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페리온 외곽 방어선]
아래 세방향으로 뻗어 나간 칼날같은 특공대의 문양. 그리고 그 이상가는 상징과 마찬가지인 푸른색 도장.
협곡끝에 추락한 히페리온을 중심으로 벙커와 미사일 터렛, 엄폐호가 효과적으로 얽힌 방어선이 형성된다.
레이너특공대에 소속된 일류 건설로봇 조종사들은 히페리온이 자체적으로 보유한 적은 자원만으로 이만한 시설을 완성했다.
레이너특공대 해병. 그들은 언뜻 무질서로 착각될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전투지역에 배치된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공성전차나 망령전투기 같은 중장비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방어선의 일부가 된 밀폐된 연구소 뒤편.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레이너가 협곡지대를 살폈다.
옆에 선 타이커스가 킬킬 웃었다.
"자 지미 상황을 정리해 볼까? 이건 꼭 무시무시한 괴담같군. 기함은 이유없이 추락하고 지원 함선들도 나자빠졌어. 오갈수도 없는 요상한 행성에 갖혀서, 규모도 알수 없는 저그를 상대해야 되겠군."
레이너가 씨익 웃었다.
"뭐 살면서 종종 있는 일이지. 일단 한번 붙어보자고."
레이너가 엔지니어들과 히페리온의 내부에서 복구 작업을 수행하던 함장을 호출했다.
"맷. 현재 상황은 어떻지?"
그의 전투복 스크린으로 함교에서 작업중이던 맷 호너의 얼굴이 나타났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부터 전해드리죠.
스크린 바깥으로 정찰 화면이 나타났다.
계곡 너머 이제 대놓고 성장을 시작한 저그 군락지가 드러났다. 땅 아래 피막날개를 접거나 군락지 상공을 날아다니는 뮤탈리스크 무리가 보였다.
맷이 말했다.
-히페리온과 저그 군락지 방향으로 협곡이 늘어서 있습니다. 이 천연 방벽 덕분에 지상방어는 당장 안심해도 될듯 합니다. 이제 나쁜 소식을 전해 드리죠.
레이너는 좋은 소식이 짧다고 느꼈다. 맷의 말이 이어졌다.
-뉴폴섬 특공대의 강하가 실패한건 다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레이너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입맛이 썻다.
스완과 화해한지 얼마후 였다.
히페리온이 추락한 후, 우주에서 대기중이던 특공대 소속 전투순양함 두척이 일제히 강하를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감옥행성 뉴폴섬에서 구출된후 많은 이들은 레이너 특공대에 지원했다.
그후 여러 선발 과정을 거쳐 합류한 자들이었다.
대부분 소형함 운용 경력만 있기에, 부족하지만 일단 연습항해와 함대전 지원이라도 가능한 두 함선이었다.
사건은 아이러니 하게도 맷 호너의 안전대책이 발단이었다.
그는 뉴폴섬에서 탈출후 특공대에 들어온 자들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
그렇기에 히페리온을 중심으로 새로운 보안통신 체계를 마련했다.
그것을 요약하자면, 히페리온의 암호화된 메인 통신기 주파수를 제외한 모든 명령, 긴급통신 까지도 무조건 차단하라는것 이었다.
그것은 전투상황시 비효율적 체계였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을 들여 신뢰를 우선 확보하자는 호너의 의견은 분명 타당했다.
우주궤도에서 대기하던 두척의 전투순양함은 강하한 히페리온에서 갑자기 연락이 끊기자 당황했다.
협곡 근방에 추락한 히페리온을 찾았다. 아래에서 기타 통신설비를 이용한 연락이 들어왔다. 자치령의 함정이라는 의심을 피할수 없었다.
그들은 저그와,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히페리온을 파악했다.
레이너가 없는 특공대는 성립할수 없었다.
두 함장은 오랜 토론끝에 현재 히페리온이 격추, 추락하고 강력한 방해전파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들은 더 늦기전에 중장갑 전투순양함을 동원, 무력 강행구출을 결정했다.
결과는 앞선 대형 수송선, 그리고 히페리온과 같았다.
전투순양함 두척은 갑작스럽게 기동불능. 자치령 기지쪽 보이지도 않는 평원 너머로 추락했다.
기함이 파괴될시, 도망쳐 훗날을 도모하라는 약속이 부족했던게 분명했다.
레이너는 고전적이긴 해도 히페리온의 함체 위쪽에 대기명령이라도 페인트로 써놓을걸. 후회했지만 한발 늦은 뒤였다.
특공대에게 긴급 구조임무가 추가됬다.
자치령 기지로 향하는 수송선에 올라탄 스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했다.
"젠장 역시 그 수정이 히페리온을 구한게 맞군."
안타깝지만 지난일일 뿐이다.
부디 이 행성에 내려온 것이 전투순양함 두척만한 가치가 있기를.
레이너는 우선 맷의 나쁜 소식에 집중하기로 했다.
맷이 말했다.
-주요 관측설비가 사용불가이기에 저그 규모의 확실한 파악은 어렵습니다. 다만 지상 공격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뮤탈리스크 공습을 준비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좋은 소식에 비해 나쁜 소식이 길었다.
자체적인 어마어마한 무게와 충격. 협곡끝 땅속과 연구소를 파고든채 움직이지 못하는 히페리온.
하단부에 늘어선 무기고 입구가 땅속에 잠겼다.
덕분에 건물 설비는 물론 중장비를 꺼내는것도 불가능했다.
수동으로 그것을 여는건 둘째 문제였다.
자치령 생존자들의 지도자료를 검토결과 땅을 파자는 의견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또한 전술 출격편대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레이너가 물었다.
"그들을 수리할수 있나?"
-외부에서 가능하지만 방어선 구축이 우선입니다. 빠르게 사용가능한 중장비는 수송편대 뿐입니다.
"뭐, 잘하면 도망은 칠수있겠군."
또한 부족한 자원으로 벙커방어선 형성도 빠듯했기에 본격적인 대공망 구축도 불리했다.
물론 코프룰루 최정예 미사일 터렛 조종사와 특공대 해병, 거칠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한 용병들이있었다.
하지만 부족한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특공대는 지금껏 가능하다면 중장비를 동원해, 병력 피해를 최소화 하는 급습을 선호했다.
"힘든 싸움이 되겠군."
레이너는 솔직히 평했다.
그는 겨우 이런 외딴행성에서. 역경을 함께한 특공대원을 단 한명도 잃고싶지 않았다.
전방을 감시하던 붉은 비상센서가 울렸다.
특공대 해병들의 개인 스크린에 레이너의 얼굴이 나타났다.
하지만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그가 있었다.
최고 사령관은, 항상 최전선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들과 함께 했다.
그는 전투에 앞서 긴 연설을 하는 대신, 힘있는 목소리로 간단히 소리쳤다.
"자 특공대! 손님들이 몰려온다. 벙커문들 꽉 잠궈!"
크라첼은 바이저의 망원경 기능을 켰다.
날개달린 괴물로 이루어진 하늘 한켠이 서서히 가까워진다.
그것을 질린듯 눈에 담던 크라첼 병장은 한 특공대 소속 해병의 다그침에 급히 벙커로 들어갔다.
"이봐 벙커문은 그렇게 닫는게 아니야!"
맥과 크라첼은 잠시 허둥대다, 문을 닫았다.
월리엄 일병은 이곳에 없었다. 방금전 일이 생각났다.
덩치가 크고 한손에 거대한 기계팔을 장착한 수염난 사내가 자신들을 찾아왔다.
크라첼은 오해속에 착각했다.
'저 자가 고문기술자 인가!'
그들은 깨어난 직후 맥의 불길한 예상이 정말 맞아떨어지는줄 알았다.
"이 반란군들이 샹크투스를 찾은건 사실 꿍꿍이가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를 치료한 것도 심문을 위한걸지도 모릅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전투순양함이 추락한 것을 이들이 그냥 넘길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뭔 생각들을 하는거야. 우리가 너희 자치령 같은줄 알아? 안 잡아먹을테니까 기지나 안내해!"
그는 레이너특공대 수석 기술자였고 팔 역시 기계 다루기에 특화된 도구일 뿐이었다.
그리고 월리엄이 나섯다.
"그 동안 근무하면서 기지에 대해 알아 두었거든요."
고문은 커녕 자신들을 치료해준 청년 의무병은 간단한 약까지 처방해주었다.
맥 상병과 크라첼 병장. 그들은 잠시후 방어작전이 시작된다는 소식에 강렬한 책임감을 느끼며 방어전에 자원했다.
그리고 이곳에 온 순간부터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화면에서 툭하면 등장하는, 지나치게 유명한 반란군 수장 레이너(영화보다 인상이 훨씬 부드러웠다.)가 일선에서 너무 자주 보였다.
그가 엄연한 적군인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등을 두드리고 지나간다.
자신들을 구하다 추락한 전투순양함.
분명 소중할 저 함선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는것 역시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다른 특공대원들 역시 그들을 딱히 괄시하지 않았다.
사실, 신경쓰기엔 자신들이 너무 하찮은게 아닐까.
우려와 다르게, 자신들을 총알받이로 내몰지도 않았다.
오히려 숙련도가 떨어지는 그들은 고참들과 함께 후방쪽 벙커에 배치됬다.
두 자치령 해병은 거듭해서 놀랐다.
약탈한 장비로만 무장했다던 소식과 달랐다. 그들의 무기는 너무도 훌륭했고 잘 정비되 있었다.
또한 곳곳에 들어본적도 없는 신형 기술들이 당연한듯 적용되 있었다.
벙커는 최전방 정예군에게나 허락되는 레일건 탄약 가속장치가 설치되 있었으며,
마찬가지 최근 새로 개발된 휴율적인 설계로 6명이 꽉 들어찰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 상식을 넘어서는 모습또한 갖추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뼈대가 더해진듯한 이런 튼튼해 보이는 벙커는 생전 처음보았다.
그렇기에 초짜나 저지를 문조차 제대로 못 닫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벙커에 울트라리스크를 넣어 강화했다는 말은 역시 장난일것이다.
아마도.
"문닫느라 고생했어. 이제 총은 쏠줄 알지?"
자신에게 농담을 건낸 특공대 해병의 말이 역시나 그냥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솔직히 크라첼은, 자신이 연구소에서 격은 전투가, 어딜가나 인정받는 영웅담으로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한 지금껏 어느 남자들 집단을 가든, 그는 기세에서 밀린적이 없었다.
하지만 여긴 달랐다.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크라첼은 자신을 전율시키는 경의로움을 느꼈다.
그들의 여유로운 얼굴 아래에 숨겨진 끝없는 노련함이 느껴졌다.
그는 그때 뮤탈리스크의 존재에, 장갑복이 완벽히 흡수한다 해도 굴욕적으로 오줌을 쌀뻔했다.
하지만 이 역전의 용사들은, 저 앞에서 떼로 몰려드는 뮤탈리스크의 존재에, 서로 몇마리나 잡을지 농담을 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그들은 지금껏 레이너 라는 남자와 무엇을 보고 어떤곳까지 가본걸까.
한가지 확실한건. 그 자신은 상상도 못할 일들을 격은 자들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투복에 저장된 저글링 사살수를 갑옷에 그릴까 잠깐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런 노련한 전사들 앞에서 훈장은커녕, 귀여운 장신구처럼 부끄럽게 느껴질것이 뻔했다.
그의 생각과 함께 전투는 다가온다.
그는 소총을 벙커 총안구에 설치하고 전방창을 주시했다.
뮤탈리스크가 보이기 한참 전부터 미사일은 이미 하늘을 갈랐다.
이상하게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들과 함께라면, 절대 죽지 않을것 같았다.
테켈리-리!
뮤탈리스크의 펄럭이는 날개짓 소리와 특유의 괴성이 하늘을 천둥처럼 뒤덮는다.
놈들이 소총 사거리에 닿는 순간부터, 벙커가 불을 뿜는다.
극초음속 관통탄이 하늘로 쏱아진다.
앞열에서 달려들던 뮤탈리스크의 얇은 피막날개가 찢어진다.
그들의 몸에 탄환이 박히고, 추락한다.
CMC 전투복의 대공 기능과 연동된 소총사격.
그리고 바이저의 광학 보정을 받은 전자동 사격은 뮤탈리스크의 몸통 한가운데로 정확히 빨려든다.
"와우!"
탄창 500발을 순식간에 비우며 뮤탈리스크를 추락시킨 크라첼은 짧은 환호를 질렀다.
드디어 저 악마같은 뮤탈리스크를 한마리 죽였다.
하지만 그는 두번째 뮤탈리스크를 떨어뜨리며, 그들의 사격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특공대원들은, 지금 소총을 점사로 끊어 사격하지 않는가!
크라첼은 또 한가지 놀라운 점을 느꼈다. 자신은 연발로 사격해 목표를 바꿀때마다, 보통 초탄 10발 내외는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그들의 사격은, 허공을 허무하게 가르는 낭비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에 찾아낸 위화감을 눈치채고 거의 질려버렸다.
그들의 점사가, 세번 내외로 뮤탈리스크를 한마리씩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것처럼 생각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상황을 파악했다.
그냥 지나치는 건물조차 처음보는 신기술이 당연한듯 적용된 레이너 특공대.
그들이 프로토스의 앞잡이 라는 선전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들의 장비나 CMC 대공사격 시스템은 자신보다 월등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중에야 그것이, 자신의 좁은 견문이 낳은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탄창을 재빨리 갈았다.
그리고 그의 수준에 맞게 눈앞으로 달려드는 뮤탈리스크의 몸통을 향해, 가우스 소총을 전자동으로 갈겼다.
벙커속 해병들의 가우스 소총과 단거리 미사일이 공중으로 끝없이 솟구쳤다.
인간의 기술을 가장 파괴적인 모습으로 다듬어낸 불꽃과 강철은, 공중의 붉은 날개들을 그야말로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들은 용감히 싸웠고 충분히 강했다.
하지만 몰려드는 뮤탈리스크의 날개짓은 멈추지 않았다.
땅으로 녹색 강산성 덩어리들이 끝없이 작렬했다.
벙커를 목표로 쐬기벌레들이 무리지어 달라붙는다.
동일한 규모의 자치령 부대라면 전멸할 수준에 이르러서야, 첫 번째 벙커가 터져 나갔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서 탈출한 6명의 해병이, M98 전투방패로 몸을 보호하며 날듯이 후퇴했다.
대원들의 바이저 화면으로 레이너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특공대! 파괴된 7번벙커를 엄호하라!
순식간에 근방의 백여개에 가까운 총구화염이 한 방향으로 집중됬다.
해병들을 덮치려던 놈들은 물론, 근방의 날개달린 것들은 모조리 벌집이 되 우수수 떨어진다.
미사일 포탑이 폭발하는 화염 너머. 6명의 해병들이 무사히 예비벙커로 도착했다.
그들은 도망치던 포탑 조종수를 주변 엄폐호에 던져넣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와 동시에 사격은 다시 주변 뮤탈리스크를 향해 흩어졌다.
크라첼은 전율하는 감각을 느꼈다. 그야말로 환상의 팀이다.
그들은 단 6명의 해병을 위해, 개개인의 생존을 위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자치령의 입장에서 체스말 하나도 되지못할 소수를 위해 모두가 함께 움직였다.
일선 전투부대의 상황은 그도 자세히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자치령 군법에 의하면, 폭발 직전이 아닌 이상 이런 병사 개별판단에 의한 벙커와 터렛 포기는 상당한 중징계감 이었다.
타 행성에 배치된 친구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비슷한 상황에 살아남은 역전의 해병 용사들을,
거의 트집에 가까운 모함으로 강제 재사회화 시킨다는 무시무시한 소문도 얼핏 접했다.
하지만 그들은 레이너 사령관의 명령하에 안전한 후퇴를 위한 장비 포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언뜻 비효율 적으로 느껴짐에도, 그것 이야말로 특공대가 자치령을 상대로 끈질기게 분투하는 비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마지막 한무리의 뮤탈리스크들이 미사일 세례에 누더기가 되서 추락한다.
크라첼은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살아남았다. 예감이 적중했다.
수도셀수 없는 뮤탈리스크의 공격을 격퇴했다! 그리고 세상에, 단 한명의 피해도 나지 않았다!
그의 전투복에 내장된 킬마크 센서를 확인했다. 처치한 뮤탈리스크 십수마리가 띄워져 있었다.
스스로 지우지 않는한 그것은 놀라운 결과로 남을 것이다.
크라첼은 뒤이어 바이저 너머로 반가운 얼굴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레이너 대장이다.
-수고했다 제군들. 손님들도 만족한듯 하군. 다들 잠깐쉰다.
크라첼은 생각했다. 역시 그 뮤탈리스크가 끝이 아니었다.
벙커를 출입모드로 개방후 바깥으로 나왔다.
맙소사. 수도 셀수없는 죽은 괴물의 날개가 지역을 덮어 씌울 정도였다.
대부분 협곡 아래로 떨어졌음에도 이정도였다.
방어선은 이제 벙커를 수리하고 새로 지으며,
뮤탈리스크의 잔해를 치우는 건설로봇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은 작업중 생기는 위험천만한 돌발상황에도 무심히 대화를 나누었다.
가끔 덤벼드는 쐬기벌레 정도는 순식간에 밟고 팔을 휘둘러 터뜨려 버렸다.
"이봐 툴라. 네 핵융합로에 한마리 붙었어."
"어? 어.... 좀 떼줘."
"시원하게 긁어주지."
'뭐 이런 건설로봇들이 다 있지? 총만 안들었지 배짱으로 치자면 전투병력 이상이지 않은가.'
이건 그가 평소 생각하던 건설로봇 조종사들의 이미지와 완전히 반대였다.
그때 한쪽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와아 대장님!"
"사령관!"
"몸 잘 풀었나 제군들?"
검은 CMC 전투복을 입은 레이너가, 쐬기벌레들을 무시무시한 불길로 지져버리는 거대한 화염방사병과 함께 걸어왔다.
그는 주변을 휘감는 불길은 별로 신경쓰지도 않는듯, 경례하는 대원들에게 여유롭게 화답하며 걸어왔다.
크라첼은 그 모습을 잠시 멍하게 쳐다봤다.
'이런 제기랄 멋지잖아?'
마치 같은 남자가 봐도 반할것같이 느껴졌다 .
그는 잠시후 붉은 전투복을 입은 크라첼병장을 지나치며 다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훌륭히 싸우더군 해병. 자네같은 용감한 대원과 함께라면 든든할텐데."
"아....감사합니다 사령관님!"
그는 뒤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특공대원들을 보지 못하며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인정받는 기분은 이렇게 좋은거였군. 아니 그런걸 생각하려 했던게 아닌데? '
'이런 맙소사.'
자신도 모르게 반란군 레이너를 '사령관님' 이라고 불렀다.
만약 이 이야기가 한 줄이라도 자치령 간부에게 흘러 갔다간 당장 재사회화 시켜 버리겠지.
그리고 그로 인해 동시에 떠오른 생각.
'복귀?'
그는 문득 얼굴이 일그러졌다.
알파소대. 그의 친구이자 전우들.
그 모든걸, 자신들을 이용해 저그를 확인한 순간 뒤돌아 보지도 않고 도망쳐버린 자치령 놈들.
그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차라리 레이너 사령관 같은 멋진 남자와 함께 하는게 훨씬 스릴넘치고 안전할 것이다.
생각하던 그는 다시 입을 벌렸다.
'내가 미쳤나? 왜 자꾸 이런 생각을 하는거지?'
혼란스러워 하는 크라첼의 전투복 통신기로 사령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맛보기일 뿐이며, 다음 공격은 더욱 거셀것이라 한다.
잠시후 크라첼은 맥과 함께,
이제 제법 친해진 같은 벙커의 특공대원들에게 전투 노하우를 듣고 있었다.
한쪽 얼굴이 산성액에 지져진 무시무시한 흉터를 가진 흑인 해병이 말했다.
그의 잃어버린 왼쪽 눈을 대신한 전자안구가 파랗게 번뜩였다.
"두터운 껍질에 빗기듯 쏘지 않게 조심해. 탄창은 순식간에 비어버려. 중추신경계를 외워봐."
그는 얼굴의 상처를, 행성 아이어 에서 맺은 동맹과 함께 저그를 막다가 생긴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저 노련한 용사조차 멀쩡한 오른쪽 눈동자. 그 깊은곳을 얼핏 스치는 감정을 모두 감추지 못했다.
크라첼은 그 일을 더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저그놈들은 그런 처음 들어보는 '아이어' 같은 볼품없는 촌구석 행성까지 참 징그럽게도 침입했구나 싶었다.
그가 짓궂게 웃었다.
"여자 마음과 똑같아. 연약한 부분을 노려야 먹히지. 잘만 맞추면 점사 한방에 넘어가게 할수있어."
머리를 보라색으로 물들인 다른 특공대 해병이 그를 향해 히히덕 거린다.
"요리는 몰라도 전투에 관한건 슈피겔의 조언이 쓸모있지. 우리중 최고참이니까."
그 밖에도 근거리 난전이라면 사격 보정 모드를 끄는게 더 낫다는 등, 짧은 시간임에도 유용한 대화를 들을수 있었다.
크라첼은 여기서는 당연한 이런 정보들이 신선했다.
'초짜'인 자신에게도 유용하겠군.
슈피겔이 마무리 하듯 말했다.
"뭐든 경험이 중요해. 이 가우스 라이플보다 손을 타는 무기도 또 없지. 실전에서.... 아 벙커말고. 진짜 실전에서 탄창 오백개 정도 비워보면 슬슬 감이 와. "
그가 빙글 웃었다. 뜻밖에 그 무서운 인상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만약 안 온다면 삼백개 더 비우던가, 그래도 안 된다면 운을 믿고 그냥 사격 보조기능에 의지해, 제일 좋은건 일부러 사고라도 쳐서 제대하는거지."
맥이 그럴싸 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가지 더 중요한 비밀을 알아냈는데, 그것은 그들이 대공사격시 사격보조기능을 켜지 않는다는 것이다.
맥과 크라첼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탄창을 500개쯤 비워보면 알지도 몰랐다.
[히페리온 함교]
레이너는 히페리온 함교까지 걸어가 맷을 만났다. 기술자들이 함선 곳곳에 흩어져 작업중 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장님."
"고맙네 맷. 안쪽 일은 잘 되가나?"
함장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외부 발전기로 전력을 공급해 봤지만 마치 스며들듯 사라집니다. 좀 성급한 결론일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이건 우리.... 아니, 인류의 기술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것 같습니다."
레이너도 표정을 굳혔다. 맷 같은 남자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건 정말 드문 경우였다.
맷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래도 할수 있는건 해봐야지요. 함을 띄우는건 안될지라도 어떻게든 히페리온이 전투에 도움이 되도록 해보겠습니다."
레이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살짝 돌렸다.
뮤탈리스크의 공격은 막아냈다. 아마 다음 공격은 지금보다 어려울 것 이었다.
하지만 더욱 많은 뮤탈리스크를 모은다는 정보에 레이너는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의 의견에 맷 역시 동의했다.
판단 자체는 이상할것 없었다. 이제 정말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특공대를 여러차례 구한 행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병력피해도 불가피 했다.
하지만 한번 시도한 공격방식은 실패했다. 그런데 왜 다른 시도를 하지 않는걸까?
뮤탈리스크는 분명 강력했다. 하지만 잘 짜인 방어선이 상대라면, 조합된 저그 지상군에 비해 효율이 좋지 않다.
케리건이 저그 군단을 손본 후라서, 갑작스럽게 무리를 이끌던 여왕이 사망해도 마지막 명령이나 지시라면 충실히 따른다.
하지만 왕성한 저그둥지 한가운데에 숨어있을 개체. 그것에 이상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지형은 결국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마치 뚝심처럼 뮤탈리스크를 더 준비한다? 역시 이상하다.
그가 지금껏 경험한 저그는 절대 꽉막힌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항상 변화하고 바뀌었다. 그리고 허를 노린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나, 더욱 보수적인 면을 지닌 프로토스가 가지지 못한 저그 최대의 장점이었다.
이번 대 저그 전투는 이 행성만큼이나 이상했다.
레이너는 호너와 대화를 나눈후 함교를 나서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무언가 막히는게 있을때, 저 침착한 부관과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편해 졌는데.
'상식적이지 않은 곳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인간과의 대화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가.....'
레이너는 잠시 묵묵히 걸었다.
통로는 길게 이어진 전등으로 밝혀져 있다.
그 중 하나가 마치 불량이라도 난듯 흐릿한 흰빛으로 깜빡거린다.
그는 그 아래 문득 멈춰섰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듯 했다.
레이너는 잠시후,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혼자말 처럼 조용히 말했다.
"토시. 거기있소?"
텅빈 복도에서 붉은 육각 입자가 솟구쳤다.
그것은 순식간에 인간형태를 갖춘다.
입자가 사라진 곳.
두꺼운 레게머리와 수염을 기른 몸집 큰 흑인 사내가 나타났다.
인형목걸이와 기이한 흰눈. 그리고 붉은 빛줄기가 지나가는 고장갑 환경 차폐복은,
그가 지닌 범상치 않은 존재감에 비한다면 오히려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내는 언뜻 무시무시해 보이기까지 한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다가왔다.
레이너가 빙긋 웃었다.
"눈빛을 볼 필요가 없잖소 토시."
토시가 하하 웃었다.
"그렇게 무례한 성격은 아닙니다."
토시는 레이너가 자신의 속마음을 함부로 쳐다보는걸 질색하는걸 알았기에, 겸양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도 레이너도. 뉴폴섬 해방을 계기로 어느정도 상대방을 인정하고 있었다.
레이너는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토시에게 물었다.
"이 행성은 무언가 이상하오. 자치령 생존자들은 이곳 지하의 알수없는 구조물을 의심하고 있군. 자네라면 무언지 알수있소?"
토시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치 보일듯 말듯한 희미한 미소로 눈을떳다.
"보이지 않습니다....."
레이너는 살짝 당황했다. 이 악령 요원은 주변을 두렵게 하는 기이한 면을 지니긴 했지만,
또한 그에 걸맞게 어떤 신비에 대해 놀라울 만큼 깊은 이해를 보여주었다.
그런 그 조차 고개를 젖다니.
역시 직접 내려가는 방법밖에 없는것일까.
"그렇소? 시간 뺏어서 미안하오."
레이너는 그대로 그를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토시는 아직 할말이 있는듯 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형제여."
다시 몸을 돌린 그에게 토시가 말했다.
"느끼지 못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혹은 너무 밝아서 보기 힘들거나.... 눈부심에 비유하면 좋겠군요. 둘중 하나죠."
레이너가 흥미있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렇다는건....."
토시가 말했다.
"또한 무척 오래전 물건 입니다. 차라리 함선의 젤나가 유물이 훨씬 어릴정도로. 이 행성에 들어오지 못했다면 영원히 알수 없었을 겁니다."
토시는 생각했다.
테란이 이것을 발견한건 순전한 우연.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저그. 바로 그들의 지도자가 옛 특기를 이용해 이곳을 알아낼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형제의 앞에서 그 존재를 쓸데없이 언급하지는 않기로 했다.
레이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 고맙소 토시. 역시 직접 내려가 봐야겠군."
토시는 하하 웃었다.
"제 형제들을 구해주신 은혜는 결코 잊지 않고있습니다. 이번 일은 저에게 맡겨 주시지요."
레이너가 말했다.
"당신에게? 하지만 다른 악령들은 비밀기지에서 회복중이라 하지 않았소. 설마 혼자 가겠다는거요?"
토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손바닥으로 단검이 돌았다.
해골양각 손잡이가 두갈래로 나뉘어 칼날을 감싸는 발리송 나이프였다. 그가 칼날을 손가락으로 슬쩍 쓸었다.
"형제의 친구들은 전쟁의 프로들이죠. 그들은 이미 할일이 있는것 같군요."
칼날을 숨기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또한 이런 종류의 일은 본래 확실한 한명이 낫습니다."
레이너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어쩐지 실마리가 풀리는 기분 이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건 레이너 특공대 같은 소수정예 부대의 약점이기도 했다.
저그와의 전투에 투입할 병력도 벅찬 현재 상황.
그런 전파조차 통하지 않는 곳으로 병력을 둘로 나누는건, 자칫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수 있었다.
레이너가 말했다.
"좋소 토시. 이번일은 당신에게 위임하지. 뭐 필요한것 없소?"
"감사합니다 형제여. 그럼 다녀 오지요."
토시는 나타났던 것처럼 순식간에 붉은 입자로 사라졌다.
레이너는 잠시후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조심하시오 토시. 필요하면 꼭 부르고."
레이너는 이 다짐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연구소 지하 3층. 파괴된 중앙통제소.
뚫린 돌출 감시창 너머 조용한 무언가가 내부로 내려온다.
잠시 멈춰있던 그것은 곧 붉은 빛으로 감싸인다. 전용의 무탄피 소음총을 등에 맨 악령리더의 모습이 나타난다.
토시는 흰 눈을 빛내며 파괴된 메인통제실을 살핀다.
그의 발치로 이전 전투에서 떨어져, 바깥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뮤탈리스크 시체가 늘어져 있다.
멀리서 가우스 소총 소리가 들린다.
그는 먼지 너머 협곡 위. 무수히 지나가는 거대한 날개그림자를 힐끔 올려다 본다.
다시 전투가 시작되려 한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시길 형제들.'
그의 그림자는 다시 붉게 흐려진다. 곧 흔적조차 없다.
그에게 어둠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붉은 장갑 전투복을 입은채 사망한 자치령 병사. 뭉쳐진 저글링과 히드라리스크의 무수한 사체들.
어두운 지하는 끝없이 깊어진다.
몇개의 저그 굴이 느껴진다.
종족을 구분 할수없이 흩뿌려진 검붉은 핏자국.
곳곳에 이어진 탄흔. 앞선 자들이 남긴 처절한 흔적.
어둠속에서 낮은 경고소리를 내는 몇몇 저그가, 고개를 치켜들고 주변을 살핀다.
그들은 잠시 몸을 멈칫거렸다가 다시 주변을 휙휙 둘러본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 날카로운 괴성을 내며 어둠속 곳곳으로 흩어진다.
토시는 저그 개체 몇 때문에 굳이 완벽히 이동하지 않았다.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를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완벽한 은신은 두번째 순위였다.
그것은 바닥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지금은 빠르게 1차 목표까지 이동하는게 먼저였다.
지하 깊은곳으로 이동할수록 알수없는 위화감이 느껴진다.
그는 사이오닉 에너지의 흐름을 읽을수 있었다.
그것에 이미 흘러간 시간조차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것에 정신을 집중했다.
'설마 프로토스인가.....'
그는 연구소 최하부에서, 협곡바닥 아래로 향하는 좁은 통로를 내려갔다.
오래지 않아, 강철 격벽이 천장을 대신한 매우 큰 공간이 나타났다.
머리위 단단히 닫힌 격벽의 너머로, 땅을 겨눈 와이번 레이저 천공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아래로 그 기이한 층이 있었다.
그것은 암석도, 금속도 아닌 기이한 빛깔의 벽이었다.
그것에는 레이저로 뚫은 시커먼 구멍이 열려 있었다. 한사람이 겨우 들어갈수 있을법했다.
그는 이곳까지 내려오며, 사이오닉의 잔상을 지우려 한 흔적을 느꼈다.
그건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그 신비로운 외계 종족과 다른, 아직은 다소 어색한 결합이 느껴졌다.
자신정도 되는 악령의 눈을 속이는 것은 설령 프로토스라 해도 불가능했다.
그는 미소를 띄며 가닥들을 더듬었다. 그런데 그들중 다소 이질적인 것을 느꼈다.
주변의 미숙한 은폐 흔적이 없었다면 심지어 그조차 놓쳤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강렬했고 또한.....
그것은 광활했다. 차가웠으며, 극히 고요했다.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각진 에메랄드빛 수정 기둥들.
악령이 그곳에 들어갔다. 그리고 경도되었다.
그것은 극히 드문일 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고요한 주변과 하나가 됬다.
기둥들은 서로를 떠받치고 스치며 합쳐진다.
온갖 크고 작은 공간과 벽, 회랑과 탑, 지평선 같은 광장을 만들었다.
자연의 웅장한 우연이 만든것 같은 거대한 성소.
하지만 그건 분명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수정들은 스스로 빛을 내듯 밝았다.
일정하게 흩어진 빛과 광선은 신의 성소를 밝히는 후광이다.
그 완벽한 공간.
이 모든 경의에 비해 티끌만큼 작은,
어울리지 않는 불경한 마음을 품은 존재가 기둥들 사이에 숨어있다.
주변에 녹아든 은폐. 귀로 들을수 없는 건조한 소리.
- N 234488 움직임 포착.
그의 왼쪽 눈을 대체한 사이버네틱 시신경이, 극히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몇개의 기둥들 너머, 불청객의 위치를 추적한다.
놈이 조금만 더 걷는다면, 그의 저격을 절대 벗어날수 없는 최적의 장소가 나타난다.
그의 인공 시신경에 상대방의 정보가 나타난다.
'오호라 악령. 무슨 냄새를 맡고 이 사지로 걸어오셨나.'
그는 멍청한 사냥감을 싫어했다.
하지만 항상 즐거움보다 의무가 중요하다.
그는 고요히 총과 하나가 됬다.
사냥감이 원하는 위치에 오길 기다린다.
그가 주변에 넓게 퍼뜨린 초능력 감시구역에 다른 적은 없다.
저격직후 목표의 시체를 뒤져 더 자세히 밝혀낼 생각이다.
그리고 이윽고. 마침내 놈이 나타났다.
놈의 투명한 은폐는 결코 그를 속일수 없다.
놈이 눈치챘다.
몸을 멈칫한다.
'이미 늦었어.'
방아쇠는 당겨졌다.
사냥감이 움찔한다.
'사냥 끝.'
그게 네놈 수준이지 코드 234488
은신해 있던 유령은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눈을 치켜떳다.
그는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몸을 돌려 권총을 겨눴다.
그의 등에서 땀이 비어져 나왔다.
아무것도 없다. 그건 확실하다.
'뭐지?'
마치 진짜 악령이라도 만난것 같다.
위험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는 저격총을 허둥대듯 회수하며, 인공안구를 조절해 먼저 사냥한 놈을 살폈다.
그리고 다음순간 분명 그가 저격한 그 악령이, 마치 부활한 것처럼 총을 겨눈 눈빛과 마주쳤다.
'이런.'
이것은 중대한 실수. 움직임은 그를 노출시켰다.
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 날아든 탄환에 두개골이 박살난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 자신이 이겼음을 확신했다.
'저 악령은...!'
기계가 아닌 사이오닉 통신은 이 신비로운 공간에서 통했다 .
리더에게 존재가 알려졌을 것이다.
자신은 죽었다.
하지만 매우 가치있는 과정이다.
'네 소원은 이루어 지지 않을 것이다 234488.'
그가 조용히 총을 내렸다.
'유령놈들....여전히 한심하군.'
토시는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 유령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때론 모르는게 더 나은일도 있다.
'좋아....그자가 생각한 리더를 찾아볼까.'
토시는 몸을 돌려 기둥 너머로 숨어들었다.
형제의 부탁에 앞서, 이 성소를 더럽힌 불청객을 먼처 처치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순간, 토시는 형체 없는 악령과 같이 순식간에 엄폐했다.
피잉!
그가 존재했던 공간을 가르는 가느다란 사이오닉 터널.
그것은 탄환에 가해진 속도와 사거리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킨다.
토시를 스쳐 보이지도 않는 곳까지 쏘아진 저격탄환은, 거대한 기둥을 아예 관통해 버린다.
슈슈슉!
토시는 무탄피 소음총을 사격이 날아온 기둥쪽으로 쏘며 접근한다.
그가 뿜어낸 사이오닉 에너지는 적의 눈을 흐릴것이다.
허공을 소총과 저격총탄이 가른다.
그 조용하고 치명적인 일격과 함께, 두 존재는 빠르게 가까워진다.
토시는 놈이 숨은 기둥으로 순식간에 접근하며, 궁지에 몰아넣고 있음을 의심치 않았다.
다음순간, 어둠속에서 무언가 번뜩였다.
단검과 비슷한 무언가가 그의 환경 차폐복을 뚫는다.
그의 몸에서 강력한 사이오닉 보호막이 튕겨진다.
결국 그의 몸에 꼿히지 못한 부비트랩의 발사체가, 수정 기둥에 박혀 마비전기를 뿜어낸다.
그가 눈앞의 기둥 쪽으로 팔을 휘두른다.
적의 사이오닉 에너지 자체를 터뜨리는 광범위 정신폭발.
그가 설정한 주변을 찢어버린다.
순간 그의 머리에 기이한 사이오닉의 흐름이 느껴진다.
'정신지배? 건방지군.'
그리고 그는 상대가 상당하다는 것을 내심 인정했다.
'오호.... 부하가 받은만큼 되갚아 준다는건가?'
토시는 총을 어깨에 건다.
기둥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두 유령과 악령요원은 서로의 정신을 제압하기 위해 최대한의 능력을 끌어낸다.
그들의 주변, 사이오닉 에너지의 돌풍이 거세게 휘몰아친다.
그 모든것은 보통 사람은 느낄수도 없는 고요하고 치열한 격돌.
마침내 두 사람은 마주본다.
몰아치던 사이오닉 돌풍은, 서로의 실력이 상박임을 인정하고 사그러든다.
토시는 입을 꾹 다물다, 속삭이듯 말한다.
"노바....."
몸에 착 달라붙는 여성유령 감압복. 사이버네틱 고글을 올린 금발의 여성이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을 짓는다.
"토시, 또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