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독. 점진적인 통일을 택하다.
1989 년 동독 정권의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갈 당시 서독은 원칙상 동서독의 통일에는 동의했으나 이것이 독일 경제에 큰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하여 동서독의 왕래를 제한하고 20여 년에 걸쳐 동독의 경제를 재건한 뒤(시간을 오래 잡은 것은 같은 기간 서독의 경제성장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 2010년대 초에 서독과 통일하는 형태의 점진적 통일방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독일의 분단 장기화를 원했던 프랑스와 소련, 독일 통일을 원칙상으로 지지하긴 했지만 그렇게 적극적인 지지를 하지는 않았던 미국과 영국은 서독의 입장을 수락하여 동독의 장래에 대한 우선권을 서독이 가지되, 정식통일은 먼 미래의 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언제까지나 가상 역사이지만 실제 서독 내에서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기도 합니다. 과연 이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요?
2. 1989~1990년 당시 동독의 상황
우 리는 당시의 상황이 동독 내 기득권층을 제외한 대부분이 통일을 지향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다릅니다. 당시 동독의 일반인. 그 중에서도 나이든 세대와 청년 세대. 그리고 공산체제 붕괴 이후 대안으로 떠오른 동독 내 개혁세력 간의 이해관계는 상상 이상의 차이를 보였던 게 사실이며 특히 동독 내 기성세대 및 개혁세력들이 원했던 동독의 미래는 통일이 아니라 영구분단 이후의 민주 동독의 수립이었습니다. 서독과의 적극적인 교류 및 평화 공존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동독에서 누구보다(심지어 공산 기득권층보다도) 통일을 반대했던 것이죠.
이 러한 민주 동독은 1980년대 말 동구권에서 대거 들어서기 시작한 민주 정부들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 호네커 이후 동독 공산정권으로부터 동독 내 개혁세력이 권력을 넘겨받아 민주 정부를 수립. 1948년에 세워진 독일연방공화국의 동쪽에 존재하는 독일민주공화국의 존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의외로 실현 가능성이 높았는데 당시의 동독의 상황을 보면 동독주민들의 여론이 반공산주의였던 건 분명하지만 이를 넘어 급속통일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는 계층은 주로 능력 있는 계층. 청년층뿐이고 대부분의 기성세대 및 지식인들은 통일을 반대하고 있었던 게 현실입니다.
이 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청년층의 경우 서독과의 통일을 통해 자신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충분한 기회를 갖게 되는데다 잃을 것도 없어서 모험을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기성세대 및 지식인들의 경우 나이가 많아 그만한 기회가 없었던데다 잃을 것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대학교수 등 각종 지식인층을 형성하던 동독 내 개혁인사들은 슈타지 연계가 없다 해도 대부분 통일 이후 실업자로 전락하여(앙겔라 메르켈 같은 사람은 극히 예외적인 케이스에 속합니다) 자신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습니다.
더 욱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동독은 충분히 자립이 가능했는데 일반적으로 동독의 경제가 파산했다는 이야기는 통일 이후 동서독의 경제통합 과정에서 경쟁력을 잃었기에 벌어진 일이고 그런 일이 없었다면 동독은 독자적인 경제를 구축할 능력을 충분히 갖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동독의 기술력 및 이를 받치는 기반은 서유럽 기준으로 보면 뒤떨어졌다고 해도 동구권 국가들을 기준으로 보면 최상위권이었고 실제로 동유럽 국가들의 발전과정을 통해 동독이 독자노선으로 나아갈 경우 어떻게 될지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합니다.
3. 만일 통일을 점진적으로 하기로 결정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따라서 독일 통일은 주변국들의 방해도 심각했던데다 동독 내부의 여론도 결코 통일 쪽으로 몰려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라 통일을 점진적으로 하기로 결정했다면 다음과 같은 사태가 벌어졌을 공산이 큽니다.
(1) 정치
정 치적으로 공산체제가 몰락할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서독이 통일을 미루고 점진적인 통일 혹은 영구분단을 선언할 경우 동독 여론 내에 남아 있던 통일 회의/반대파. 특히 재야 개혁세력의 입지가 급부상할 건 분명하고 이들은 서독과의 평화공존 및 민주 동독을 지향하면서 1990~1991년쯤 소련에 종속된 공산국가 독일민주공화국이 아닌 일반적인 민주국가 독일민주공화국을 수립하게 될 것입니다.
물 론 서독이 영구분단이 아닌 점진통일을 선언할 경우 언제든 동독에 대한 우선권을 가질 수 있으므로 그 지위가 불안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는 국제사회가 해결해 줄 것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과 영국은 독일 통일을 지지하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밀어주지는 않았고, 프랑스와 소련은 독일의 분단이 장기화되기를 원했으며, 특히 1991년 소련 해체로 독일의 통일에 관여할 수 있는 나라는 더욱 늘어나게 됩니다. 즉 서독이 뒤늦게 통일을 원한다 해도 실현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죠.
개 인적인 생각이지만 서독이 1989년 시점에 점진통일을 선택했다면 이는 '민주적 영구분단'의 신호탄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서독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동독 체제에 반대하던 개혁파, 민주화 운동가들. 즉 동독 공산정권이 붕괴되면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들의 대부분은 서독과의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 경제
물 론 동독경제가 파산지경이라 서독과의 통일이 없었다면 바로 망했을 거라는 주장도 있긴 합니다만 이건 통일 이후 동서독 경제의 통합 과정에서 동독 경제가 매력을 잃어 외국 투자를 유치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오히려 영구분단으로 이어졌다면 동독 경제는 동유럽 각국으로 분산된 서방의 투자 상당부분을 받아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올렸을 공산이 큽니다. 현재의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에서 그나마 성공했다는 국가들보다 잘 살 것은 분명하며 그 이상의 소득을 올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이 런 시나리오가 가능한 것은 동독의 경제 기반이 생각보다 튼실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서유럽보다 뒤떨어진 건 사실이고 이것이 동독 붕괴의 한 원인이었지만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뒤늦게나마 외부 투자를 유치하고 기반을 재건하면서 해결해나갈 수 있었고 게다가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동독만큼 수준이 높은 나라가 드물었기에 동독은 서유럽 및 미국 자본에게 있어 어느 나라보다도 매력적인 투자처 중 하나였다고 봐야 합니다.
물 론 초기에는 경제 침체를 겪겠습니다만 곧 외부의 대규모 경제 지원을 받아 고도성장의 형태로 살아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동독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먹여살릴 인구도 적은 만큼 국민소득의 상승 역시 다른 나라보다 훨씬 빠를 것으로 보여집니다(대신 폴란드 등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성장은 다소 느려질 수도 있습니다. 동독이 이들에게 주어져야 할 외부 투자를 잠식할 것이기 때문이죠).
(3) 사회
초 기에는 동독 청년층의 서독 탈출을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서독 정부가 쏟아져 들어오는 동독 청년층의 존재에 난색을 표하면서 이들에게 주던 각종 혜택을 점차 줄이고 동독 본토의 경제가 재건되기 시작하면 동독인들의 상당수는 다시 동독에 돌아올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민주화가 이미 이뤄진 만큼 반체제 인사들 역시 줄줄이 동독으로 떠나겠죠. 장기적으로는 서독 내 동독 인재의 동독 귀환으로 인한 서독의 인재난까지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즉 통일하는 것에 비해 전반적인 생활수준은 낮다고 해도 장기적인 성장동력의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유리합니다.
또 한 네오나치나 극좌 등 각종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구 동독 체제 혹은 전체주의를 갈망하는 이들의 존재 역시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했을 것입니다. 동독에서 네오나치 등 극단주의 세력이 판을 치게 된 것은 통일 이후 동독인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진행된 극심한 경제난이 장기화되면서 동독 지역이 말 그대로 '초토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독이 독자노선을 걷게 된다면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보다 더 빨리 잘살게 되고 청년층도 서독과의 통일은 좌절되었지만 대신 동독 내에서 먹고살 길이 더 많이 열리게 되면서 극단주의에 경도되는 일이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4. 3과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경우 서독에서 생겨날 일
일 반적으로 서독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통일은 동독에게는 극심한 손해, 서독에게는 다소 손해를 보고 큰 이익으로 돌려받는 장사였습니다. 이런 통일을 정작 극심한 손해를 입게 될 동독인들이 적극 지지하고 반대로 이익을 볼 서독인들이 반대한 것은 단기비용을 고려한 일종의 오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 쨌거나 3과 같은 사태가 벌어져 동독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다면 처음에는 서독인(현재는 구연방인들로 통칭)들도 통일비용으로 고생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생각해 보면 통일로 인해 서독으로 들어올 동독의 잘 교육받고 아는 것도 많은, 서독 사회 전반에 만연한 인적자원 부족을 메꿀 수 있는 '생세포' 가 부족해지게 됩니다. 외부에서 수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단순 막노동에 종사할 기본적인 능력만 가진 인재가 아닌 진짜 제대로 된 인재는 어느 나라에서나 잡으려고 총력전을 벌이고 있고 그나마 미국과 서유럽 등에 국한되었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한국, 대만 등 신흥 선진국들에 이런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던 일본까지 뒤늦게 가세해 말 그대로 전쟁터가 따로 없죠. 얼마나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동독과의 통일로 얻은 이익에 비해 크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게 다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서독이 동독에 들인 비용은 의외로 큰 편이 아닙니다. 물론 GDP의 5% 가량을 들인 게 적은 건 아니지만 동독이라는 국가를 말 그대로 '빨아먹은(의도적인 건 아니나)' 것 치고는 싼 돈이죠. 독일의 국가부채 증가 등 전반적인 경제적 침체는 독일 자체의 고령화와 선진국 진입으로 인한 저성장으로 봐야지 동독이 미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기뻐하겠지만 곧 현실을 깨달은 서독인들은 자신들이 어리석은 판단을 했다고 후회할 것이고 정치적으로 상당한 혼란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동독인의 존재로 인해 확대될 공산이 큰 내수시장 역시 상당부분 포기하여 수출의존도도 큰 폭으로 높아질 것이고 이 역시 고스란히 서독의 부담으로 돌아오는 등 통일을 하지 않은 대가는 통일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5. 결론
그 럼 이제 결론을 내 보겠습니다. 서독이 점진적인 통일을 선택했다면 처음에는 서독인들의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독일 통일에 반대하던 프랑스와 소련은 아예 대놓고 서독을 '칭찬' 하겠죠. 하지만 이후 동독은 재야세력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및 시장경제 도입으로 사회의 활력을 더욱 강화하고 외부 투자 유치를 통해 경제를 빠른 속도로 재건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동독에 귀속감을 갖고 있으나 공산체제에 대한 반감으로 서독에 들어온 사람들까지 동독으로 귀환하여 서독은 통일비용을 아낀 대가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게 됩니다. 즉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통일을 외면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셈이죠. 물론 동독 역시 통일 시나리오에 따른 서독과의 통합에 비해서는 경제규모가 줄어들 것이므로 손해가 없진 않습니다만 서독만큼 크지는 않을 겁니다.
그 렇다면 서독이 왜 급속통일을 했는지도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일단 동서독이 '한 민족' 이라는 의식이 있었고 자의로 분단된 게 아니니 과거사 반성. 나치 배제 등 제대로 된 상식적인 국가로만 태어난다면 통일은 당연한 조치였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통일비용에도 불구하고(통일비용의 규모를 다소 오판한 건 사실이나) 동독 인력의 흡수를 통한 서독 경제의 활성화. 인구 자체의 증가를 통한 내수시장의 팽창 기회의 부여 등 그 이상의 엄청난 이익이 기다리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즉 서독은 자신들이 손해볼 줄 뻔히 알면서도 통일을 한 게 아니라 이익이 되기에 장기적으로 보고 통일을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급속통일이 아닌 점진적 통일을 했으면 좋겠지만 고르바초프가 언제 실각할 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는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모 든 결정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서독의 통일비용이 그림자라면 동독인구와 영토의 흡수를 통한 기반 확장과 경제 활성화는(그게 동독의 초토화를 유발할 정도로 심해서 문제가 되긴 하지만) 빛이었습니다. 통일비용만 봐서는 서독이 동독과 통일을 한 이유를 알 수 없으며 여러 가지 면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 주의 -
이 글은 한국이 아닌 독일의 통일에 관해서 개인적인 생각을 적은 글임을 밝혀둡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독일과는 지정학적인 상황도, 인구 구조도, 북한 인구의 자질도, 경제 규모 및 격차도 다르기 때문에 통일이건 영구분단이건 독일과는 다른 결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큽니다.
원글 - 메이즈님의 http://lusianpait.egloos.com/2307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