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의 활약>
사실 코사크 족의 활약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출난지라 언급을 안 해둘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원정이고 또 하나는 코사크의 해상 활동이다.
먼 저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원정부터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코사크족 출신인 예르마크는 한때 정부군에 쫓기다가 시베리아 지역을 개척할 권리를 가지게 된 상인 가문 스트로가노프 가문 휘하에 들어가게 ㅤㄷㅚㅆ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시베리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예르마크로 하여금 탐험대를 이끌고 시베리아를 탐험하게 하였다.
- 이번 기회에 한탕 해야겠다 이거야! -
시 베리아를 탐험하며 영역을 확장하던 예르마크는 당시 시베리아에 있던 시비르 칸국과 충돌했다. 하지만 시비르 칸국은 총 등의 화기를 잘 몰랐기에 화기를 아주 잘 다루던 예르마크의 사설 원정대에 의해 격파당하고 말았다. 예르마크는 1582년 10월 시비르 칸국의 수도 콰실리크를 점령하고 그 곳에 있던 모피들을 이반 뇌제에게 보냈다. 귀가 찢어진 이반 뇌제는 예르마크의 죄를 아주 가볍게 용서해주고, 사슬갑옷까지 하사했다. 이후 예르마크는 계속 시비르 칸국을 압박했다.
- "너희들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이제 총기를 모르는 너희들이 멍에를 쓸 차례다!" -
하 지만 시비르 칸국의 칸 쿠춤 칸은 반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1585년 예르마크의 부대를 기습했다. 부상을 입은 예르마크는 강을 헤엄쳐 도주하려고 하였지만 이반 뇌제가 준 사슬 갑옷의 무게를 못 이기고 익사해버렸고 시비르 칸국은 콰실리크를 탈환했다. 하지만 시비르 칸국은 이 통쾌한 복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압박을 이겨낼 수 없었고 결국 1598년 멸망했다.
- "뭐야! 너희들은 초원에서만 활동하던거 아니었어?!" "훼이크다 이 ㅄ들아! 우린 바다에서도 잘만 활동한다!"
한편 코사크족은 활발한 해상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차이키
(12)라고 하는 소형 선박을 아주 잘 다루었으며 이 배를 타고 흑해 일대를 누비며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에 대한 해적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해적 활동은 사하이다치니가 자포로제 코사크의 헤트만이 된 시점에서 절정에 달했다.
- "나는 해적왕도 될거야!" -
그 는 차이키를 300척이나 건조하게 한 후 3~40척의 함대로 여러 곳을 동시에 타격하며 적을 괴롭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들은 오스만이나 크림 칸국의 주력군이 도착할 때 쯤에 약삭빠르게 도주하여 그들의 뒤통수를 후렸고, 1616년에는 크림 칸국의 약탈 부대가 잡아온 포로들을 노예로 파는 시장이 존재하던 카파를 습격, 14,000명의 오스만, 크림 칸국의 병사들을 몰살시키는 대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코사크 해적들은 카파뿐만 아니라 트레비존드, 시노페, 심지어는 콘스탄티노플 인근까지 약탈했고 덕분에 흑해는 한 때 코사크 해로 불리었다. 지중해에서 바르바리 해적을 통해 재미를 보던 오스만 제국은 반대로 흑해에서는 코사크 해적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 페르시아 약탈 원정을 떠나는 스텐카 라진 -
물론 자포로제 코사크만 해상 활동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그 유명한 스텐카 라진 역시 볼가강 일대에서 수적질을 하였으며, 페르시아 약탈 역시 배를 타고 벌인 해상 원정이었다.
<적백내전-코사크의 시련>
1917 년. 러시아에 존재하던 온갖 모순이 폭발하면서 혁명이 벌어졌다. 황제는 퇴위했고 케렌스키 중심의 공화정이 들어섰다. 하지만 공화정 역시 곧 볼셰비키에 의해 무너지고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이 들어섰다. 하지만 체코 군단의 반란을 시작으로 레닌에 반대하는 온갖 세력들이 모여 백군을 이루고 적군, 즉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두 조각 났던 적백내전의 시작이었다.
- 적백내전 당시의 코사크 병사들 -
이 전쟁 당시 코사크족은 전반적으로 적군, 즉 소련을 적대했다. 우크라이나 지역의 코사크족은 아예 이 기회에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고자 하였고 러시아 지역의 코사크들은 황제에게 충성하던 전통 및 그들의 전통적인 이득을 지키기 위해 백군의 편에 섰다. 하지만 계층 분화로 인해 하층민으로 분류되던 코사크족들은 소련을 위해 봉사하였다.
- "코사크는 소련에 도움이 되지 않고 해가 될 수 있는 존재들 같단 말이야..." -
하 지만 반농반목의 코사크족은 레닌 등 소련 지도부에게는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의 소지가 될 여지가 충분한 존재였다. 더군다나 구성원 중 다수가 백군 편에 섰으니 더더욱 맘에 들리가 없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코사크 사회를 완전 말살하라. 코사크의 지도층을 물론 지식층은 즉시 총살. 이외의 코사크에 대해서도 당지도부의 엄중한 감시하에 둘 것이며 불순한 행동이 있을시에는 즉시 체포하여 총살 내지는 추방하도록 하라."
당 연하겠지만 제정 러시아 당시 존재했던 코사크족의 행정구역들은 모조리 해체되었고, 코사크족은 억압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코사크 족은 소련에 대한 충성 자체가 의심받는 억압받는 민족이 되어버렸다. 적백내전이 종결될 당시 백군 편에 선 코사크 족 다수는 소련을 피해 해외로 도주했고 도주하지 못한 자들은 처형되거나 시베리아 유형지로 끌려가버렸다. 하지만 적군 편에 선 코사크 족도 이 훈령 덕에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시간이 지나며 의심이 어느 정도 해소된 덕에 코사크 족은 1936년부터 소련군에 입대할 수 있게 되었다.
<2차 대전, 그리고 현재>
-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개선식에 참여한 코사크 군대 -
그 러던 중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곧 모스크바 목전까지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코사크 족 다수는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을 위해 싸웠다. 코사크족 기병대는 군마로 하여금 초가집의 초가 지붕을 뜯어먹게 하며 빠른 속도로 진격해 독일군을 도륙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세묜 부돈늬 원수는 이런 코사크족의 용맹을 찬양하며 그들이 항복하는 독일군의 손까지 베어버린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소련이 코사크족에게 그동안 가했던 탄압의 영향 때문에 나치 독일에 부역한 코사크족들도 존재했다. 이들 부대 역시 나름대로 활약했으며 독소전 당시 상당히 악명을 떨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그 숫자가 많은 편은 아니라 나치 독일이 겨우 코사크족으로 2개 사단정도를 창설했을 때 소련은 코사크 족 출신으로 17개 사단이나 만들었다.
- "흐흐흐. 어찌 되었든 니들은 내 숙청 민족 명단에 든 셈이야. 좋은 피를 또 얻게 되었군!" -
스 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이 패배함으로써 나치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후퇴하게 된다. 코사크 사단들 역시 같이 후퇴하다가 1945년 서방측에 투항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얄타 회담 등을 거친 미국과 영국은 코사크족은 서방 측이 포로로 잡아도 모조리 소련에 넘겨주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서방은 오스트리아의 린츠 등에서 코사크 족 수 만명을 통째로 소련측에 넘겨주었고 미국 거주 코사크족 백여명 가량도 이 때 소련으로 보내졌다
.(13) 당연히 소련은 서방 측이 넘겨준 코사크족들 중 몇몇은 바로 처형해버리고 나머지는 모조리 시베리아 유형소로 보내버렸다가 흐루시초프가 집권하고 나서야 사면해주었다.
- 이 자리에서 참 많은 것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한국의 독립부터 코사크의 운명까지 -
문 제는 서방측이 이 과정에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치 휘하에서 복무한 코사크족 병사들은 잔학행위를 꽤 많이 저지르기도 했기 때문에 소련이 처벌하려고 하는 것은 이상한 것도 아니었고 이들의 행동을 생각하면 서방측이 그들을 넘기는 것도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서방은 여자와 아이들, 심지어는 전부는 아니지만 독소전쟁과는 별로 상관 없이 적백내전 당시 망명해왔던 코사크족들도 넘겨버렸다. 그들은 딱히 나치 독일에 부역하지도 않았고, 특히 적백내전 당시 망명한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이들까지 통째로 넘겨준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행동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 현재의 코사크족 모습 -
흐 루시초프가 이들을 사면해준 뒤에도 한동안 코사크족의 대우는 좋지 못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억압받았던 민족들의 복권에 대한 법이 통과되면서 코사크족에 대한 대우는 좋아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 덕에 코사크족은 세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고, 체첸 전쟁 당시 군대를 편성해 러시아군을 돕기도 하였다. 그 이외에도 2009년 경 북카프카스 지역에 존재했던 구 테레크 코사크 구역을 다시 부활시키자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물론 진짜로 그렇게 했다가는 친러계 잉구세티야, 체첸, 다게스탄 자치 공화국 정부들이 모조리 북카프카스에미리트
(14)편으로 돌아설 우려가 있기 때문에 건의는 기각된 것으로 보인다.
<게임 속의 코사크>
코 사크족이 워낙 러시아의 군사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만큼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러시아가 등장할 경우 코사크는 높은 확률로 러시아의 특수 유닛으로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이외에도 엠파이어 토탈워나 나폴레옹 토탈워에서도 코사크족은 등장한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의 코사크 기병 모습 -
하 지만 이런 게임에서 나올 경우 코사크족은 은근히 취급이 좋지 않은 편으로 전반적인 설정이 '가격이 싸지만 그 대신 성능도 비슷한 종류의 다른 유닛들보다 낮다.'식인 경우가 많다. 그나마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는 카드를 통해서 강화시킬 수 있지만 토탈워 시리즈에서는 그것도 안 된다고 봐야 되니....
(1) 이는 타타르에서도 알 수 있다. 보통 타타르는 러시아를 지배한 몽골족을 이르는 명칭이기도 하지만 간혹 쿠만족을 가르키는 명칭으로 쓰인다. 동양권에서 폴로베츠인의 춤이 간혹 달단인의 춤이란 제목으로 소개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2) 후스 전쟁 당시 보헤미아에서 쓰여진 명칭에서 유래된 것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원수를 가르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3) 이슬람권의 영향으로 동유럽에서는 지휘관이 지휘 등의 용도로 메이스를 쓰는 일이 흔했다.
(4) 정작 사하이다치니는 호틴 전투 당시 입은 부상으로 1622년 병사했다.
(5) 사실 코사크족은 그 전에도 여러 번 러시아에 지원 요청을 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면전을 두려워한 모스크바가 그 때마다 모두 거부했다.
(6) 러시아의 전국 회의의자 신분제 의회.
(7) 이 일화 자체는 창작의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만 적어도 그림으로 그려질만큼 꽤나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8) 현재 이 편지는 jager의 번역본, 골리앗의 번역본, 앨런비의 번역본이 존재한다. jager 번역본은 가장 먼저 나왔지만 욕을 의도적으로 생략, 순화한 반면 골리앗 번역본은 욕까지도 충실하게 반영하여 이것이 가장 많이 퍼졌다. 앨런비 번역본은 골리앗 번역본보다도 욕을 더욱 충실히 반영했지만 워낙 늦게 나온 번역본이라 묻혔다...
(9) 하지만 러시아가 오스만제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아조프를 접수하려고 하지를 않자 결국 아조프를 포기해야 했다.
(10) 여기서의 구교도는 카톨릭교회가 아니라 1652년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가 된 니콘의 그리스식 의식으로의 전환 등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에 반발하다가 쫓겨난 사제들로부터 비롯된 종파이다. 전통 의식을 고수한 이들은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받았지만 끈질기게 그 교세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11) 다만 현재는 대부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2) 바다갈매기란 뜻이다.
(13) 이 때 코사크족이 반항하자 최루탄이 사용되고 수면제 커피까지 동원되었다고 한다.
(14) 이츠케리야 체첸의 수장 도쿠 우마로프가 2007년 이츠케리야 체첸을 해산하고 새로 만든 분리주의 조직. 북카프카스 지역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원글 - 로자노프님의 http://rozanov.egloos.com/1129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