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젠하워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인도차이나 분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인도차이나의 전략적 의의
1954년, 7년반에 걸친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났다. 이 전쟁은 1946년 시작할 당시에는 하나의 지역적 <소란>에 불과했지만, 나중에는 많은 나라들이 개입해 들어갔다.
베 트남,라오스,캄보디아로 구성된 인도차이나의 전략적 중요성은 너무도 분명했다. 이 지역은 2차대전 이전에, 오랫동안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특히 베트남이 심각한 전쟁터였다. 베트남을 적의 손에 넘긴다는 것은 라오스나 캄보디아의 수백만의 국민들이 동시에 공산주의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태국에게는, 중공과의 사이에 완충지대였던 동부 국경이 공산주의의 침략의 위험에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뿐만아니라 버마와 말레이지아까지도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게되며, 나아가 동부 파키스탄이나 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적화 赤化 위험이 있었다.
20세기초 40년동안, 이 지역은 비교적 평온했다. 경제는 대체로 주석과 천연고무에 의존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이 지역에 진주, 완전히 지역을 장악했다.
종 전 후에 프랑스가 다시 돌아와 지배권을 다시 주장, 프랑스와 현주민들 사이에 마찰이 발생했다. 현주민들은 오랫동안의 외세 지배를 경험한 후, 독립을 절실히 갈망했던 것이다. 이 분쟁은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프랑스는 1950년까지 이곳에 강력한 정규군을 파견, 현지 정부군과 함께 반란군과 싸우도록 했다. 반란군은 호지명이 지도했다.
호지명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며, 그가 지휘하는 월맹군은 중공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통킹과 중부 베트남의 꽤 넓은 지역을 포함한 오지의 대부분을 월맹이 장악했다.
1951 년초, 나는 파리에 본부가 있는 나토군 사령관이었지만, 인도차이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토의 방위를 위해서는 프랑스가 좀더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어야 했는데,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전쟁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토를 도울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인도차이나 방위의 일부를 나토 회원국들이 부담하게 되면, 이러한 프랑스의 손실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인도차이나 전쟁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지역의 자유민을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한 것임을 자유세계가 분명히 인식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프랑스는 군사적 승리 이후, 곧 인도차이나 3국에 독립과 자결권을 부여할 것이라 공약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역대 프랑스 정부에게 이러한 공약을 자유세계에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거듭 호소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이를 공약하지 않았다. 특히 가장 깊은 관계에 있는 베트남에 대해서 이같은 공약을 하기를 주저했다.
프랑스가 이같은 공약을 자유세계에 하기를 꺼린 것은 이것이 전쟁의 주도권을 약화시키고, 특히 알제리를 포함한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해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 런데, 이같은 공약이 없는 이상, 인도차이나 전쟁은 당연히 프랑스와 애국 독립 세력간의 투쟁이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 스스로 이 문제를 유엔에 호소하여 적절한 조치를 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자유 우방은 프랑스 원조를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각국들도 이 지역의 정치적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전쟁을 해결할 책임이 자기 나라에만 있으며, 미국이 프랑스에게 자금과 물자를 제공하는 상황에서도, 프랑스는 자기들의 정책에 따라서만 이 자금과 물자를 사용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후 프랑스가 미국에게 적극적인 군사개입을 요청해 왔을 때에도, 어디까지나 프랑스군 사령관의 지휘에 따르는 군사원조였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약 15만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입었고, 소모한 군사비는 50억 달러에 달했다. 따라서 내가 취임할 당시 프랑스는 이 전쟁에서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인 도차이나에서 싸우고 있는 프랑스인들은 자기들의 희생이 프랑스의 이익이 될 것이라 믿었지만, 프랑스가 다른 지역을 지배할 단계는 이미 지났다. 따라서 프랑스는 고민에 빠졌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프랑스가 전쟁을 계속하는 이유가 지역 지배에 대한 야망때문이라 비난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바오 다이는 형식적인 베트남 원수로 지도력이 없었고, 조국에서 공산주의와 싸우기 보다는, 유럽의 온천에서 향락의 나날을 보내는 날이 더 많았다.
1953년말부터 한국전쟁 휴전의 영향이 인도차이나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중공이 이 지역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지만, 베트남전선에서 사용되는 무기와 탄약을 대량으로 원조했고, 많은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이 에 인도차이나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나바르 Henri Navarre 는 1953년, 이 전쟁을 명예롭게 끝내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수립했다. 프랑스군은 1954년말까지 55만으로 증강, 40만 미만으로 추정되는 월맹군을 1955년말까지 격파, 이후 전투를 현지 병력으로 수행할 계획이었다. 미국을 이를 돕기위해, 1953년 9월 30일, 프랑스에게 이미 약속한 원조 이외에, 연말까지 별도로 3억 8천 5백만 달러를 추가도 지원하기로 했다.
1953년 10월, 전황이 프랑스에게 그리 나쁘지 않았고, 프랑스군은 중부 베트남에서 월맹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1954년초 프랑스군이 월맹군 3개 사단에게 포위되는 등, 전황이 악화되었다.
나는 프랑스를 효과적으로 지원할 방안을 모색해 보았지만, 미국이 당면한 정세는 복잡했다. 가장 무난한 방법은 물자원조였지만, 이것이 이미 프랑스에 대해 실시하고 있던 원조였다.
출처- 세계의 대회고록 전집 18 아이젠하워, 한림출판사,1977, 187-189쪽
원글 - 파리13구님의 http://kk1234ang.egloos.com/2846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