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은 오-닝의 난 이전에 전란상태로 돌입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비교적 안정된 정권과 안정된 정권교체를 겪다 보니 중세를 이해 함에 있어서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일본 역사를 접함에 있어서도 전란은 정권교체기의 전유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이나 유럽과 같이 『중세봉건』의 영주들이 지배하는 구조에서는 서로간의 분쟁은 물론, 중앙의 지배력이 강력하지 못해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관동지방은 전국시대 이전에 이미 전란상태에 돌입했고, 아주 복잡한 투쟁을 보여주었다.
더욱 소급해 올라가면, 무로마치 막부 자체가 시작부터 남북조시대라는 전란상태로 시작해서, 그 후로도 이런저런 난(亂)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같은 시기의 조선의 눈으로 본다면, '무로마치시대 전체가 전란시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관동공방(칸토-쿠보-:關東公方)과 관동관령(칸토-칸레이:關東管領)
(※ 최대한 원어발음표기에 가깝게 하려고 합니다만, 저 역시 관동관령이니 관동공방이니 삼관사직이니 하는 발음이 입에 익어서... 대충 섞어 씁니다. ^^;;;)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쿄-토(京都)에 있게 되자, 관동은 그 아들 요시아키라(義詮)를 카마쿠라에 두고 동국(東國)을 제압코자 했다.
그러나 요시아키라는 쿄-토로 올라가 2대 장군에 취임하게 되고, 대신 요시아키라의 동생이자 타카우지의 차남 모토우지(基氏) 카마쿠라로 내려온다(1349년).
이것이 관동공방의 시작으로, 이 보좌역으로 우에스기 노리아키(上杉憲顯)를 관동관령에 보임했다.
그 후 관동공방은 모토우지-우지미츠(氏滿)-미츠카네(滿兼)-모치우지(持氏)로 이어진다.
우에스기 젠슈의 난(上杉禪秀の亂)
우에스기 젠슈 우지노리 [VS] 카마쿠라쿠보-(모치우지), 막부 원군
관 동관령이었던 우에스기 젠슈(上杉禪秀:우지노리(氏憲))가 카마쿠라쿠보-(鎌倉公方) 아시카가 모치우지(足利持氏)와 점점 관계가 나빠지더니, 오-에이23년(應永23:1416)에 반 아시카가 세력을 결집, 모치우지에 대해 모반을 일으킨 것이 우에스기 젠슈의 난이다.
젠 슈편의 주요 맴버에는, 시모우사의 치바 카네타네(下總 千葉兼胤), 코-즈케의 이와마츠 미츠즈미(上野 岩松滿純), 시모즈케의 나스 스케유키(下野 那須資之), 카이의 타케다 노부미츠(甲斐 武田信滿) 등과, 사타케(佐竹), 타이죠, 우츠노미야(宇都宮), 오가사와라(小笠原) 등 많은 동국무사가 참여했다.
젠슈는 모치유지와 사이가 나빴던 숙부 미츠타카(滿隆)을 옹립하고 카마쿠라의 모치우지 저택을 급습했다.
모치우지는 카마쿠라에서 도망쳐, 한때 젠슈편이 우세했지만, 막부가 모치우지를 지지하여 스루가의 이마가와 노리마사(駿河 今川範政) 등에게 출진을 명하여 젠슈등을 토벌시켜 난은 진압되었다.
에이쿄-의 난(永享の亂)
카마쿠라쿠보-(모치우지) [VS] 칸토-칸레이(노리자네), 막부군
이누카케 우에스기(犬懸上杉)의 우지노리(氏憲)가 일으킨 우에스기 젠슈의 난(上杉禪秀の亂)을 진압한 관동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足利持氏)는 그 후, 관동공방정권의 독자성을 강화한다.
난과 관련되어 있고, 막부의 원조를 받는 쿄-토부치슈-(京都扶持衆)의 주요맴버인 야마이리(山入), 코구리(小栗), 우츠노미야, 모모이(桃井) 등을 적극적으로 토벌했다.
쿄-토부치슈에는 나스, 타케다, 다이죠, 시라카와(白河) 등도 속하지만, 이들은 막부에 보호를 요청하여 용서받았다.
막부는 모치우지를 견제하기 위해 젠슈파, Anti모치우지파 등을 보호했다.
모치우지는 권력을 강하고, 장군 요시모치(義持)와 대립, 막부에 대한 반항을 계속했다.
장군 요시모치가 죽고(1428년), 뒤를 이은 義量마저도 얼마후 죽자, 장군의 자리가 비게 된다.
이 틈을 노려 모치우지는 쿄-토출진계획을 꾀하지만, 에치고 우에스기(越後上杉)씨 국인층들에 의해 막부에 알려지게 된다.
이에 막부측은 천태좌주 대승정(天台座主大僧正) 요시모치의 동생 義圓을 환속시켜 요시노리(義敎)라 칭하여 1429년, 6대 장군으로 취임한다.
이때 연호가 에이쿄-(永享)로 바뀌지만, 모치우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쇼-쵸-(正長)란 연호를 계속 사용했다.
모치우지는 장군취임 하례사절도 보내지 않았고, 요시노리는 후지산유람을 핑계로 관동을 위협한다(永享4年).
더욱이 시나노슈고(信濃國守護)를 두고 요시노리파인 오가사와라 마사야스(小笠原政康)에 대해, 모치우지가 무라카미 요리키요(村上賴淸)을 지원했다.
에이쿄-10년, 모치우지는 장남 카타오-마루(賢王丸)의 원복(元服) 때에, 장군의 이름에서 한 글자 받는 전통도 따르지 않는다.
이 에 모치우지와 요시노리의 사이에서 충돌을 피하게 하고 모치우지에게 간언을 하던 관동관령 우에스기 노리자네(憲實)도 모치우지가 노리자네를 토벌한다는 풍문이 있자 카마쿠라를 떠나 자기 분군(分國)인 코-즈케로 물러나, 히라이(平井)성에 틀어박힌다.
결국 모치우지는 노리자네 토벌을 위해 무사시 코-안지성(高安寺城)을 출진한다.
이에 장군 요시노리는 모치우지 토벌을 결심하고 우에스기를 지원하여 에이쿄-의 난(永享の亂)이 일어난다.
모 치우지는 사가미 에비나성(相模 海老名城)을 거쳐 카마쿠라로 들어가고, 막부는 스루가 이마가와, 시나노(信濃) 오가사와라, 다테(伊達), 아시나(蘆名), 유-키(結城) 등에게 출진을 명하고, 많은 전통적 관동무사들이 노리자네와 막부군을 따르게 되어, 무사시부츄-(武藏府中)에 있는 모치우지를 공격한다.
결국 모치우지가 전투에 패해 붙잡히고, 유패되었던 카마쿠라에서 자결함으로써 관동공방에 의한 관동지배는 종식된다((永享10년).
유-키합전(結成合戰:1440~1441)
유-키 우지토모, Anti우에스기파 [VS] 우에스기, 막부군
에이쿄-의 난이 끝나고 노리자네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山內上杉)家의 가독(家督)을 에치고에 있던 동생 키요카타(淸方)에게 물려주고 출가한다.
그러나 키요카타 이후 관동의 정세는, 관동 아시카가파와 우에스기파의 대립이 격화되고, 유-키 우지토모(結成氏朝)가 모치우지의 어린 두아들을 받들어 막부와 우에스기에 반대하는 세력을 모아 봉기한다.
이것이 유-키합전(結成合戰)으로, 그 구성을 살펴보면...
유-키(結成)편: 시모즈케의 우츠노미야(下野 宇都宮), 히타치의 사타케(常陸 佐竹), 오다(小田)일족인 筑波, 코-즈케의 이와마츠(上野 岩松).
우에스기(上杉)편: 아와/카즈사/에치고(安房/上總/越後) 등지의 군세, 시모우사의 치바씨(下總 千葉). 그 외 막부군.
유 키 우지토모는 자결하고 유-키성은 함락되지만(嘉吉원년), 그 후에도 Anti우에스기 세력은 여기저기서 작은 싸움을 일으키는 등 관동 정세는 불안정한 상태 그대로였고, 장군 요시노리가 암살되는 카키츠의 난(嘉吉の亂)까지 일어난다. (카키츠의 난은 본 홈페이지 내의 오우치 역사 참조 바람)
쿄-토쿠의 대란(享德の大亂)
카마쿠라쿠보-(시게우지) [VS] 막부토벌군
노 리자네의 아들 노리타다(憲忠)은 아버지와 함께 출가했었지만 가재(家宰:가문의 재상)이자 슈고다이(守護代)인 나가오 카게나카(長尾景仲)등의 강한 요청에 의해 분안 3년(文安3:1446) 환속하여 무사시슈고(武藏守護)에 보임되고, 1448년엔 관동관령(關東管領)에 취임했다.
모 치우지의 넷째아들 아시카가 시게우지(足利成氏)는 유-키성이 함락될 때 쿄-토로 끌려가, 형 야스오-마루(安王丸) 하루오-마루(春王丸)는 목이 잘렸음에도 너무 어려서 죽음을 면하고(永寺丸), 막부에 의해 카마쿠라에 내려와 호-토쿠 원년(寶德元年:1449년) 관동공방에 취임한다.
평화도 잠시, 아버지를 죽인 원한이 깊은데다 권력강화를 두고 시게우지와 우에스기 노리타다(上杉憲忠)는 격하게 대립하여, 노리타다가 잠시 나나자와성(七澤城)에 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1454년, 노리타다는 카마쿠라에서 시게우지에게 모살당한다.
막부측(당시 장군은 요시마사(義政))은 시게우지의 관동공방 직위를 박탈하고 토벌군을 내려보냈다.
1455년 시게우지는 카마쿠라를 버텨내지 못하고, 시모우사의 코가(下總古河)로 자리를 옮긴다. 이른 바 코가쿠보-(古河公方)의 시작인 것이다.
이 해에 연호는 코-쇼-(康正)으로 바뀌지만, 코가공방 쪽은 쿄-토쿠(享德)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한다.
막부로써는 자기들이 인정하지 않은 관동공방(코가)의 존재를 의식하여, 장군 요시마사의 동생을 환속시켜 카마쿠라에 내려보낸다.
그것이 아시카가 마사토모(政知)로, 마사토모는 카마쿠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즈 호리고에(伊豆堀越)에 거처하며 호리고에쿠보-(堀越公方)라 불린다.
막부는 노리타다 이후 빈자리이던 관동관령과 무사시슈고에 노리타다의 동생으로, 아버지인 노리자네의 에치고 영지를 물려받은 후사아키(房顯)를 취임시켰다.
후 사아키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의 당주가 된 것은, 당시 후지아키가 막부에 출사하고 있어서 쿄-토(京)와의 연결끈이 있었던데다, 오-기가야츠(扇谷) 우에스기 모치토모(持朝)나 야마노우치의 가재(家宰)인 나가오 카게나카등의 옹립 움직임 때문이었다.
후사아키는 코가쿠보- 시게우지와의 싸움으로 세월을 보내다 이카고의 진(五十子の陣)에서 죽는다(33세).
막부는 하사아키의 뒤를 에치고 우에스기 후사사다(房定)의 아들 아키사다(顯定)가 잇도록 결정하여 관동관령과 무사시슈고를 겸임하게 되었다.
아키사다 역시 이카고에 재진(在陣)하며 시게우지와 싸우는 일이 많았다.
(※ 책에 따라 五十子가 이카고, 이카츠코라고 읽힙니다만, 이카고로 통일합니다)
이때 관동의 판도를 간단히 말하면,
막부공인 호리고에 공방: 이즈 일국지배
막부비공인 코가공방: 히타치, 시모즈케, 시모우사, 카즈사, 아와.
양 우에스기: 코-즈케, 무사시, 사가미.
나가오 카게하루의 난(長尾景春の亂)
나가오 카게하루, Anti우에스기호족, 코가쿠보- [VS] 양 우에스기세력, 호리고에쿠보-
원 래 우에스기家는 무로마치 막부를 새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의 어머니가문으로, 막부의 친족으로써 번영을 누리며 야마노우치(山內), 오-기가야츠(扇谷), 이누가케(犬懸), 타쿠마(託間) 4가문으로 나뉘어, 교대로 관동관령에 취임했다.
하지만, 이누가케와 타쿠마는 쇄퇴하고 야마노우치와 오-기가야츠가 번영하여 양(兩)우에스기라 불린다.
야마노우치 우에스기의 家宰는 나가오 카게나카의 뒤를 이어 나가오 카게노부(長尾景信, 호는 昌賢(쇼-겐)).
오-기가야츠 우에스기의 家宰는 오타 스케키요/토칸(太田資淸/道灌) 부자.
이 家宰들이 양 우에스기가문을 버티는 존재였다.
그런데 카게노부가 죽자 아키사다는 나가오家의 두령자리를 카게노부의 동생인 타다카게(忠景)에게 잇도록 했다.
카게노부의 아들인 시라이(白井)의 나가오 카게하루(長尾景春=伊玄:이겐)가 이 결정에 반발하여 거병한다.
이것이 나가오 카게하루의 난으로, 무사시, 코즈케, 사가미 국내에서 막부와 양 우에스기/호리고에쿠보-(堀越公方)에 반발하는 재지호족(在地豪族)들이 가담하고, 코가쿠보-세력과도 연합되어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카게하루의 거병은 쿄-토에서 일어난 오-닝(應仁)의 난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카게하루는 시라이성에서 거병했으나 무사시 하치가타성(武藏鉢形城)을 본거지로 한다(文明7년:1475)
거병은 했으나 카게하루로썬 오타 도칸의 포진으로 쉽게 행동할 수 없었다.
그 러나 도칸이 스루가 이마가와(駿河今川)의 가독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슨뿌(駿府)로 향하자, 카게하루는 이카고의 진을 포위/공격하고, 야마노우 우에스기의 아키사다, 오-기가야츠 우에스기의 사다마사(定正), 나가오 타다카게는 코-즈케 나하노쇼(那波莊)으로 패주한다.
이것이 이카고의 싸움이다.
이카고전선이 카게하루에 의해 무너지자 무사시 국내에까지 전화가 번졌으나 도칸에 의해 진압되었다.
무로마치막부는 코-즈케에 본거지를 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에, 에치고 우에스기를 원군으로 붙여 양방향에서 코가공방을 견제했다.
남쪽에서는 사가미슈고인 오-기가야츠 우에스기에 명하여 코가공방에 대항하는 포진을 만들게 했다.
분메이 10년(文明10:1478) 11월 장군 요시마사(義政)는 이즈(伊豆)의 호리고에 공방 아시카가 마사토모(足利政知)의 처우를 조건으로 나리우지와 화해한다.(都鄙(토히)合體)
코가에 어소를 마련한 나리우지로써도 카마쿠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이었다.
이로써 쿄-토쿠의 대란은 종결된다.
쵸-쿄-의 대란(長享の大亂)
야마노우치(山內) [VS] 오-기가야츠(扇谷), 코가쿠보-(나리우지), 나가오 카게하루
분메이 18년, 오타 도칸이 주군인 사다마사에게 암살당한다.
도칸의 활약으로 오-기가야츠 우에스기 세력이 커지자,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아키사다가 사다마사를 꾀어 일어난 일이었다.
도칸 사후, 야마노우치와 오-기가야츠의 대립심화라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고, 쵸-쿄- 2년(1488)년 1월 사다마사가 코가공방(나리우지)와 나가오 카게하루와 손을 잡음으로써, 균형은 깨어지고 사태는 되돌릴 수 없게 된다.
같 은해 2월, 선제 공격에 나선 야마노우치 아키사다는, 사다마사의 거성 사가미 카스야(糟屋)를 습격하기 위해 출진하고, 이에 맞아 사다마사는 무사시 카와고에(川越)에서 출진, 사네마키하라(實蒔原)에서 양군이 조우하여 사다마사가 승리하였다.
6 월에는 스가야하라(須賀谷原)에서 전투가 벌어져, 우에스기 사다마사, 토모요시(朝良:사다마사의 양자)와 아키사다, 노리후사(憲房: 아키사다 양자)가 싸워 초반엔 사다마사가 불리했으나 나가오 카게하루의 활약으로 사다마사가 승리하였다.
11월 타카미하라(高見原)에서 다시 양쪽 세력은 맞붙어, 우에스기 사다마사, 토모요시, 마사우지(政氏:나리우지의 아들)의 원군, 카게하루의 원군과 우에스기 아키사다, 노리후사가 싸워, 이 또한 사다마사가 승리하였다.
엔 토쿠 3년(延德3:1491) 호리고에공방 아시카가 마사토모가 죽고 챠챠마루(茶茶丸)가 뒤를 이었지만, 이마가와 배하의 이세 소-즈이(伊勢宗瑞: 호-죠- 소-운)가 호리고에고쇼(堀越御所)를 공격하여 멸하고 이즈 일국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사다마사는 야마노우치 압박을 위해 신흥세력인 소-즈이와 손을 잡는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오-기가야츠 세력을 신장시켰지만, 장기적으론 소-즈이의 관동진출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기가야츠가 야마노우치를 멸하고 승리할 수도 있었겠지만, 오-기가야츠의 사다마사는 거친 물을 건너다 낙마사고로 메이오- 3년(明應3:1494)에 죽고, 양 우에스기의 세력관계는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다음해 소-즈이는 오오모리 후지요리(大森藤賴)를 몰아내고 오다와라성을 손에 넣음으로써 관동에 착착진행, 에이쇼- 원년(永正:1504)에는 야마노우치 아키사다와 직접 교전하기에 이른다.
이 전투가 바로 타치카와하라(立河原) 전투로... 사다마사의 뒤를 이은 토모요시가 카와고에성에 틀어박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사다마사 사후의 세력변화를 말해주는 것으로, 이 궁지를 타파하고자 동맹관계인 이마가와 우지치카(氏親)와 이세 소-즈이가 원군으로 달려온다.
이를 파악한 아키사다가 카와고에 포위를 풀고 이동하여 타치카와하라에서 큰 조우전이 펼쳐졌다(승패는 가르지 못함).
하지만 에이쇼- 2년 , 이세 소-즈이의 태두에 토모요시는 위기감을 느끼고 야마노우치 아키사다와 화해한다.
그러나 아키사다는 의외의 사태로 죽음을 맞이한다.
에치고 슈고다이家의 나가오 타메카게(爲景)가 하극상을 일으켜 주군인 우에스기 후사요시(房能)를 공격하여 죽게 만든다.
후사요시의 형이자 당시 관동관령이었던 아키사다는 타메카게 토벌군을 이끌고 에치고로 출진하지만, 오히려 타메카게에게 패하여 죽고 만다.
이 사태는 이세 소-즈이의 관동진출에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줬다.
곤겐야마(權現山) 전투에선 오-기가야츠 토모요시와 야마노우치 노리후사가 힘을 합쳐 파죽지세의 소-즈이에게 대패배를 겪게 하지만, 때는 너무 늦어 관동의 쟁란은 호-죠- 5대 100년과 함께 전국시대로 돌입한다.
그 후 코가쿠보-, 오유미고쇼(小弓御所)
호리고에쿠보-는 2대만에 멸망하였지만, 코가쿠보-는 나리우리의 뒤를 마사우지(政氏)가 이었고 우에스기에서도 이를 지지했다.
하지만 마사우지의 아들 타카모토(高基), 요시아키(義明)가 이에 반발한다.
우에스기의 조정으로 부자는 잠시 화해하지만, 이세 소-즈이의 획책도 있고 해서 다시 대립한다.
에이쇼- 9년(永正9:1512), 마사우지가 코가를 떠나 시모즈케에 도망침으로 해서 타카모토가 제3대 코가쿠보-가 되었다.
그 후 코가쿠보-는 타카모토-하루우지(晴氏)-요시우지(義氏)로 이어진다.
시모우사의 오유미성(小弓城)의 하라(原)씨와 영지분쟁을 하던 마리야츠(眞里谷)성주 타케다 유키카네(武田怒鑑)는, 마사우지와의 불화로 한 때 오슈(奧州)로 도망가 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카즈사로 맞아들여 구심점으로 삼고, 오유미성의 하라씨를 멸한 후, 타케다의 후원으로 오유성에 요시아키가 들어가 오유미고쇼(小弓御所)라 불린다.
허나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요시아키는 제멋대로가 되어 점차 타케다 유키카네와 불화하여 결국 유키카네를 죽게 한다.
이에 타케다家는 내분이 생기어 본가의 노부타카(信隆)와 배다른 동생 노부마사(信應)가 가독싸움을 하게 된다(1537).
노부마사는 마리야츠성에 거처하며 오유미고쇼와 손을 잡았고, 노부타카는 미네가미성(峯山城), 햐쿠슈성(百首城)에 거처하며 호-죠- 츠나시게(北條綱成:2대)에게 지원을 구했다.
오유미성을 나온 요시아키는 미네가미성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당시 호-죠-편이었던 사토미 요시타카(里見義堯)는 갑자기 오유미고쇼편이 되어, 이윽고 싸움은 호-죠- [VS] 오유미/사토미 연합군의 양상이 되었다.
미네가미성은 함락되고 노부타카는 호-죠-로 도망쳤으나, 텐분 7년(天文7: 1540) 츠나시게는 시모우사 코-노다이(國府台)에 출진하여 오유미고쇼/사토미 연합군과 싸운다.(1차 코-노다이 전투)
이 전투에서 관동호령의 야망을 가지고 진두지휘하던 요시아키가 전사하고, 호-죠-의 승리로 끝나, 요시타카는 아와(安房)로 물러났다.
다음해인 텐분8년, 코가쿠보- 아시카가 하루우지(晴氏)는 츠나시게의 딸과 혼인하고, 나중에 그 뒤를 이은 요시우지(義氏)도 호-죠- 우지야스(氏康:3대)의 딸과 혼인하는 등, 코가쿠보-는 호-죠-세력을 바탕으로 유지된다.
하 지만, 하루우지가 카와고에 전투에선 양(兩)우에스기세력과 연합하여 우지야스에게 대항하지만, 패전 후 유패되고, 요시우지는 이복동생 후지우지(藤氏)/에치고 우에스기(겐신)와 대립하여 각지를 유랑하는 신세가 되는 등, 비운을 맞는다.
우 지야스 최대의 위기라 할 수 있는 카와고에 전투에서, 당주 토모사다(朝定)의 죽음으로 오-기가야츠 우에스기는 멸망하고, 야마노우치의 노리마사(憲政)는 타격을 입고 점점 우지야스에게 밀리다가, 결국 에치고의 나가오 카게토라(長尾景虎= 우에스기 겐신)에게 도망치고, 우에스기의 성(姓)과 관동관령직을 양도했다.
노리마사는 겐신 사후 일어난 가독싸움(오타테의 란:御館の亂)에 휘말려 죽고 만다(오타테의 란에서 御館이 노리마사의 저택을 뜻함).
요시우지는 에치고 우에스기와 호-죠-의 동맹으로 복귀되지만, 혼노지의 변이 있던 1582년, 후계자 없이 죽는 바람에 코가쿠보-는 단절된다.
(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부활되어 키츠라카와(喜連川)씨를 칭한다)
이로써 관동쟁란의 중심에 있던 관동공방과 관동관령 우에스기의 존재는 사라지고 만다.
P.S:
많은 책과 홈페이지를 참조하여 몇날몇일 정리하여 만든 글입니다.
분량과 출연진이 엄청나군요. ㅡ.ㅡ;;;
어깨가 뻐근하고 엉덩이가 아플 정도였지만, 우리나라에서 한글로는 아직 이런 내용이 유일무이한지라 뿌듯하군요.
자료의 한계로 인해 東京堂출판사의 슈고/센고쿠다이묘사전, 전국대명성곽사전의 경우, 그 책의 표현을 그대로 번역해 옮긴 문장들도 있다는 점을 밝힙니다.
(하지만 그 책이 아닌 다른 자료들을 정리한 분량이 더 많지요)
원글 - 아케치경감님의 http://halmi.egloos.com/589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