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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이탈리아군 이야기들. 이거 사실인가요?
게시물ID : history_52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탈리아군
추천 : 4
조회수 : 4211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8/05 17:23:39

일단 그시절에 비해 많이 발전한 폼생폼사 현재의 이탈리아군 사진부터.. 아직도 전투용 식수를 파스타 데치는데 쓰고 있을까요?

 

 

문명4

1차대전 전 이탈리아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를 침략. 6천명의 병력이 독가스탄과 기관총까지 들고 침공했으나 창과 활로 무장한 원주민 3천명에게 대패..



- 1차대전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과 이탈리아 군이 격전(?)을 벌임. 독일군 피해 사상자 2만 3천명 이탈리아군 피해 사상자 3만명, 포로 29만 3천명, 탈영병 30만명??!?!?



- 선전포고

2 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지도자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질투해서-_-; 아무 생각없이 즉흥적으로 연합국에 선전포고. 덕분에 전세계에 있던 이탈리아 선박이 모조리 연합국에 나포당함.. 그리고 즉흥적으로 선전포고 했기때문에 선전포고 후 10일간 아무것도 안함..



- 프랑스

독 일의 프랑스 침공시 이탈리아도 당당하게 프랑스로 군을 진격시킴. 하지만 국경을 막은 프랑스 국경수비대에게 전병력이 대패하고 오히려 프랑스 국경수비대가 이탈리아 영토로 침공하는 상황이 됨-_-; 다행히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해서 프랑스 국경수비대에게 이탈리아 영토가 점령당하지는 않음..



- 인해전술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이탈리아군 25만명과 영국군 3만 5천명이 전투. 이탈리아군 대패. 포로만 20만명-_-;

 
- 등반가

케 냐산은 아프리카에서 두번째로 높은 산으로 2차 세계 대전 도중 이탈리아 병사 세명이 정상 (4985 m)에 도전해서 첫등정에 성공했다. 그들은 영국군에게 잡혀 있던 포로들로 포로 수용소에서 매일 그 산을 보는 중, 한번 올라보고 싶었기 때문에 산을 오르는 루트를 검토하면서 반년 동안 식료품을 모으고 등산 도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탈주, 80Km 거리를 걸어 마침내 등정 성공을 이뤄냈다. 이후 이들은 수용소로 당당하게 복귀했다. 영국군은 이들의 기행이 너무 기가 막혀서 단지 몇주 동안의 독방형만을 내렸다고.


- 참호속에서의 이탈리아군.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의 롬멜 원수가 이탈리아군의 참호를 방문했다. 하지만.....그 때!! 영국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탈리아군의 병사와 장교는 모두「오 성모 마리아님!」이라고 외치며 지면에 엎드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롬멜 원수는 이탈리아군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다.

「......반격은 안할꺼냐??? 」


- 이탈리아군 포로의 취급

북 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 장교에게 무장한 이탈리아군의 중대가 항복하기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리품을 수집하기 바쁜 영국장교는 그들을 무시한채「시끄럽다!, 저쪽으로 꺼져!」라고 이탈리아 병사의 총을 빼앗아 던지면서 고함쳤다. 이탈리아군의 무장중대는 어쩔 수 없이 포로로 잡아주는 영국군을 찾기 위해 다시 총을 주워 또 터벅터벅 걸어갔다.


- 고문을 받은 이탈리아군

2 차 대전 중, 유고 유격대의 포로가 된 독일군은 끝까지 완고하게 부대의 정보를 일체 발설하지 않았고 고문에도 굴하는 일없이 꼿꼿해 세르비아인의 분노를 샀지만 이탈리아군은 곧바로 울며 아는걸 전부말하며 용서를 빌었으므로 고문을 안당했다고..


- 우리가 졸리면 저쪽도 졸린다.

이탈리아군은 밤이 되면 「우리가 졸리면 상대방도 졸리다. 그러니까 공격해 오지 않을 것이다」 라며 경계도 세우지 않고 취침했다. 그리고 부대 전체가 포로로 잡혔다..


- 브라이언 킴

이탈리아군의 병사가 한밤중에 눈을 떴는데 소대장이 어디론가 나가려는 중이었다. 병사는 소대장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그러자 소대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 나는 국가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지 않는다. 나는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짐을 싸면서 그 대장은 매력적인 미소를 보이며.......

「 내가 목숨을 걸 때는 반한 여자를 지킬때 뿐이다!」......라고 웃는 얼굴로 상쾌하게 말하며 전선에서 이탈해갔다. 그러자 병사도.....
「 소대장님! 기다려 주십시오!」......뒤돌아본 소대장에게 부하는 이렇게 말했다.

「 저도 함께 갑니다!」라고. 이렇게 아침이 되어 다른 소대원이 눈을 뜨면 뜰수록 소대의 수는 줄어들고 있었다.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한 명 줄고 두 명 줄고.. 결국 영국군과 싸우기 전에 그 소대는 사라졌다.


- 영국해군 무장 어선과의 1:1 대결

잠 수함「갈릴레이(Galilei)」, 이탈리아의 위대한 과학자 이름을 붙인 군함이다. 하지만 이 군함은 영국해군의 무장 상선도아닌 트롤어선 개조 무장 어선과의 1:1 승부에서 패배.( ASW trawler - HMS Moonstone )게다가 무려 포획되어 버렸다. 어선주제에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 변변한 조준기도 없는데 차례차례 명중탄을 퍼붓고 승리한 로열 네이비도 굉장하지만 이탈리아 해군은 사관들이 다쳤다고 시원시럽게 백기를 걸고 항복해버렸다.


- 전쟁 준비보다 외화

돈벌이를 위해 자국 공군에도 배치가 끝나지 않은 기체를 수출하고 있었다.

-> 이탈리아 공군 전투기 피아트 G50은 40년 6월에야 첫 전투비행단이 창설되었다. 하지만 피아트사는 자국 공군에도 배치가 아직 끝나지 않았던 41년 1월 최신 개량형인 G50bis를 핀란드공군에 판매했다.


- 이탈리아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았다?

2 차대전기 미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진출, 이탈리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기의 이야기다. 그러나 패전이 기정사실화된 이탈리아군에 전의는 없었고 미군도 그걸 눈치채곤 공격을 어영부영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관측기가 지나갔을 때는 제대로 싸우고 있는것을 가장한 이탈리아군이었다. 

왜냐? 독일군이 오면 전쟁이 더길어지므로 미군에 발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 미군도 의지없는 눈가림 반격, 그 전투을 독일군 관측기는 이렇게 보고 있었다.

「 이탈리아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고 있다! 」하지만 그 후에 이탈리아군의 바램과는 달리 독일군이 구원으로 나타나 그 전투는 진짜 격전이 되어버렸다.


- 신의 가호

이 탈리아군은 화약의 경우 적절한 보관 장소가 발견되지 않을 경우 교회에 즐겨 보관했다. 교회라면 적군도 폭격까지는 하지 않을것이고 또한 신의 가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첨탑에 보기 좋게 낙뢰. 마을은 대폭발로 순식간에 1/5이 날아갔다고 한다. 


- 나폴리의 도둑은 세계제일

2차대전기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는 군함이 도둑맞은 사례가 있었고 중동전쟁의 한창때는 전차까지 도둑맞았다고 한다.


- 군용기에 관한 일화

이 탈리아 공군은 2차대전기때까지도 전기간에 있어 계기 비행의 훈련을 전혀 하지 않았다. 어느 전투기의 초기형은 밀폐식 방풍이었지만 파일럿들로부터「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다」라는 불평을 듣자 양산형은 창문을 떼버렸다-ㅅ-.. 그 결과 속도가 떨어져서 격추..-_-;


- 머리회전이 빠른 이탈리아군

북 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이 영국의 패잔병 사냥을 하고 있었지만 영국군은 원주민 취락에 교묘하게 숨어들어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독일군도 원주민 취락을 샅샅히 수색했지만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현지의 세력가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 영국군 한명당 설탕 5포대, 밀가루 5포대」

다음날, 영국군은 전원 잡혔음.



- 와인 

대전기 이탈리아군에서 보급한 와인의 표지엔「전투중 단숨에 들이키면 만취되어 전투도 두렵지 않다!」라고 써 있었다. 또 물자 비축은 탄약보다 와인이 많았다.



- 포로가 된 이탈리아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독일, 일본, 이탈리아의 3개국군의 포로가 수용된 수용소가 있었다.

독일군 포로들은 집단을 이뤄 땅굴을 파 수용소에서 탈주하려고 시도했고

일본군 포로들은 집단으로 자결해버렸다.

하 지만 이탈리아군 포로는 수용소의 문이 필요없을 정도로 점잖았고 자기들끼리 요리대회도 열어서 즐거운 수용소 생활을 즐겼다-_- 그리고 그와중에 동네 아가씨를 꼬셔서 결혼해서 해방시켜줘도 그 동네 눌러사는 이탈리아인들이 많았다고-_-..


- 사막에서 구원 요청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과 싸울 때, 이탈리아군 부대로부터 구원 요청이 들어와 독일군 부대는 전력을 다해 그들을 구원하러 향했다.

이유는 이탈리아군이 가진 물을 전부 파스타 데치는데 써버려서 마실물이 없었기때문.. 결국 독일군이 구해주기 전에 목이 말라서 영국군에게 전원항복-_-


- 포로대우

말타 공방전시 방공전에서 격추된 영국군 파일럿이 해상에서 이탈리아 해군에 포로로 잡혀 이탈리아 본토로 이송 되었다. 

밤 이되고....... 감옥에 들어온 그에게 저녁 식사가 들어왔는데 이것은 파스타에 고기 요리 식후에는 과일에 와인까지 한잔 따라오는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호화로운 식사.장교라곤 해도 말타에서 보급이 끊겨 매일 형편없는 식사만을 해왔던 RAF 파일럿은 생각했다.

「이것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것인가.....」

내일은 총살된다....... 라고 생각하고 맛있게 음식을 비우고 맞이한 이튿날 아침 그가 수감된 감옥 문앞에 고위 장교가 당번병을 동반하고 나타났다.

이 장교가 총살을 집행하는 녀석인가(?) 라고 생각한 영국군 파일럿 앞에 그 장교가 무슨이야기를 시작했다. 

일행인 당번병이 통역했다.

「 어제는 사소한 행정착오로 장교인 귀관에게 일반 병사용 식사를 공급해버렸다. 나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데 우리는 제네바 협정을 준수할 것이며........(이하중략)..........하여튼 포로를 학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나의 얼굴을 봐 어제의 실례를 용서해주지 않겠는가?」

 

반박글..

 

1. 1차 에티오피아 - 이탈리아 전쟁 에서의 아도와 전투

전설 - 각종 최신 무기로 장비한 이탈리아군이 구식의 에티오피아 군에게 깨짐.

진실 - 이탈리아군 2만명 에티오피아군 8만명으로 숫자만 1 : 4 였고 에티오피아군은 구식 소총이건 뭐건 어찌되었건 화기로 완전 무장. 이와중에도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 군에게 1만 3천명의 사상자를 안김



2. 1차 에티오피아 - 이탈리아 전쟁 전역

전설 - 이탈리아군 사상자 5천, 에티오피아 사상자 1천명. 러일 전쟁 이전에 유색인종이 백인에게 이긴 대승리

진실 : 이탈리아군은 2만명, 에티오피아 군은 10만명이고 그중 8할이 현대식 화기로 무장. 더불어 기관총과 야포 역시 보유하였다고 한다. 지는게 오히려 신기할거다.



3. 제 1차 세계대전 피아브강 전투

전설 - 19*** 10~11월 휴전 교섭 기간중 이탈리아군의 기습 공격, 하지만 대패

진실 - 실제 전투 기간은 6월, 실제 공격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었고, 오스트리아군의 대패.

이로 인해 제정 붕괴의 원인 제공.



4. 제 1차 세계대전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전설 - 휴전협정 발효후 이탈리아군의 기습 공격으로 포로 30만 획득

진실 - 이탈리아군의 공세는 10월 24일날 개시되어 11월 3일날 종료되었다. 한마디로 개소리.



5. 1935년 제 2차 에티오피아 - 이탈리아 전역

전설 - 항공기와 전차를 동원하여 공격했지만 창과 구식 소총으로 무장한 에티오피아 군에게 박살. 대표적인 예로 검은셔츠 사단은 에티오피아군의 공격에 전차까지 버리고 달아났다. 이후 독가스 대량 살포로 전세를 역전 시킨다.

진 실 - 일부 부대가 창과 구식 소총으로 무장한것은 맞으나 그것은 70만이라는 대병력을 징집해서 무기를 다 나눠주지 못한 결과였을 뿐이었고, 그렇게 모은 70만명도 이탈리아군의 공세에 죄다 녹아내림. 참고로 이탈리아군 피해의 다수는 식민지 에리트리아 출신 병사들.



6. 1937년 스페인 내전의 과달라 하라 전투

전설 - 마드리드로 진격하던 이탈리아군 4개 사단이 스페인 인민전선 군대에 의해 박살남.

진 실 - 이탈리아군 4개 사단이 맞닥뜨린 부대는 국제여단. 거기다 이탈리아군의 전차는 기관총만 장비한 탱켓인데 비해 스페인 인민전선 군대는 T-26으로 무장했다. 싸움이 되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전해진다.



이 외에도 더 있으니 찾아서 써보는것도 나쁘지는 않겠군요.

통칭 이탈리아군 전설이라고 불리우는것 대부분이 일본애들이 마구 지어낸 도시전설 이라더군요.

이탈리아군이 무능했던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전쟁 준비도 제대로 못한채 무솔리니한테 등 떠밀린

결과이지 이탈리아군이 바보 라서가 아니죠.



P.S 찾다 보니 저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신분 게시글이 있어서 일단 퍼옵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위 "이탈리아군의 전설"

http://glzeng.com/bbs/board.php?bo_table=freeboard&wr_id=30



아마 한번씩은 읽어보신 적이 있을 것이며 이 글때문에 "이탈리아군은 역시 무능하다" 심지어 "전세계 군대가 이탈리아군같으면 세계 평화가 올 것"라는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 글의 원 출처는 일본웹이며 국내의 어느 네티즌이 직역하여 인터넷으로 퍼뜨린 것입니다.



원출처(이탈리아군은 왜 약했는가) : http://2chart.fc2web.com/itaria.html



그 런데 이 글의 내용 대부분은 지극히 편파적이고 과장, 왜곡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만든다면야 전 세계 어느 군대이건 오합지졸이 되지 않을 수 없죠. 한민족 전쟁사에 대해서도 잘 싸운거 빼고 졸전의 역사만 넣는다면(원균의 삽질같은거) 우리 역사를 모르는 외국인들에게는 충분히 "한국인들은 겁쟁이"라고 생각할겁니다.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반박할 수는 없지만, 몇가지만 지적해 보겠습니다.



1. 1866년 6월 오스트리아군에게 패한 전투는 쿠스토차전투입니다. 이탈리아군은 20만이 아니라 12만이었고 피에몬테군을 중심으로 뭉친 이탈리아 혁명군으로 여러 도시국가 군대를 합한 연합군이었습니다. 지휘계통이든 장비, 훈련도 형편없었으며 무엇보다 상대는 당대 유럽 최강국인 오스트리아제국의 정규군이었습니다. 이는 12만vs8만이라는 숫적 차이를 떠나 1950년에 신생한국군과 미군의 대결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2. 이디오피아 아도와 전투는 이탈리아군 병사들의 무능함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이탈리아 정부와 군 수뇌부의 정보 부족, 상대에 대한 경시에서 비롯된 참사입니다. 이디오피아군은 근대무기로 무장해 있었고 장비면에서 공격군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이탈리아 원정군 대부분은 현지 에리트리아 식민지군이었습니다. 적의 숫자를 과소평가하고 겨우 식민지군 4개 여단 2만으로 공격했다 포위되어 패퇴한 것이죠.(이디오피아군 10만) 즉 지휘부의 잘못된 작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원문에서는 이탈리아군이 더 큰 희생을 치룬 것처럼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이디오피아군이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이탈리아 5천, 이디오피아 1만7천) 또한, 이디오피아는 프랑스의 대규모 지원을 받았습니다.



3. 카포레토전투는 1차대전중 이탈리아군 최대의 참패였지만, 정면의 적은 오스트리아군보다 독일군이었습니다. 게다가 후티어전술이라는 신전술로 독가스공격을 무차별로 퍼부었고 독가스에 취약했던 이탈리아군은 단숨에 붕괴되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1차대전 참전후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선전했으며 카포레토전투 이전까지 큰 희생을 치루며 알프스산맥을 넘어 오스트리아 영토를 수km이상 침공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시종 공세를 유지했던 것은 이탈리아군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독일군이 투입되었고 또 이때 이탈리아 제2군 사령관이 부재중이었습니다. 카포레토는 이탈리아군에게 치명적인 패전이었으나 이탈리아정부는 국왕을 중심으로 "결사항전"을 천명했고 전국에서 자원병들이 신속하게 전선에 투입되어 금새 전선을 안정시켰습니다.



4. 오스트리아 휴전 교섭중에 이탈리아군이 공세로 나왔다가 패퇴했느니, 휴전직후에 공세를 해서 이겼다느니 따위로 적혀 있는데 말그대로 거짓말입니다. 먼저 공세로 나온 것은 오스트리아군이었고 패퇴한 것도 오스트리아군이었으며(피아베강전투), 비토리오 베네토전투는 휴전이후가 아니라 휴전전이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대규모 공세에 오스트리아군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때문에 오스트리아정부가 휴전한 것인데, 전후관계를 멋대로 바꾸어 놓았죠.(공세 10월 24일, 휴전 11월 4일) 지은이의 무식인지 의도적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5. 이디오피아 공격도 마치 졸전의 연속인양 적어놓았으나, 이탈리아군은 몇몇 전투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며(평균 이탈리아군 1명 부상에 이디오피아군 10명이상 전사) 이는 여타 국가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1년이상 소요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6개월여만에 끝나고 말았죠.



6. 그리스 전역은 2차대전 최대 삽질중 하나지만, 이탈리아군은 21개 사단이 아니라 9개 사단이었고 공격군은 알바니아에 주둔한 병력의 절반인 8만에 불과했습니다.



7. 북아프리카 전선에 누가 트럭을 7천대나 보냈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랬다면 북아프리카에 주둔한 독-이군은 영국군을 능가하는 차량화부대로 구성되었을듯. 히틀러는 단지 완편되지 않은 2개 사단을 보냈을 뿐이며, 이탈리아군 역시 차량화가 완전히 결여되거나 반차량화된 부대였습니다. 독일군은 바바롯사 작전당시 30만대의 각종 차량을 투입했습니다.

수송차량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차량을 다 합한 숫자를 왜곡해서 말하고 있죠.



8. 튀니지에서 항복한 25만명의 절반은 독일군입니다. 또한 미군도 함께 싸웠는데 3만5천의 영국군에게 졌다, 라는 말은 무슨 근거에서 나온 말일까요.



9. 연합군 포로에게 만찬을 주었다느니, 사막에서 파스타를 데쳐 먹었다느니 따위도 왜곡에 편파에 불과합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군은 심각한 병참 문제로 독일군에게 식량을 빌려서 먹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 은이가 어떤 의도로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유머 이상의 가치조차 없는 내용 투성이입니다. 이들의 무책임한 편파 왜곡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죠. 2차대전중의 이탈리아군은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는 이탈리아 병사들의 잘못이 아니라 무책임하고 무능한 무솔리니 정권의 잘못입니다. 6.25 초반에 이승만, 채병덕의 삽질로 대참패를 당하고 맥아더에게 "10만 한국군보다 뉴욕경찰 100명이 낫겠다"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것이 한국인이 전쟁에 약한 민족이라서가 아니죠. 전쟁의 패배는 대체적으로 우두머리의 오판과 삽질에서 비롯됩니다. 지휘관은 뛰어났는데 부하들이 못 따라와서 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원글 - sescia님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escia&logNo=70116812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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