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渤海 건국초기의 대외 관계
게시물ID : history_52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渤海
추천 : 3
조회수 : 89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8/03 07:32:34

渤海 건국초기의 대외 관계 = Foreign Relations of the Early Years of Balhae (Foundation)

 

저자명 :  최영운

형태사항 : 70장. ; 26cm

학위논문사항 : 학위논문(석사)-- 동국대학교 : 역사교육전공 2008. 8

DDC : 951.0369

소장기관 :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초록

大祚榮은 高句麗 멸망 30여년 후 고구려 유민과 그 세력권이었던 靺鞨族을 중심으로 거란인 李盡忠의 亂을 계기로 현재 敦化市의 東牟山에서 698년 渤海를 건국하였다.
926년까지 지금의 북한지역과 중국 吉林省, 黑龍江省, 遼寧省 일부, 그리고 러시아 沿海州 남부에 세력을 떨쳤으며, 15대 왕이 재위하는 228년 동안 唐과는 130여회, 日本과는 48회, 新羅와는 4차례 국가간 왕래가 있었다.
渤 海와 동시기에 존재했던 중국의 왕조는 唐이었는데 唐代는 중국사에서 漢代에 형성된 中國 중심적 세계질서를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던 시기였다. 당시 唐과 新羅의 기존 세력과 突厥을 중심으로 渤海, 契丹, 奚族 등 여러 신흥 세력들 간에 생존을 위한 합종연횡의 활발한 외교전이 펼쳐졌다.
唐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백제에서 했던 방식대로 고구려 현지 지배를 위해 安東都護府를 설치, 당의 협력자를 행정장관으로 기용하는 羈縻支配 방식을 취하였다. 또한 반당적 고구려 지배층과 유민들을 唐 내지로 대거 이주시키는 강온 통치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大祚榮은 고구려 유민들을 중심으로 靺鞨의 乞四比羽 세력들을 흡수하여 동모산에서 698년 渤海 건국을 선포하게 된다. 당도 초기의 탄압정책에서 벗어나 705년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여 친선 관계를 희망하였다.
당 의 사신파견은 발해 高王의 활발한 외교정책의 결과였다. 즉 渤海 건국 후 돌궐과 통교하며 거란, 해 등과 관계를 맺고 당의 군사행동에 공동 대처하게 되자, 고립상태에 빠진 당은 결국 발해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발해와 당의 공식 외교수립은 713년 실현되었다. 唐은 渤海와 관계회복을 발판으로 營州 회복을 위해 동북방의 奚와 契丹에 대한 압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당시 발해는 당의 접근을 이용하여 對唐 무역을 확대하여 건국초기의 부족한 경제력 보완에 힘을 쏟았고, 또한 서방의 정세를 파악하여 주변국과의 관계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719년 즉위한 武王 大武藝는 高王의 안정적 대외정책을 기반으로 영토확장을 위해 활발하게 주변으로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무왕은 당의 돌궐 공격 요구를 거부하며 돌궐의 양해하에 말갈제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 것이다. 이에 唐은 거란 등에 대한 견제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오히려 세력 확장을 해가는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黑水靺鞨을 주목하게 된다.
당과 흑수말갈의 접근에 무왕은 양면공격을 우려해 王弟 大門藝로 하여금 흑수말갈을 공격케 하나, 당에 오랫동안 宿衛로 가있던 대문예는 여러차례 거부의 뜻을 밝히며 결국 唐으로 망명하게 된다. 대문예의 망명은 대외정책에서 무왕과 대결을 뜻하기도 하지만, 대내적으론 왕위계승을 놓고 형제간 심한 이견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왕위계승자였던 대무예의 장남 大都利行이 당에 宿衛로 있는 동안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해 차기 왕권 을 놓고 대립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망명한 대문예를 놓고 무왕은 당에 여러 차례 왕세자들을 숙위로 파견하는 등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하였으나 끝내 唐이 대문예를 감싸자 732년 9월 登州를 공격하게 된다. 당시 발해와 對唐 입장에서 군사적으로 한축이었던 거란은 당의 공격으로 크게 패한 상태여서 발해는 당의 군사적 행동을 미리 막을 필요가 있었고, 거란에 대한 간접 지원을 위해 등주를 기습 공격하였다. 또한 新羅와 唐의 외교관계 회복으로 신라가 당을 도와 발해를 공격할 가능성에 대비 할 필요도 있었다. 이러한 무왕의 등주공격은 성공하였고, 733년 발해는 거란을 지원하여 楡關都山에서 당을 격파, 또 다시 정세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발해와 신라는 초기에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무왕의 세력 확장을 경계한 신라는 羅唐戰爭이후 소홀했던 당과 관계회복을 시도하였으며 발해의 등주공격을 계기로 唐의 군사작전에 적극 동참하게 된다. 발해와 당과의 군사대결에서 渤海와 新羅간 대결로 넘어간 것이다.
신라가 渤海-唐 분쟁에 관여한 이유는 710년 말부터 발해의 영토 확장정책으로 긴장관계를 불러왔고 당의 군사지원 요청에 적극 화답해 발해의 세력 확장을 막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신라의 개입으로 당은 거란을 우선 집중 공격하여 무력화시켰고 고립상태에 빠진 渤海는 735년 唐과 화해를 맺게 돼 치열하게 전개된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끝을 맺게 된다.
발 해 초기 高王(大祚榮), 武王(大武藝)은 건국 초기 당의 위협으로부터 주변국과 군사-외교협력을 통해 당에 대해 당당한 독립국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했으며, 3대 文王(大欽茂)이 국가번영과 해동성국으로 나아가는 데 큰 기둥을 세운 것이다.


원글 - 참치샐러드김밥님의 http://blog.daum.net/yoosaea/47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