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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유목민들 10. 코사크 - 전편
게시물ID : history_52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코사크
추천 : 10
조회수 : 443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8/04 07:05:30

원글 - 로자노프님의 http://rozanov.egloos.com/1129477


<코사크의 기원과 풍습>

 - 코사크족을 묘사한 그림 -

 코 사크. 아마도 코사크 댄스라는 특이한 춤과 몇몇 문학작품을 통해 익숙하게 다가오는 이 우크라이나와 남러시아를 떠돌던 이 유목민들의 기원은 조금 불분명한 구석이 있다. 몇몇 학자들은 이들이 10세기 경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코사크족이 1240년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후 그 유민들과 쿠만족, 체르케스인등 남러시아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결합하면서 형성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코사크란 명칭은 이것보다 좀 더 논쟁이 분분한데 일반적으로는 '얽매이니 않는 자'들을 의미하는 투르크어 '카작'에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방랑하는 자'를 지칭하는 '카즈마크', 혹은 쿠만족이 '수호자'등의 의미로 사용했던 '카자크'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흔히 코사크는 카자크라고도 불려지며 카자흐족등과 혼동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경향은 소련측이 철자나 발음 등이 비슷하고 유목민족이란 공통점이 있는 카자흐족과 코사크족을 그냥 닥치고 똑같은 이름으로 지칭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두 종족은 분명 유목민족이기는 하지만 언어계통부터 문화, 생김새 등 다른 것이 너무나도 많다. 일단 카자흐족은 투르크계의 이슬람교도들이고 코사크족은 인도유럽어계 언어를 쓰는 유럽계 동방정교회 신자들이다.(1)

 이 들은 유랑생활을 하게 된 러시아 공국들의 생존자들과 폴란드나 모스크바 등에서 도망쳐 나온 유랑민들, 그리고 토착 투르크계 유목민족들을 받아들이면서 그 숫자를 불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 대해 믿을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모스크바 공국의 연대기에 나온 기사로 이 기사에 의하면 1261년에 볼가강과 돈강 일대에 슬라브계 유목민들이 존재한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돈강 유역의 코사크족들은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에게 성모 이콘을 바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초 창기 코사크족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킵차크 칸국의 통제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4~15세기에 걸쳐 모스크바 공국과 리투아니아의 세력이 남하하고 킵차크 칸국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우크라이나 일대의 코사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통제를 받게 되고 남러시아 일대의 코사크는 모스크바 공국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 오스프리에서 묘사한 코사크족 모습. 1번은 17세기 초의 자포로제 지도자. 2번은 17세기 우크라이나 코사크. 3번은 17세기 후반의 우크라이나 코사크 기병이다. -

 하 지만 그들의 통제와는 별개로 코사크는 그들의 풍습을 유지하였다. 코사크족은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지만 독특한 머리모양이나 헐렁한 바지 등 유목민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시츠라고 불리는 조그만 정착지들이 모여 연방 형태를 이루었으며 각 시츠는 나름대로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하지만 시츠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락을 했고 끈끈한 단결력을 과시했다. 이 단결력은 코사크족의 전통으로써 코사크 족은 부족원 중 한명이라도 납치되서 노예로 팔려가게 되는 상황이 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부족원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 이들은 꽤나 유쾌한 친구들이기도 했다. 1번은 군복 입은 코사크. 2번은 장교. 3번~5번은 모두 코사크 병사 -

 코사크 족은 매우 평등했는데 그들의 족장 헤트만(2)도 선출직인데다가 헤트만이 업무를 태만하게 한다고 여기면 부족원들은 헤트만을 탄핵할 수가 있었다. 동시에 평시에는 헤트만 앞에서 어떤 말을 해도 거의 문제시 되지 않았다. 단 전시가 되면 총지휘관인 헤트만의 권력은 매우 강해져 즉결처분권이 주어졌을 정도였다.

 이들은 유목생활도 했지만 농사도 병행하였다. 물론 평탄한 스텝 지대에 사는 만큼 이들은 기마술에 능숙했다. 단 타타르족들이 활을 선호한 반면 이들은 총을 선호했다. 근접 무기로는 창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고 대포는 기동성을 이유로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단 대포의 위력을 무시하지는 않아서 소형 대포는 마차에 달아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메이스, 즉 철퇴의 경우 간혹 사용되었으며 동유럽권이 모두 그렇듯이(3) 지휘관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와의 협력과 전쟁>

 14~15 세기 들어와 일부 코사크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이들의 군사적 가치에 주목하여, 이들이 자신들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전쟁이 벌어질 때 병력(주로 경기병)을 보내주기만 하면 된다는 조건으로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그냥 내버려두었다. 종교도 건드리지 않고 그들 마음껏 활보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덕분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보호를 받으며 이들은 마음껏 크림 칸국을 약탈하였다.

File:Sergiy Vasylkivskiy- Cossack.jpg

 - 자포로제 코사크 병사 -

 단 이 시기 코사크들은 3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번째로 반자치적은 조직을 운영하며 연방의 통제를 받는 국경 지대 코사크. 연방의 용병으로 복무하며 어느정도 부를 얻고 종교 등 그들의 풍습을 광범위하게 인정받은 등록 코사크, 등록 코사크보다는 빈곤하고 연방의 통제를 받기는 하지만 국경 지대 코사크보다 훨씬 자유로우며 그 수도 가장 많고 주류이기도 한 자포코제 코사크로 나뉘어졌다. 이 세 부류는 그들이 처한 환경이 달라 반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6세기 후반.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지그문트 3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코사크족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이에 분노한 코사크족들은 1591년 코친스키 주도로, 그리고 다시 1594년 세멘 날레바이코의 주도 하에 훗날 '대장 불리바'란 소설로 잘 알려지게 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두 반란 모두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시아-볼히니아 지방까지 휩쓴 대대적인 반란이었지만 두 반란 모두 연방 최고의 명장들인 얀 카를 코드키비에츠, 스타니슬라브 주키에브스키에 의해 진압되었다.

 - "우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 -

 이 후 한동안 코사크 족은 조용했다. 코사크 족은 다시 연방을 위해 봉사하였으며 키르홀름, 체초롱, 호틴 전투에도 종군하였다. 특히 호틴 전투에서 코사크 족의 소규모 경기병대는 오스만 2세의 오스만 제국군을 농락하며 시간을 휼륭하게 벌어주었고, 호틴 요새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측면을 교란하며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당시 코사크 족의 족장이었던 사하이다치니는 국가의 은인으로 대접받고 화려한 마차를 하사받기도 했다.(4)


 
- "못 살겠다! 갈아보자!" -

 그 러나 코사크족에 대한 차별은 여전했고, 그 뒤에도 코사크족은 몇 차례 소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결국 참다 못하고1648년. 자포로제 코사크는 그들의 원수인 크림 칸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코사크 반란 혹은 크미엘니치크의 난이라 불리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File:Pic I V Ivasiuk Mykola Bohdan Khmelnytskys Entry to Kyiv.jpg

 - 키예프에 입성하는 보흐단 크미엘니치크 -


  보 흐단 크미엘니치크가 이끄는 자포로제 코사크-크림 칸국 연합군은 여러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군을 격파했다. 그 기세로 크미엘니치크는 1648년 크리스마스에 키예프에 입성할 수 있었고 164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얀 카시미에슈 2세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코사크에게 주는 지브리브 조약을 강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전쟁이 재개되었고 이번에는 반대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자포로제 코사크와 크림 칸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크미엘니치크는 1653년 러시아에 충성을 할테니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다. 러시아의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처음에는 폴란드와의 충돌을 우려하여 이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5) 그러나 젬스키 소보르(6)는 폴 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힘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보고 개입하는 것이 좋다고 결정했고 알렉세이 역시 이 판단에 동의, 페레야슬라브조약을 통해 자포로제 코사크의 충성 맹세를 받아내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공격했다. 국력이 피폐해져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빌뉴스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이는 대홍수로 확대되었다. 

"자포로제 코사크들이 술탄에게 말한다!

" 너, 터키 악마이자 빌어먹을 악마들의 형제이자 친구, 루시퍼의 개인비서야. 넌 도대체 얼마나 극악한 기사길래 니 엉덩이에 붙은 고슴도치 하나 못죽이냐? 악마의 똥이자 네 쫄따구들이 먹는 짬밥같은 새끼. 너같은 개새끼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의 아들들을 상대하지 못한다. 우린 결코 너희 군대를 두려워 하지 않으며, 땅위에서나 물위에서나 승리해서 네 어미를 따먹고 말테다.

너는 바빌론의 설거지꾼, 마케도니아의 바퀴제작자, 예루살렘의 양조자, 알렉산드리아의 염소랑 비역질 하는 놈, 상하이집트의 돼지치기, 아르메니아의 돼지, 포돌리아의 도둑놈, 타타르의 남창, 까먀니쯔의 망나니, 그리고 이 세상과 저승을 통틀어 가장 돌대가리인 놈이다. 주님앞의 천치, 독사의 손자, 우리 거시기의 경련. 돼지코, 암당나귀의 엉덩이, 도살장의 똥개이자 이교도 대가리, 네 어미나 실컷 따먹어라!"

이것이 자포로제 분들께서 너같은 새끼한테 하사하는 답장이다. 너는 그리스도교인의 돼지를 몰 자격조차 못된다. 이제 우린 끝을 맺고자 하는데, 우린 날짜를 알지 못하고 달력도 갖고있지 않다. 달은 하늘에 떠 있고, 년도는 책에 쓰여있고, 날짜는 네놈이 있는 곳의 날과 똑같다. 그러니 우리 엉덩이에 뽀뽀나 해라
!"(8)

 <러시아의 첨병, 그리고 반항과 좌절>



 - 코사크 기병대를 묘사한 그림 -

  한편 15~16세기 들어와 또 다른 코사크족들은 모스크바 공국. 즉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돈 코사크라고 불려졌다. 러시아는 폴란드가 코사크족을 대했던 것 처럼 그들의 자치권을 보장해주고 대신 그들이 전쟁 시에 러시아를 위해 봉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전반적으로 돈 코사크와 러시아 모두 정교회를 믿었기에 큰 충돌은 없었다. 돈 코사크는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코사크 족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카프카스의 테렉 강유역, 시베리아, 아무르 강 및 우수리 지역까지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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