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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통일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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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예멘통일
추천 : 2
조회수 : 36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8/01 20:47:04

예멘 통일의 특성


1.자유체제로의 평화 통일 : '예멘아랍공화국'(북예멘)과 '예멘인민민주공화국'(남예멘)은 1990년 5월 22일 통합을 선언하고 '예멘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남북 예멘의 통일은 공산체제였던 남예멘과 자유경제체제인 북예멘이 평화적으로 합칠 수 있었다는 데서 특성을 지닌다.
남북예멘은 아라비아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아랍국가들이다. 북예멘은 아라비아 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아랍국가들이다. 북예멘은 성서에 나오는 시바여황 영토의 일부였으나 16세기부터 터키의 지배하에 들아갔다가 1918년 독립하였다. 남예멘은 구약성서에서 번영하는 무역항으로 기술되었고 16세기 터키지배하에 묶이기 시작, 19세기 영국으로 넘어갔다. 이 나라는 1967년 영국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남예멘은 독립하면서 사회주의체제로 돌입하였다. 미국과는 단교하는 한편 중국과 소련의 원조를 끌어들였다. 남예멘은 아랍국가들 중 최초의 사회주의국가로 변신한 것이다. 남예멘보다 반세기 앞서 독립한북예멘은 자본주의시장 경제체제로 발전해 왔다. 국토에 있어서는 북예멘이 남예멘의 3분의 1밖에 안된다. 북예멘은 19만 4천 ㎢인데 반해 남예멘은 32만 3천㎢이다. 그러나 인구는 북예멘이 남예멘보다 3배나 더 많다. 7백 50만명대 2백 50만명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에 있어서도 북예멘은 남예멘을 앞서 있다 북예멘은 1988년 기준으로 6백 80달러인데, 남예멘은 4백20달러였다. 남예멘이 면적상으로는 북예멘보다 훨씬 넓지만 대부분의 영토가 뜨겁고 건조한 사막지대인데 반해 북예멘은 비교적 강우량이 많고 비옥한 땅이 넓다. 거기에다 남예멘은 비능률적인사회주의 생산방식과 분배방식을 강행해 왔기 때문에 북예멘보다 가난할 수 밖에 없었다.

군사력에 있어서도 북예멘이 우위에 있었다. 북예멘은 3만 8천 5백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고 1988년현재 5억6천6백만 달러의 국방예산을 쓰고 있으며, 남예멘은 2만 7천 5백명의 병력에 2억 2천만 달러의국방예산을 유지하고 있었다.

남북예멘은 1989년 11월 30일 통일헌법초안에 조인하였고 1년후에 통일준비단계를 거쳐 완전 통합에 이르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양국 국회는 6개월을 앞당겨 90년 5월 22일 통일헌법을 승인하고 통합을 최종적으로 선언하였다.

권력구조는 대통령, 대통령평의회, 내각, 의회 등으로 구성되었다. 통일예멘 공화국은 완전통일까지 2년반을 설정하고 이 시기를 통일이행기간으로 삼기로 하였다. 통일이행기간 동안에는 최고의사결정기관으로 5인으로 구성된 대통령평의회를 두기로 하였다.

5명의 평의회 위원은 북예멘 3인과 남예멘 2인으로 구성되었다.북예멘이 과반수의 결정권을 확보한 셈이다. 5명의 대통령평의회 의장은 대통령이 맡도록 되었고, 통일예멘의 대통령 또한 '알리 압둘과 살레'북예멘대통령으로 낙착되었다. 평의회 부의장은 부통령으로 보하기로 하였고 이 부통령은 남예멘 출신이다.

대통령평의회는 총리를 비롯 39명의 내각 각료를 지명하였다. 수상은 남예멘의 대통령이 맡게 되었고 각료 39명중 20명은 북예멘 사람이었고 19명은 남예멘으로부터 충원되었다.

통일 예멘의회는 북예멘의원 1백 59명과 남예멘의원 1백 11명을 모두 흡수하였고, 거기에 대통령이 31명을 추가로 임명, 3백 1명으로 하였다. 1992년 가을 새로이 복수정당제에 의한 총선거가 실시된다.

통일 예멘의 수도는 북예멘의 수도인 '사나'로 삼았다. 남예멘의 아덴에 외교공관을 두고 있었던 나라들은 서둘러 사나로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을 새삼 겪어야 했다.

이같은 남북예멘의 통합은 1990년 5월 22일 갑자기 실현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적지않은 충돌과 우여곡절이 따라야 했다.

남북예멘은 1972년 국경충돌을 일으킨 바 있었고, 1979년에도 국경분쟁에 휘말려야 했다. 이들은 1972년충돌을 계기로 리비아의 중재하에 통합운동에 나섰고, 1979년 분쟁이 휴전으로 끝나자 통일을 목표로한 '아덴협정'을 체결, 통일작업에 구체적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1986년 남예멘에서 개혁조치를 둘러싸고 지도부 내에서 유헐사태가 발생하자 예멘의 통일작업은뒷전으로 밀려나야만 했다. 그렇지만 양국은 1988년 국경지대의 유전을 공동으로 개발키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남북예멘은 같은 해 여행자유화조치를 취함으로써 통일의 길로 접어들었다.



2. 비례대표 통일 : 남북 예멘에 여행자유화 조치가 허용되자 그렇지 않아도 북예멘으로 탈출하던 사회주의 남예멘의 엑서더스는 더욱 증대되었다. 이미 사회주의 경제의 파탄으로 수만명의 남예멘인들이 국경선을 넘어 북으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남북 예멘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1989년 11월 30일 통일 헌법조인에 이르렀다. 성큼 통일로 다가선 것이다. 이어 이들은 1990년 6월말까지 통합헌법을 마련하고 국민투표를 거쳐 1990년 11월 30일통합을 최종적으로 선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남북예멘은 6개월을 앞당겨 1990년 5월 22일 통합을 선언하고 나섰다. 반년을 앞당긴 것이다. 그렇게 서둔 데는 몇 가지 연유가 깔려 있다.

첫째 이유로는 양측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것으로서 1990년 6월 28일 아랍정상회담에 단일 대표단으로 참석하기 위한 데 있다고 했다. 기왕 통합을 결정한 바에야 6개월을 앞당김으로서 아랍정상회담에 단일대표단을 파견, 통일 예멘의 위업을 세계에 과시하자는 것이었다.

남북 예멘이 통합을 앞당긴 둘째 대목으로는 일부 통일 반대세력에 대한 선제행위로 풀이되고 있다.

반대의 목소리가 커질 것을 우려한 남북예멘 지도자들은 미리 통합을 매듭지음으로써 후한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세번째로는 남예멘의 조기 통합필요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공산체제인 남예멘은 여행자유화조치을 단행함에 따라 더욱 불어나는 주민들의 북예멘 이주에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동독의 경우처럼 날로 빠져나가는 자국 국민의 대탈출로 남예멘은 빈껍데기만 남게되기 전에 통합을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소련에 의한 경제 군사지원도 크게 줄어들어 남예멘은 더욱 초조함을느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남북예멘의 통합은 몇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번째 특성은 사회주의 남예멘이 시장경제체제인 북예멘으로 흡수통합되었다는 점이다. 공산주의 체제인 남예멘이 자본주의 체제인 북예멘에 흡수된 것이다. 동독이 서독으로 통합된 것과 같은 것이다.

북예멘이 남예멘을 흡수했다는 점은 여러 측면에서 나타났다.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통일예멘의 대통령에 북예멘 대통령이 추대되었다는 것 부터가 그렇다. 또 5인의 대통령평의회 위원중 3명이 북예멘인 이라는 것도 그렇고 39명의 각료들중 과반수인 20명이 북예멘인이라는 데서도 확인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제통합에 있어서도 남예멘이 북예멘을 따라 시장경제체제로 재편하기로 했다. 남예멘은 공산주의 생산과 분배방식을 포기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하며 개인주택의 소유를 허용하는 등 시장경제체제의 방향으로 나갔다. 따라서 예멘의 통합은 북예멘의 시장경제원리가 남예멘의 공산주의체제를 흡수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두번째로 남북예멘 통합에서 볼 수 있는 특수성은 경제적으로 발전한 편이 뒤쳐져 있는 쪽을 흡수했다는 데 있다. 북예멘은 남예멘보다 1인당 국민소득에 있어서 앞서고 있었다.

북예멘이 남예멘보다 잘 산다는 사실은 북쪽으로 탈출하던 남쪽 사람들의 넋두리 속에 흥미롭게 표출되어 있다. 어느 남예멘 사람은 북예멘으로 도망치며 자동차 하나 고칠 정비공장마저 없는 남예멘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남북예멘의 통합은 경제적으로 발전한 측이 낙후된 쪽을 흡수한다는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또한 서독이 동독을 경제적으로 흡수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실상 경제력 외에도 북예멘은 남예멘을 인구 규모에서도 압도하고 있었다. 7백 50만 격차를 보이고 있었다. 단순히 인구만 보아도 남예멘은 북예멘에 빨려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될 정도이다.6천 2백만의 서독이 1천 6백만의 동독을 흡수한 것과 비슷한 경과이다.

세번째 예멘통합의 특성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전체주의를 이념적으로 흡수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자유시장경제원리에 바탕한 북예멘의 자유주의가 공산독재에 의존한 남예멘의 전체주의를 흡수해 버린 셈이다. 북예멘은 구미 선진국들처럼 자유민주주주의가 전체주의를 이념적으로 흡수했다는 것을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시장경제 원리에 바탕한 북예멘의 자유주의가 전체주의를 이념적으로 흡수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 지장경제원리에 바탕한 북예멘의 자유주의가 공산독재에 의존한 남예멘의 전체주의를 흡수해 버린 셈이다.

북예멘은 구미 선진국들처럼 자유민주주의가 성숙된 나라는 물론 아니었다. 북예멘은 회교교리에 의한 율법통치, 군사쿠데타의 악순환, 권위주의 통치 등을 면치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예멘은 자유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남예멘이 무산계급에 의한 일당독재체제와 전체주의체제속에 묶여 있었던 데 반해 북예멘은 자유를 지향하는 공화정을 펴고 있었다. 여기에 남북예멘통합은 자유를 쫓는 쪽이 자유를 거부하는 집단을 흡수한 것임을 재확인해 주었다. 예멘통일의 네번째 특성으로서는 두 정부가 합의에 의해 통합절차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멘아랍공화국과 예멘인민민주공화국 양정부가 통일정부의 권력지분까지 국력에 따라 안배해 가면서 합의점을 찾아 냈던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남북예멘의 통일은 분명히 북예멘에 의한 남예멘의 체제적 흡수통합이었음에 틀림없으면서도 그들은 상화 통일정부의 권력을 적당히 배분하는 여유를 보였다는 데서 그렇다. 대통령 평의회 3명 대 2명 국회의원의 ㅂ백59명대 1백 11명 내강의 20명 대 19명 으로서의 남북 안배가 그것이다. 대통령은 북예멘 대통령이 맡았고 총리는 남예멘대통령에게 할당되었다.

이와 같은 남북예멘의 통일정부의 권력배당은 국력차이에 따른 비례대표통일이란 특성을 나타낸다.

양측이 합의에 의해 통일정부의 권력배분을 나누어 갖는 것이 그것이다.



3. 통일 이후 정세 : 통일이후 예멘은 91. 5 국민투표에 의한 통일헌법(민주주의, 복수정당제, 언론자유 정책 표방 ) 채택하였으며, 93.4 아랍국가로서는 획기적인 자유민주 총선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Saleh 대통령 및 Al-Beid 부통령간의 불화가 심화되었으며, 93.8 이후 Al-Beid 부통령은 Aden에 칩거한 채 국정참여에 보이코트하는 등 요르단, 오만 등의 중재노력도 실패하였으며 94년초부터 미통합 상태의 남북예멘 군대간 무력충돌이 연발하였다.

그 결과 94. 5. 5 전면 내전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라크, 수단 등은 북측을 지원하였고, 사우디 등 GCC제국(카타르 제외)은 남측을 지원하였다. 94. 7. 7 북측의 승리로 내전은 종결되었으며, Al-Beid 등 남예멘측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하였다.



4. 내전 이후 정세 : Saleh 대통령의 국내 정치입지가 공고화되었는데, 94. 9.29 헌법개정을 통해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였다. 종래의 5인 대통령위원회 제도를 폐지하고, 대통령 임기 5년, 중임이 가능토록 하였으며, 94.10.8 예멘 사회당을 배제하고 국민의회당, 예멘 개혁당의 연정에 의한 신정부를 출범시켰다.

97. 4월 총선을 통해 국민의회당에 의한 단독정부 구성하였는데, 99년 대통령 선거에서 Saleh 대통령이 96% 이상의 지지를 얻어 정치 기반을 강화하였다. 또한 2001년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임기를 7년으로 연장하는 등 장기집권 체제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원글 - 이을규님의 http://cgi.chol.com/~eulgyu/technote/read.cgi?board=sisa&y_number=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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