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통일특성
1. 동서독 교류협력 : 동서독의 통일은 1990년 10월 3일 완결되었다. 독일통일은 무력이나 강압에 의한 것은 아니었고 양독 지역 국민의 합의에 의한 평화통합이었다.
동서독은 분단 양측이 비록 이데올로기상으로는 화합할 수 없는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으면서도 꾸준한 교류와 협력을 통해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해 갈 수 있었다. 양독은 교류와 협력관계를 확대해 가던 중, 때마침 동유럽을 휩쓸던 민주화와 개방화의 열풍에 편승, 평화통일을 재빨리 얻어낼 수 있었다.
동서독의 통일은 동독이 민주화되고 개방화 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 이 추진하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으로 동구의 공산국들은 소련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화와 민주화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동구에 자주화와 민주화의 거센 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동독의 1천 6백만 국민들도 개혁의 대열에 나섰다. 결국 민주화에 성공한 동독 주민들은 그 여세를 몰아 서독으로의 편입을 스스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동서독의 통일은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합한 것이라기 보다는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통합되기 를 자원하고 나섰다는 특징을 지닌다. 공산독재체제 속에 묶여 탄압과 빈곤 속에 허덕이던 동독주민들이 개방물결을 타고 자유와 번영이 넘쳐흐르는 서독으로의 편입을 자청한 것이다.
원래 독일은 1945년 5월 8일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등 4개국들에 의해 4개지역으로 분할 점령되었었다. 그러나 2차대전후 서방진영과 소련간의 냉전체제가 격화되어 가면서 미.영.불 3개 서방 강대국들은 점령지역을 하나로 통합, 1949년 9월 7일 독일 연방공화국을 만들어냈다.
서독이 그것이다. 이어 소련도 1949년 10월 7일 자신의 점령하에 있었던 지역에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동독을 창출해 냈다.
독일은 다행스럽게도 4개 지역으로 분할점령 되었으면서도 단일경제권으로의 통합이 점령국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미.영.소 3개국은 1945년 7월 17일 부터 8월 2일 까지 속개된 포츠담회담에서 독일의 4개점령지역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하며 주요 상품들을 균등히 배분하여 평등한 생활을 보장하자 는 데 합의하였던 것이다.
이어 1946년 미.영.불 서방 3개국들은 소련과 각기 점령지 물품교역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서방 3개국들은 1947년 1월 자신들의 점령지역을 하나의 경제.행정구역으로 통합했다.
이렇게 하여 독일은 비록 4분되었지만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으려는 노력이 점령국가들에 의해 처음부터 시도되었다. 그러나 분단 독일의 단일경제권은 1948년 6월 24일 부터 1949년 4월 12일 까지 지속된 소련의 베를린 봉쇄를 계기로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분단 독일의 경제교류는 1949년 9월과 10월 각기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이 들어 서면서 다시 재개되어 날로 확대되어 갔다. 서독은 정부수립 31일만에 그리고 동독은 건국 하루만인 1949년 10월 8일에 서로 프랑크푸르트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은 동서독이 두 지역간의 편의를 위해 양독 중앙은행들을 지불청산기관으로 설정함으로써 상품교역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서독은 프랑크푸르트협정을 필두로 통일될 때까지 수많은 협정들을 체결해 가면서 경제교류를 활성화 시켜갔다. 양독의 교역은 앞서가는 서독측이 뒤처진 동독을 도와주는 불균형관계였다. 우선 서독은 동독과의 화폐환율에서 밑지고 들어갔다. 서독 마르크와 동독 마르크의 실제 구매력은 4;1로서 서독 마르크가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은 동독과의 교역 거래에 있어서 1:1의 비율을 적용해 주었다.
서독이 4배나 손해를 본 셈이다. 무역거래에 있어서도 1988년의 경우 서독은 45억 달러 수출에 47억 달러 수입으로 2억 달러의 적자를 보았다.
뿐만 아니라 서독은 수억 달러씩 동독에 저리로 차관을 해주었다. 무이자 아니면 기껏해야 연리 4%정도 로 서독 마르크를 빌려준 것이다.
그 밖에도 서독은 동독내의 정치범을 빼내기 위해 엄청남 몸값을 지불했다. 1인당 3만 5천 달러 내지 7만달러가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독은 1962년 - 82년 사이에 1만 9천명의 정치범들을 동독으로 부터 사들였다. 이를 위해 서독은 10억 달러의 몸값을 건넸다고 한다.
또 서독은 동독을 여행하는 자국 국민의 도로사용료도 부담하였다. 10년간 서독은 3억 5천만 달러를 동독에 지불하였다. 이와 같은 서독의 경제적 지원책으로 인하여 동독의 서독 의존도는 40%로 증대 되었고 서독의 동독 의존도는 10%에 불과했다. 결국 서독의 튼튼한 경제력이 동독을 흡수하게 된 주요 원동력이 된 셈이다.
2.서독의 동독민주화 정책 : 서독의 이와같은 적극적인 동독지원은 단순한 동족에의 발양에 바탕한 것만은 아니다. 동독 공사독재 체제에 얽매인 동족의 인권과 복지 그리고 민주화를 유도해 내기 위한 데 있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서독은 공산독재체제에 항거하다 체포된 동독인들의 인권과 자유로운 삶을 위해 몸값을 지불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독은 동독에 대한 마르크 차관 조차도 동독인들의 인권과 자유 향상 을 위해 연계시켰다.
1983년 서독은 동독에 10억 마르크의 차관을 공여하면서 그 대가로 서독은 동독측이 1천 4백 km에 달하 는 국경선에 설치해 놓은 기관총좌와 지뢰의 3분의 1을 철거토록 유도하였다. 이어 서독은 1984년 9억 5천만 마르크의 차관을 동독측에 대여해 주면서 동독이 서독여행제한을 크게 완화시키도록 하였다.
특히 동서독을 통합시키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던 헬무트 콜 서독총리는 통일의 조건으로 동독의 자유화 와 개방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콜 총리는 기회있을 때 마다 양독이 통일되려면 동독이 서독처럼 민주화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1989년 봄부터 동구 여러 나라에서 민주화.개방화의 열풍이 불어닥치고 있는 데도 유독 동독에서만이 그러한 바람이 일지 못하자 콜 총리는 동독의 민주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는 동독정부가 동독인들의 대규모 서독탈출을 막기 위해서는 헝가리와 폴란드를 본받아 민주적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1989년 8월 22일 촉구하고 아섰던 것이다. 이어 89년 10월 21일 콜총리는 독일 통일의 관건은 동독의 자유 인권.자결권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동독의 민주주의에는 개인의 자유보장만이 동독인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통일선택을 보장할수 있기 때문이라고 명백히 지적하였다.
콜 총리는 동독에 대한 대규모 경제원조도 동독의 민주화와 연계시켰다. 그는 1989년 11월 8일 동독이 자유선거와 복수정당제를 실시하고 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포기해야만 대규모 경제원조를 제공할 수 있다 고 동독의 민주화를 선결조건으로 요구하였다. 그는 동독에 정치 및 경제의 획기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것은 서독의 국가적인 의무라면서 전체의 독일인들이 민주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 하는 것이 동서독 재통일의 전제조건이라고 못박았다.
사실 동서독의 교류와 협력이 간접적으로 동독주민을 상대로 민주화와 개방화 욕구를 자극했으며 서독의 자유와 풍요에 대한 동경심을 불어넣어 끝내 서독으로의 흡수통합의 기반을 다져준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다행히도 동서독은 2차대전후 4강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면서 단일경제권으로 통합돼 두 지역간 의 경제교류가 활성화 될 수 있었다. 양독간의 경제교류는 동독인들에게 서독제품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 동독체제에 대한 불만과 서독에 대한 기대치를 상승케 하였다.
그 밖에도 동서독간의 우편.통신, 인적교류는 동독주민들의 서독에 대한 동경심을 더욱 드높이는 작용을 하게 만들었다. 동독인들에게 자유와 번영이 서독 바람을 불어넣는 촉매제 역할을 해낸 것이다.
동서독은 1945년 분단되었지만 양측 지역간에는 변칙적으로 체신교류가 가능했다. 다만 61년 8월 동독 이 베를린장벽을 구축하면서 동서독간의 변칙적인 체신교류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곧이어 재개 되었다. 동독은 1948년~68년 사이의 우편.전신 사용료로 서독측에 18억 마르크를 요구했을 정도로 두 지역간에는 분단 초기부터 체신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서독은 1971년 9월 체신교류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 양독간의 전화회선을 크게 늘렸다. 동서독간에는 자동전화선이 매년 폭증해 갔던 것이다.
3.동서독 기본 조약 발전 : 동서독은 분단된 상태에서도 교통망을 계속 연결해 사용하고 있었다. 동서독 간에는 32개의 철로, 3개의 고속도로, 31개의 연방도로, 그 밖의 공공도로들로 연계되어 있었다. 이 교통망은 1948년 6월 49년 4월 사이의 베를린 봉쇄당시 전면 차단된 바 있었으나 그후 곧 재개되었다.
물론 동독은 서독이 1백 70km 동독영토 깊숙히 박혀있는 서 베를린과의 통로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라고 간주,1951년 부터 도로사용료를 서독으로부터 징수해 내기 시작하였다. 동독은 서독여행자들 을 상대로 과잉검사를 하는가 하면 화물차의 경우 화물수색으로 운송을 지연시키는 등 불편을 야기하기 도 하였다. 1955년 동독은 서독과 서베를린간의 자동차 도로세 징수를 제기한 바도 있었다. 1972년 5월 동서독은 교통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국제관례에 따라 호혜주의원칙에 바탕한다는 것을 명시 하였고 철도,자동차교통,하천교통,해운 등의 교통에 관해 규정하였다. 동서독은 교통조약을 계기로 두 지역간의 교통이 더욱 간편하고 편리해져 교류와 협력을 더 한층 원월활히 증대시킬 수 있었다.
동서독간에는 인적왕래도 처음부터 가능하였다. 동독 부모형제에 한하여 연간 1회 4주 서독 거주인들의 동독여행을 허가하였고 일반 주민들에게는 1일간 동베를린 체류를 허용하였다. 뿐만아니라 동독은 동독 내 박람회 참가나 상용여권에 의한 여행 또는 동독 공공기관으로부터의 초청장을 소지한 사람들에게는 제한없이 입국을 허용하였다.
동서독의 인적교류에 제한적인 규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분단초기부터 연간 1백만명 이상의 교류가 가능하였다. 1960년 1백10만명이던 교류인원이 70년엔 1백 25만명으로 늘어 났고. 1972년에는 1백 54만 명으로 불었다. 그러다가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 민주공화국 관계의 기본원칙에 관한 조약이 발효된 1973년에는 동서독 여행자가 2백 27만명으로 뛰었다. 통일 전 동서독간의 인적왕래는 5백만명에 달 하였다.
동서독은 기본조약체결 이전에 이미 통행협정을 만들어 양측간의 여행절차를 보다 쉽게 간소화한 바도 있다.1971년 12월 체결된 동서독 통행협정은 여행자 보호, 인적 왕래 절차의 간소화, 화물수송절차의 완화, 교통편의 개선, 교통위원회 설치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동서독 교류과정에서 가장 불편했던 부분이 언론매체의 교환이었다. 동독이 언론을 통한 서독의 자유 사상 유입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서독의 공식적인 라디오tv교류는 기본조약이 발효된 1973년 이후부터 가능해졌다. 통일전 1988년 현재 서독의 수도 본에는 6명의 동독 특파원이 주재하고 있었으며 동독의 동베를린에는 19명의 상주 서독특파원이 취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독의 3개TV방송국이 동베를린에 지사를 설치, 현지 방송을 함으로써 85%의 동독지역이 서독 TV 시청권으로 들러갔다. 라디오 는 1백% 가청권으로 확대되었다.
이미 동독주민들은 1972년의 기본조약 발효 이전부터 서독의 TV와 라디오를 시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독 당국은 서독의 TV라디오전파를 막으려 했으나 1천 4백KM에 달하는 국경선을 모두 봉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동독인들은 분단 초기부터 서독의 전파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동서독은 1972년 11월 8일 독일 연방공화국과 독일 민주공화국 관계의 기본원칙에 관한 조약을 조인하였다. 이 조약은 상호 무력사용을 포기하고 모든 국가의 주권 평등 독립자주,영토보존,인권보호 차별대우금지 등을 지향한다고 선언하였다.
동서독 기본조약은 또 군비제한과 군비축소 노력을 지지하고 경제 학문 기술통행 법률 부분의 교류, 우편전화 보건 문화 스포츠 환경보호등의 분야에서 협력을 촉진하고 발전시키는 협정을 체결키로 하였다. 양독은 상주대표부를 상대편의 정부 소재지에 교환 설치한다고 밝혔다. 이어 동서독은 과거 양국이 각기 체결한 조약 또는 두나라에 관계되는 2국간 혹은 다국간의 조약에 관한 한 이조약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4. 동독 붕괴와 자유선택 : 동서독의 기본조약은 양독관계를 한층 더 밀접한 관계로 승화시켰다. 기본조약 체결 이전의 양독 사이가 미수교국간의 불편한 관계였다고 한다면 조약체결 이후에는 선린 우호렵력 체제로의 진입을 의미하였다.
궁극적으로 동서독 기본조약은 양독간의 교류와 협력을 증대시켜 상호간의 불신을 씻어내고 동족으로서 의 동질성을 회복시켜 1990년의 통일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을 해냈다. 동서독의 90년 통합은 이와같은 양측의 협력증대와 사회구축 없이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동독에 민주화와 개방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고 해도 두 분단 당사자 간에 교류와 협력의 길이 막혀 있었고 그로 인해 불신과 긴장의 벽이 그대로 짓누르고 있었다면 서로는 그처럼 89년 말처럼 서슴없이 다가서기 어려웠으리라는 데서 그렇다. 동서독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국경선만 존재 했었을 뿐 생활상으로는 사실상 통일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그러면서도 동독은 그때 까지도 에리히 호네커 공산당서기장의 철저한 독재하에 갇혀 있었다. 동독에는 자유와 개방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동독 주민들이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는 한 평화통일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들은 호네커 서기장의 강요에 따라 동독이란 노동자의 낙원이요 분단국 아닌 주권독립국이 므로 더 이상 통일 문제는 존재치 않는 것으로 믿어야 했다.
그렇게 철저히 관리되던 공산국가 동독에도 자유의 바람은 거세게 일기 시작하였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혁 열풍을 타고 폴란드 헝가리 체코스로바키아등에 민주화와 개방화의 함성이 일면서 이웃 동독으로 옮겨 붙었던 데 연유했다. 동서독 통일의 길은 1989년 가을 동독인들의 집단적인 서독 으로의 탈출로부터 뚫리기 시작하였다. 그해 9월부터 10월 초 사이 10만명에 달하는 동독인들이 헝가리 폴란드 체코주재 서독대사관 또는 동서독 국경선을 통해 서독으로 도망쳐 나왔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둘러처지던 해 20만 7천명의 동독인들이 빈곤과 독재의 경계선을 넘어 자유와 풍요의 서독으로 빠져나왔다. 베를린장벽 이후 89년 봄까지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인들은 63만 7천명 이다. 이들 중 24만 1천 8백명이 불법으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다. 이 불법 탈출자중 2백여명은 탈출 에 성공하지 못한 채 동독 경비병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되어야 했다. 그만큼 필사적인 탈출이 자행 되었다.
또한 서독으로의 탈출을 거부하며 1989년 까지 동독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반체제 민주화 시위를 격렬 하게 벌였다. 이들은 고르바초프의 애칭인 고르비를 연호하며 자유선거 언론자유 해외여행 자유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동독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는 민주화 데모와 고르바초프의 압력등으로 호네커 서기장은 18년동안의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호네커의 퇴임에도 불구하고 반체제시위는 날로 격렬해졌고 11월 4일 1백만명의 시위군중이 동베를린에 모여들었다. 10월 16일 카이프치히에서 12만명이 운집 대규모 집단화하기 시작한 민주화 시위는 2주일 만에 1백만명으로 증폭된 것이다. 데모 군중은 공산정권의 퇴진과 자유총선거를 절규하였다.
위기적 상황에 몰린 에곤 크렌츠 동독 공산당서기장은 11월 9일 하오 7시를 기해 드디어 베를린 장벽을 전면 개방한다고 선언, 동서독 장벽의 사실상 철폐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감격에 찬 '쥐드 도이체 차이퉁'지는 밀물처럼 국경선을 넘어 들어오는 동독시민들을 가리켜 사슬이 풀린 사람들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다고 적었다.
이 순간 동서독은 사실상 통일된거나 다름이 없었다. 남은 것은 통일의 절차 뿐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자유왕래가 실현되자 동독인들은 노골적으로 서독으로 편입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들은 우리의 목표는 하나의 독일이다라고 외쳐댔으며 빨갱이는 동독에서 물러가라는 구호를 연호하였다. 서독과의 국가연합을 주장하는 플래카드도 나타났고 통일독일 대통령에는 서독대통령 리히야르트 폰 바이츠제거, 유럽대통령에는 고르바초프를 추대하자는 글귀도 보였다.
결국 동독 정부는 열화와 같은 국민의 자유총선 절규에 국복 90년 3월 18일 총선을 실시하였다. 여기서 서독으로의 조기편입을 정강으로 내세운 보수정당 독일연합이 4백개 의석 중 1백 92석을 차지하였고 민주사회당으로 개명한 공산당은 겨우 66석을 건지는데 그쳤다. 통일과 관련 신중론을 펴던 사회민주당 도 88석을 얻는 데 불과했다.
동독의 3.18 총선은 동독인들의 대부분이 서독으로의 흡수통합을 희구하고 있었음을 반영하였다. 그에 따라 동독정부는 5월 18일 서독과 통화.경제.사회동맹의 창설에 관한 국가조약을 조인, 그해 7월 1일 부로 서독과 경제 통합을 결행키로 하였다. 동서독의 경제통합은 동독이 공산주의 경제를 포기하고 서독 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 흡수됨을 의미하였다.
이어 동독 인민회의는 서독기본법 23조에 의거한 동독의 서독편입일자를 1990년 10월 3일로 결정하다는 결의안을 8월 23일 채택하였다. 찬성 2백 94, 반대 62, 기권 7표라는 압도적 차이로 동독의회는 서독 으로의 흡수통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나선 것이다.
독의 서독편입 일자는 서독 기본법상 서독측이 비준 없이 동독의 결정에 의해 확정된다.
동독의 자발적인 서독편입 결의안 채택으로 동독은 1990년 10월 3일 0시를 기해 서독연방에 가입되었다. 이 날은 동서독 통일이 완성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통일독일의 초대 총리에는 콜 서독총리가 유임되었고 부총리겸 외상도 한스.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상이 맡았다.다만 동독의 로타르 데 메지에르 총리와 자빈느 폴 인민회의 의장을 비롯 5명의 동독정부 지도자 들이 통일독일 정부의 각료로 들어가는데 그쳤다.
통일을 이룩한 지 2개월만인 1990년 12월 2일 통일독일에서 총선이 실시되었다. 선거결과 집권 기독 민주당은 총의석 6백 56석중 3백 12석을 얻었고 동독 공산당이던 민주사회당은 고작 16석을 차지하는 것으로 머물렀다. 그밖의 의석들은 사회민주당의 2백 39석을 비롯 군소정당들로 분산되었다.
이와같은 동서독의 통일방식은 동독이 서독으로의 편입을 자청하고 나선 편입 또는 흡수통합 형태였음을 실증한다. 동독이 공산체제를 버리고 자유민주체제로 흡수된 통일인 것이다. 동독의 서독으로의 흡수 통합은 마치 부도난 부실기업이 우량기업에 자신을 흡수해 주기를 애걸한 것과 같았다. 통일 후 독일은 정치 경제 외교등 모든 면에 걸쳐 통일전 서독의 기본노선을 그대로 견지해 가고 있다.
원글 - 이을규님의 http://cgi.chol.com/~eulgyu/technote/read.cgi?board=sisa&y_number=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