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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분단국 통일 유형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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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통일유형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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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19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8/01 20:48:26

네 분단국 통일 유형 비교


1. 중립화 통일 유형 : 오스트리아,베트남, 예멘,독일 등 4개국들은 모두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통합에 성공하였다. 이 4개국들 의 통일은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고 통일방법 통일후의 외교노선 정치체제 경제구조 등에서도 다르다.
오스트리아는 통일방법에 있어서 민족내부의 갈등이나 대결없이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통합을 성취해 냈다. 특히 이 나라는 내부적으로 민족지도자들이 단합되어 있었던 만큼 내적 갈등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 다만 점령 강대국들로부터 통일의 승인을 받아내는 데만 힘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패전국의 일원으로 미국,영국,프랑스,소련등 4강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온건 사회주의자인 칼레너 주도하에 피점 3개월 전에 이미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고 이것을 모태로 이 나라는 단일 행정구역을 10년간 유지하다가 최종적인 통일에 이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는 4강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면서도 임시정부를 축으로 단일 행정체계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데서 민족내부의 이데올로기 대결과 분단고착화의 악순환을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을 토대로 오스트리아는 민족족 에네르기를 통일 독립정수 수립에 결집시킬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4강과의 끈질긴 협상끝에 1955년 5월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오스트리아의 재건을 위한 조약을 체결, 영세 중립국 으로 통일정부의 지위를 부여 받았다. 중립화 통일 유형인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통일 독립정부 수립은 민족내부의 단결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중립적인 외교노선을 통해 성취될 수 있었다.오스트리아는 2차대전 말 분단된 국가로서 민족의 단합과 슬기로써 외압을 뿌리치고 중립화를 내세워 통일독립정부를 수립한 첫 케이스로 기록된다.

통일후 오스트리아는 자유민주주의에 바탕한 복수정당제도를 견지하고 있다. 선진 자유민주국가로서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경제구조에 있어서도 오스트리아는 소유권을 인정하여 시장경제 원리를 존중한다. 그러면서도 이 나라는 유럽특유의 사회복지제도를 채택, 사회민주적 배분원칙에 준거하고 있다.



2. 공산화 통일 유형 : 베트남의 통일방식은 다르다. 1975년 4월 민족 통합을 완성시킨 베트남도 오스트리라와 같이 외압에 의해 분단된 것은 똑같지만 민족내부의 결속에 실패하고 분열과 대결 속으로 빠져들어 내분을 격화시켜 가던 중 공산주의 폭력혁명노선에 의해 흡수통합되었다.

베트남의 무력통일은 후진국의 전형적인 내분과 분열대결 그리고 공산주의 폭력혁명에 의한 강제통합을 상징한다. 오스트리아와 같이 민족지도자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제각기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쫓아 분열하고 대결하던 중 공산주의 혁명세력의 선전선동과 폭력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그 밖에도 베트남 통일은 후진국 자유민주체제의 취약점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공략된 고전적 사례로 기록된다. 공산주의자들은 부패.독재.비능률 속에 빠져 든 후진국 자유민주체제의 약점을 파고 들었고, 피식민지의 반외세 민족주의 감정을 내세워 월남정부의 정통성을 허물어 내는 데 성공 하였다.

벨기에의 일간지 르솨르가 사설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월남의 부패.무능 독재정부는 돈과 무기를 갖고도 게임시작 때부터 지고 말 것이 확실했는 지도 모른다. 54만명의 미군 7만명의 연합군 6만명의 월남군, 세계 최첨단 무기 1천 4백억 달러의 지원비에도 불구하고 월남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패배, 흡수통합되고 말았다.

그 비극은 월남정부의 부패 무능 독재 때문이었다.

월맹은 월남의 독재 부패 외세의존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공산화하는데 성공하였다.그렇지만 일단 통합에 성공한 베트남 공산정권은 월남때보다 더 무서운 독재체제로 경직되었고 월남 못지않게 부패해 갔으며 미국대신 소련에 의존해 갔다. 특히 통일 베트남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인 사유재산을 말살하였고 언론 출판 결사 종교의 자유들을 압살해 버렸다. 베트남은 월남 정부의 독재와 부패에 항거하며 시위를 벌였던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을 검거, 재교육 수용소로 보냈거나 형틀 속에 처박았다. 베트남은 공산당 주도하의 전체주의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 결과 인간 기본권의 압살과 경제의 황폐화를 자초하였을 뿐 아니라 행정의 비능률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베트남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90년 현재 2백 30달러하고 일본의 공동통신사가 발행한 1992 세계 연감은 기록하고 있다. 이는 월남이 15년전 공산화 통일전의 1인당 국민 소득액보다도 적은 숫자임을 드러내고 있다. 베트남의 경제는 통일후 15년간 성장대신 퇴보만 거듭한 것이다. 베트남의 국부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호치밍은 1969년 숨을 거두기 전 통일 베트남의 장래를 장미빛으로 그려낸 바 있다.

그는 조국의 국토와 인민이 있는 한 침략자는 추방될 것이고 통일된 베트남에는 지금보다 10배나 더 아름다운 강산이 건설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그렇지만 지금 베트남은 통일된 지 17년이 지났는 데도 10배나 더 아름다운 강산은 커녕 빈곤과 탄압만 더 가중될 따름이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은 적화통일이 되자 공산주의의 압정과 빈곤에 못이겨 목숨을 걸고 탈출하고 있다. 통일 이래 90여만명이 조국을 등지고 도망쳤다. 지금 이 시각에도 붉은 동토국을 탈출하는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다.

결국 공산당 통치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던 공산당 지도부는 1986년 부터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모방한 '도이모이'(개혁)을 차입, 체제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붉은 베트남은 이 도이모이에 따라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의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고 베트남인들의 사유재산 소유와 자유기업체제를 부분적 으로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베트남은 다원주의와 다당제를 거부하며 공산당 1당독배체제를 고집하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시장경제의 원활한 발전을 위해 요구되는 정치적 민주화가 거부됨으로써 시장경제 개혁의 효율적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베트남도 아시아 공산국 특유의 경제와 정치의 분리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3. 비례대표 통일 유형 남북예멘의 통일방식은 후진국도 베트남과는 달리 폭력아닌 평화적 타협에 의해 통합될 수 있음을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실증해 주었다. 특히 남북예멘의 통일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상극적인 체제가 두 정부간의 타협을 통해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는 것을 표출시켰다.

더욱이 예멘의 통일은 두 개의 정부가 서로 국력의 비례에 따라 통합 정부의 권력을 배분하는 형태를 취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특성을 지닌다. 예멘통합은 양측 국력의 지분을 통일정부의 권력구성에 반영 시킨 비례대표 통일유형이라 하겠다.

인구와 경제수준에서 우위를 점유하고 있던 북예멘이 통일 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도 적지않은 요직 을 남측에 배분한 것이 그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인 북예멘은 공산주의체제 였던 남예멘보다 면적에 있어서는 2/3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 지만 인구에서는 북예멘이 남쪽보다 4배나 많았고 1인당 국민소득에서는 6백 80달러 대 4백 20달러로 앞서가고 있었다.

통일예멘의 과도정부는 5인의 대통령 평의회에 의해 통치되도록 구성되었다. 5명중 3명은 북예멘출신 으로 북쪽이 과반수를 확보,주도권을 행사한다.물론 대통령도 북예멘의 대통령이 승계하였다. 동시에 평의회 부의장은 부통령으로 보하게 되었고 이 부통령은 남예멘 출신으로 배정되었다.

수상은 남예멘의 대통령이 맡았고 39명의 내각중 20명이 북예멘 출신으로 충당되었다. 통일예멘의 의회 도 북예멘 의원 1백 59명과 남예멘의원 1백 11명 그리고 대통령이 임명한 케이스 31명으로 구성하였다.

이와같은 통일예멘의 권력구조 배분은 두 정부 지도자들이 양측의 전반적인 국력을 바탕으로 비례 배분 한 것으로 보인다. 북예멘이 통일 정부를 주도하되 남예멘도 무시 못할 견제세력의 직위를 보장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와 경제체제에 있어서는 북예멘의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를 흡수통합했다는 특색을 나타냈다. 정치는 복수정당제도로 재편되었고 경제는 사유권 인정과 자유시장경제에 바탕했다.

다만 외교노선에 있어서는 남북예멘이 함께 아랍국가로서 원칙적으로 추구하고 있었던 비동맹 중립 노선을 고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북예멘이 서방의 원조에 의존해 있었는데 반해 남예멘은 소련에 기대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통일예멘의 외교노선은 자유진영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다.



4. 자유선택 통일 유형 : 동서독의 통일방식은 남북예멘의 통합과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분단 당사자들이 자유시장경제와 공산체제로 대결되어 있었다는 데서는 예멘과 독일이 같다. 그러나 남북예멘은 서로 타협을 통해 통일정부의 권력 지분에 있어서 3대2의 비율로 나누어 가졌는데 반해, 동서독의 통일은 동독이 서독으로 완전 흡수 통합 되었다.

동서독의 통일은 월맹과 월남의 통일과도 다른 점이 많다. 베트남과 독일은 이데올로기로 상호 분단되어 있었다는 데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한쪽이 다른 한편에 의해 흡수통합되었다는 데서도 유사성을 지녔다. 그러면서도 독일과 베트남의 통합방식은 전혀 궤를 달리하고 있다. 베트남 통일은 베트남 국민 의 자유의사와는 상관없이 공산당의 폭력혁명 전략전술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행된 것이다. 여기에 반해 독일통일은 공산당이나 권력기관의 강요와는 상관없이 독일국민의 자유의사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특징을 안고 있다. 동독주민들이 서독으로의 흡수통합을 투표를 통해 스스로 선택하고 나섰던 덧이다.

독일의 통일방식은 동독의 서독편입 형태였지만 서독의 강압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었고 동독 주민들의 자발적인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동독인들의 서독편입 연유는 동독공산당체제의 탄압과 빈곤 그리고 서독의 자유민주 발전과 경제성장에 바탕했다. 동독의 서독편입으로 말미암아 독일은 통일후에도 서독의 기본 이념과 체제를 그대로 견지하게 되었다. 정치에 있어서는 자유민주체제요 경제에서는 시장경제원리 를 받든다. 외교에 있어서도 통일독일은 친서방 노선을 변함없이 답습하고 있으며 군사동맹체제 또한 서방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회원자격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앞에서 비교 평가해 본 4개의 통일유형들은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다. 이들 4개 유형중에는 바람직한 통일방식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바람직한 통일유형으로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협상과 타협을 통해 이룩한 통일,그리고 분단지역 주민 의 자유의사를 반영한 통일이 그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예멘의 비례대표 통일, 독일의 자유 선택 통일이 그에 속한다.

이 3개국 통일 유형중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통합장식은 독일케이스로 평가된다. 독일통일은 소속주민들 의 자유의사에 따른 통합이라는 데서 그렇고 자유 민주이념에 바탕한 만족화합의 통일이었다는 데서 더욱 그렇다.

19세기 독일 이상주의 철학의 대가였던 게오르규 헤겔은 인류의 역사발전 목표를 자유신장에 있다고 하였다. 인류 역사란 자유의 확산을 위해 부단히 전개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동독 공산동재체제를 해체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서독으로 흡수통합한 독일의 통일유형은 역사발전 법칙에도 순응하는 수순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남예멘의 북예멘으로의 통합도 그렇고 오스트리아의 자유체제로의 통일독립정부 수립도 똑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개국 통일 중 바람직 하지 못한 유형은 베트남방식이다. 베트남 통일은 국민의 자유의사를 유린한 채 폭력으로 통합한 유형이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공산화 통일은 베트남 민족에게 자유신장의 문을 열어준 것이 아니요 그들을 탄압 과 빈곤의 늪으로 몰아 넣었다. 이것은 역사발전의 순리를 거역한 통일이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을규님의 http://cgi.chol.com/~eulgyu/technote/read.cgi?board=sisa&y_number=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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