.90 이닝 63 / 60 세이브 38 / 38 피홈런 0 / 6 볼넷 12 / 17 whip 0.76 / 0.70 (이닝당 출루허용율) 9이닝 피홈런율 0 / 0.9 이닝당 볼넷 0.19 / 0.28 1998 선동렬 / 사사키 방어율 1.48 / 0.64 이닝 48.2 / 56 세이브 29 / 45 피홈런 4 / 7 볼넷 11 / 17 whip 0.87 / 0.80 9이닝 피홈런율 0.72 / 1.08 이닝당 볼넷 0.22 / 0.30 위의 표에서 드러나듯이 세이브 숫자와 방어율은 사사키가 앞서고 있으나 당시의 일본 야구 전문가의 증언처럼 선동렬에게는 주심 스스로도 인정한 편파판정, 세이브 상황의 질적 차이 등 수없이 많은 핸디캡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기록과 기록 사이를 살펴보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짐작케 하는 수치가 있다. 다름 아닌 피홈런수와 볼넷수, 그리고 이를 이닝당 환산한 점수이다. 선동렬은 사사키와 함께 일본 최다세이브를 기록하던 97년 피홈런수가 제로이다. 반면 사사키는 7개의 피홈런이 있었다. 1998년에는 주니치보다 이기는 경기가 많았던 사사키로서는 세이브 수에서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질적 수준을 평가하는 피홈런과 볼넷은 이닝으로 환산해도 선동렬을 이기지는 못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는 사사키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고 전성기를 이미 넘겨버린 우리의 선동렬이 일본에서 여러 가지 악재를 껴안고도 이루어낸 그의 기록을 질적으로 평가해보려는 의미이다. 다시 한번 일본내의 전문가들조차도 선동렬이 사사키보다 한수위의 기량을 가진 선수라는 의견을 내놓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잘 알다시피 사사키는 2000년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으며 2001년에는 45세이브 3.24의 방어율을 기록한다.(2000, 2002년 역시 리그 최고수준의 기록을 거두었음을 거듭 밝힌다) 이렇게 볼 때 선동렬 선수가 일본 주니치 시절에 보였던 기량만으로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면 메이저리그 트레이드 전문가이자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의 부사장 레이 포이테빈트의 말대로, 당시 노모, 박찬호 등과 비교하여 가장 높은 성공률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나 빌 웨인의 말처럼(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의 선동렬) 메이저리그 최고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평가가 과연 사실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도 남음이 있다. 3. 선동렬을 데려가기 위한 메리저리그의 구애들.. (선동렬의 영광과 도전 중에서..) "84년 겨울. 선동열과 국내야구계는 해외진출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당시 고려대 졸업반이던 그는 연고팀 해태의 끈질긴 스카우트 제의에도 불구하고 미국 LA 다저스행에 욕심을 내고 계약을 미루고 있었다. 다저스는 이미 그에게 50만달러라는 지금으로도 만만치 않은 계약금을 제시하며 메이저리그로 유혹했다. 82년 잠실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첫 우승을 안긴 주역이 선동열이었다. 84년 10월 쿠바의 길레르모 몬카다구장에서 벌어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예선에서 보여준 선동열의 공은 무시무시했다. 비록 팔꿈치 이상으로 완투는 어려웠지만 선동열 없는 한국야구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국가대표 알짜들이 프로로 빠져나가 타선에 공백이 생긴 한국팀은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리그에서 3승4패를 마크하며 참가 13개국 가운데 4위를 차지했다. 숙명의 라이벌 일본과 같은 순위였다. 선동열은 그 대회에서 방어율 1위를 차지했다." "극성맞기로 소문난 해태팬들의 전화공세에 송정리 선동열의 집은 수화기를 내려놓아야만 했다. "해태에 가지 않겠다고 하자 팬들이 매일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영업(여관업)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새벽 2시가 넘어서 찾아와 손님을 쫓아내는 경우도 있었고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는 사람도 있었다"고 선동열은 당시를 회상한다. 선동열의 어머니 김금덕씨는 큰 충격을 받아 심장병증세로 입원까지 했다. 물론 해태구단은 "팬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고 말한다. 이 무렵 선동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당연히 메이저리그 진출에 욕심이 났다. 문제는 군대였다"고 그는 회고한다. 국가대표 선수로서 많이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은 특례 보충역대상자였지만 국내무대에서 5년을 활동해야 병역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선동열은 메이저리그로 날아갈 길을 모색했다. 만일 박찬호처럼 LA 다저스가 미국유학→프로입단이라는 편법을 당시 알았더라면 선동열의 야구인생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선동열은 마음을 독하게 사려먹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재촉했으나 아픔을 참고 버텼다. 신체검사때까지만... 검사를 앞두고는 술도 마셨다. 치질환자는 잘 알 것이다. 술은 치질에는 독약과 다름없다는 것을. 그러지 않아도 참기 힘든 통증속에서 괴로운 줄 알면서도 술을 마셔댔으니 신체검사 때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신체검사코스를 모두 마친 그는 징병관앞에 섰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서야하는 자리였다. 징병관의 결정 하나에 입대와 면제가 결정되는 운명의 순간이었다. 다음은 그때 선동열의 기억. "당연히 면제판정이 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징병관은 아무 말이 없었다. 도장도 찍지 않았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라는 말만 들었다." 이상하다. 왜 그럴까. 혹시... 그날 하오 선동열은 집에서 현역입영대상이라는 통고를 뒤늦게 받았다. 선동열으로서는 눈앞에 뒀던 메이저리그행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1995년(일본진출을 앞둔 시점) 미국 보스턴 레드삭스의 극동담당 스카우트 이덕준씨가 해태구단을 방문했다. 그날 하오 보스턴의 레이 포이트빈트 부사장도 다시 선동렬을 데려가기 위해 또 한번 한국을 찾아왔다. 미국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이 유망주가 아닌 정말로 한국 프로야구선수를 스카우트하러 태평양을 건너온 것이다. 이적료로 최고 2백만달러(약 15억4천만원), 연봉은 신인규정에 따라 최고 10만9천달러(약 8천7백만원)선에서 결정하면 안되겠는가?. "선동열은 한국 프로야구선수로는 메이저리그에 직행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선수다. 메이저리그가 먼저 원해 달려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와 협상을 해달라" 그러나 자금사정에 바빴고 메이저리그 진출이 갖는 한국야구사적 의미를 전혀 모르는 해태 구단은 메이저리그의 초특급 제의에 거절을 했다. 다시한번 선동렬의 메이저리그행은 물 건너갔다" "같은 년도 미국 메이저리그 시애틀 매리너스가 한국야구위원회(KBO)에 4번째로 신분조회를 요청했다. 해태는 '협상할 뜻이 전혀 없다'고 회신했다." - 미안한 말이지만 해태 구단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선동렬이 일본 진출 결정시 일본 야구계는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엄청난 부자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훨씬 높은 연봉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원했던 요미우리가 아닌 주니치 구단으로 이적될 수밖에 없었던 선동렬, 그리고 단 한차례도 실패 한적이 없다는 요미우리의 협상 실패.. 이 비하인드 스토리를 지면 관계상 다음 기회에 낱낱이 밝혀드리기로 하고 선동렬과 그의 해외진출을 둘러싼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4. 페드로 VS 선동렬 1. 구질 1. 직구와 체인지업, 그리고 그들의 무브먼트(초능력을 보이는 인간들) 볼의 무브먼트는 변화구의 구질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개념이다. 변화구 자체가 무빙 볼이라고 본다면 직구는 일단 그러한 무브먼트을 기반으로 하는 구질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 두 선수들은 직구 자체가 현란한 무브먼트를 가지고 있다. 춤추면서 날아오는 직구.. 그들은 어쩌면 평범한 직구와 직구가 아닌데도 직구라 불리고 있는 또 다른 구질의 볼을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99-2000시즌 페드로의 강속구는 말 그대로 불같은 강속구이다. 그러나 그의 직구는 뒤에서 설명할 무브먼트를 제쳐두고 이야기할 수 없다. 평균 구속 94-95마일의 직구는 88마일의 체인지업과 굳이 조화를 이루지 않더라고 리그를 평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성기 시절 선동렬의 직구 역시 94-95마일의 직구를 뿌렸으며 상대 타자들과 포수는 공이 춤을 추면서 들어온다든지 중간에 한번 멈췄다가 들어오는 것 같다고 하였다. 페드로가 긴 손가락과 타고난 유연성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역동적 동작으로 이런 직구를 만들었다면 선동렬은 상대적으로 짧은 손가락이지만 포크처럼 공을 찍어쥐는 특이한 그립에 역시 타고난 신체적 유연성과 체력을 바탕으로한 역동적 투구폼으로 이런 직구를 만들었다. 실제로 선동렬의 직구는 최고구속 97마일(158km), 평균구속 94마일의 직구를 뿌렸으며 은퇴 직전의 주니치에서조차 한국나이 38세로 93마일(154km)을 기록하였다. 과연 허구연씨의 말대로 선동렬의 직구는 로저클레멘스급이 아닐 수 없다. 2.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그밖의 변화구들(신이내린 위대한 명품들) 메이저리그를 주름잡는 위대한 변화구들은 수없이 많다. 존 스몰츠의 종으로 휘는 슬라이더, 마리아노 리베라의 컷패스트볼 등.. 그러나 전성기의 페드로 역시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은 가히 가공할 파워를 지니고 있다. 특히 춤추는 직구와 똑같은 궤적으로 들어오는 체인지업을 타자들은 "그가 던진 공이 체인지업인 것을 아는 것은 이미 내 배트가 돌아간 다음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슬라이더는 타자의 머리를 향해 날아가다가 갑자기 꺽이어(비행접시처럼^^) 스트라이크 존에 박힌다. 그야말로 불가사의 그 자체이다. 선동렬의 위대한 슬라이더. 그것에도 붙여진 별명이 수없이 많다. 한국야구전성기 시절에는 슬라이더라는 이름이 보편화되지도 않았고 그냥 변화구였다. 선동렬의 슬라이더는 이미 전성기를 넘겨버리고 일본에 가서야 그 이름을 찾고 인정을 받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최대의 야구 전문지 슈칸베이스볼은 당시 일본을 주름잡는 사사키의 특급 포크볼보다도 선동렬의 슬라이더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당시 선동렬의 슬라이더가 슬라이더인지 아니면 포크볼인지에 대해 심각한 논쟁이 있었다. 슬라이더라고 하기에는 불가능한 극적으로 변화하는 공의 궤적을 이해할 수 없었고 포크볼이라고 하기에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러나 그것은 선동렬의 슬라이더의 투구 메커니즘에서 나오는 분명 슬라이더였다. 그래서 그들은 선동렬의 슬라이더를 일본 최고의 볼에 선정하였으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칠 수 없는 신의 은총을 입은 마구"라 하였다. 3. 파괴력과 컨트롤의 조화(신이 내린 선물들) 딜리버리라는 개념이 있다. 그것은 투수가 와인드업에서 공의 릴리스 순간까지, 그 때까지 투수가 얼마나 빠르고 유연하게 그 동작들을 이어가느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그렉 매덕스는 느리고 정적인 딜리버리를 지닌 투수이고, 케빈 브라운은 빠르고 역동적인 딜리버리를 지닌 투수로 정평이 나있다. 단연 둘의 차이는 존재한다. 느리고 정적인 딜리버리는 볼의 로케이션을 좋게 할 수 있으나 구속은 떨어진다. 반면 엄청나게 역동적인 딜리버리는 구속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나 원하는 위치에 공을 집어넣기는 힘들게 된다. 그러나 여기 두 선수는 엄청나게 역동적인 투구폼으로 광속구를 원하는 스트라이크 존에 구석구석 박아넣는다. 페드로의 투구폼은 "일구 일구를 저렇게 던지고도 그의 몸이 무사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낳게 한다. 그것도 그리 크지도 않은 체구를 지니고서. 이러한 의구심이 결국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은 두 번째로 어리석은 트레이드를 만들고 말았지만.. 선동렬의 투구폼 역시 그 역동성이 페드로에 뒤지지 않는다. 아마 시절의 상체를 보다 많이 활용하던 투구폼에서 탈피하여 프로 시절에는 하체의 균형이 뒷받팀된 투구폼으로 변화한다. 일본 진출당시 일본 야구 전문가들은 그의 투구폼이 호랑이의 점프를 연상시킨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원하는 위치에 공을 찔러넣는 능력은 한국, 일본을 통털어 단연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선동렬 직구는 알고도 못친다고 하였다. 4. 체력과 유연성(타고난 영웅의 조건), 그리고 위력의 지속시간 인간이 지닐 수 없는 능력을 인간의 신체 내에서 표현해 내기에 부상을 밥먹듯이 당하는 페드로 마르티네즈. 이제는 인간으로 귀화한 것이 틀림없다는 전(?) 외계인, 그의 나이는 33세이다. 지금 그는 평균 직구 구속이 91마일(148km)에 그치고 있지만 2004년 현재 11승 4패 방어율 4.15를 기록하고 있다. 지구인으로 귀화했어도 그는 아직 페드로 마르티네즈인 것 만은 틀림없다. 선동렬 역시 은퇴 직전까지 92-93마일을 던졌으며 은퇴하고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던 작년 올드스타 경기에서도 불혹을 넘긴 나이로 144km을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마무리로 뛰었기 때문에 구속은 페드로보다 다소 상회했지만 둘의 구속차이는 거의 없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다만 페드로가 38세에 과연 어느 정도의 활약을 하고 있을 것인지가 너무 궁금하며 또한 그 신화가 영원해주길 바라는 바이다. 5. 선동렬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었다면? 그 답은 아무도 모른다. 그가 진정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다면 방어율 0점대를 기록했을지 아니면 1, 2점대를 기록했을지, 20승을 거두었을지 노히트 노런을 이루었을지, 1186타자 연속 무피홈런을 기록했을지 아닐지 ...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건, 그리고 감사한건 선동렬 이외엔 한국야구사에 그런 기록은 아직까지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선동렬이 없었다면 한국 야구사에 이런 한국계 외계인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선동렬의 일본 진출시의 상황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적어볼까 합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