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김덕진 펴낸곳 : 푸른역사 펴낸날 : 2008년 12월 9일 (초판1쇄) 읽은때 : 2011. 10. 7. ~ 10. 11. [한뫼도서관에서 빌림]
"1670년(현종 11)과 1671년(현종 12) 두 해에 걸쳐 연이어 대기근이 들었는데, 그것을 '경신대기근'이라고 한다. 이 대기근은 조선을 강타해 무려 1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한국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으로 조선 사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기근은 전염병의 창궐로 이어졌고 민생은 파탄 지경에 이르러 사회는 불안의 늪에 빠졌다. 기후 변화가 남긴 대재앙이었다. 조선 정부는 여러 시책을 펼치며 위기 탈출을 모색했다. 그 점에서 17세기는 대기근의 시대이자 위기의 시대였다. 이 책은 '경신대기근'에 관한 것으로, 대기근에서 비롯한 17세기의 위기와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역사는 조선 후기 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경신대기근' 당시 자연재해의 현황을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대기근의 참혹함과 민심의 동향을 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조정의 대책도 자세히 검토하였다." (5쪽,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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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기후 변화는 조선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이 시기에 이상 저온과 일기 불순 현상이 장기간 지속되었고, 갖가지 자연재해도 뒤따랐다. 대기근이 발생했으며 전염병이 유행했다. 위기가 일상인 시대였다. 조선 사회는 충격에 빠져 뿌리까지 흔들렸다. ㅇ이것이 내가 발견한 17세기의 모습이다. (12쪽)
* 《실록》에 수록된 천변재이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기근과 전염병이 가장 심한 시기는 1651~1700년이었다. 이 기간은 생존 환경면에서 조선왕조 역사상 최악의 시기라고 한다. (14쪽)
* 조선왕조는 500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기근을 두 차례나 겪었다. 모두 17세기에 있었다. 첫 번째는 1670년(현종 11년, 경술년)과 1671년(현종 12년, 신해년)에 연이어 든 '경신대기근'이다. 두 번째는 1695년(숙종 21년, 을해년)과 1696년(숙종 22년, 병자년)에 연이어 든 '을병대기근'이다. (16쪽)
* '경신대기근'은 그 전개 양상이 특이하고 복잡하다.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휩쓴 온갖 자연재해, 사상 초유의 식량 위기, 유례없는 전염병으로 대재앙이었다. 국가 재정이 고갈한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돌고, 죽고, 도둑질을 하고, 살상을 하고, 변란을 꿈꾸었다. 극복 과정에서는 위정자들의 시행착오와 정파 간의 의견 차이가 드러났다. 이웃 국가의 불안정한 정정은 재난 극복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17쪽)
* 소빙기는 16~17세기 또는 17~18세기에 지구의 기온이 내려가 추운 날씨가 많고 이에 따라 빙하의 면적, 두께가 넓고 두꺼웠다는 사실을 부각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다. 빙치가 아니라 소빙기라고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만 년 전에 시작해 10만 년 전에 끝났다는 빙하기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용어는 학명(學名)이 아니라 한 신문기자가 만들어 쓰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편의성 때문인지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다. (이태진, 소빙기 천변재이와 조선왕조실록, 《역사학보》, 1996, p.203) (22쪽)
* 소빙기 현상이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시기, 즉 소빙기가 절정에 이른 시기는 17세기라는 것이 역사학, 기후학, 지리학, 지질학, 수목학, 빙하학 등 여러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따라서 소빙기는 곧 17세기인 셈이다. (22쪽)
* 소빙기 기후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잦은 가뭄과 홍수를 유발하는 일기불순이 장기간 반복하는 현상, 지구의 평균 기온이 1~2도 내려가고 서늘한 여름과 한랭한 겨울이 잦아 이상 저온이 장기간 지속하는 현상이 지적된다. 이 가운데 소빙기 기후의 전형적인 특징은 이상 저온이다. (23쪽)
* 13세기에 몽고족이 심각한 가뭄을 겪으면서 고려를 포함한 전 세계를 침공했듯이, 17세기에는 만주 대륙의 추위로 만주족이 중국으로 진격하고 조선을 침략했다. 소빙기 기후로 동아시아에서 명·청 교체, 왜란, 호란 등 침략과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조선이 그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29쪽)
* 인간 생존에 가장 필요한 식량이 고갈되어 굶주림이 지속되는 현상을 기아(飢餓)라고 한다. 기아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인류의 영원한 숙제로, 자연적 혹은 인위적 원인으로 발생한다. [...] 자연적 원인에 의한 기아는 기근(饑饉)으로 발생한다. 기근은 흉작으로 식량이 고갈되어 사람들이 굶는 상태를 말한다. 자연재해를 인력과 기술로 막지 못하면 흉작을 맞게 되고, 흉작은 무역과 비축이 미비한 조건에서 결국 기근을 남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단순힌 굶주림에 그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굶주려 죽고 민심이 동요하는 상황으로 확산되는 경우가 있다. 편의상 전자를 소기근이라 한다면, 후자를 대기근이라 할 수 있다. (32~33쪽)
*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을 보자. 이는 우리나라의 각종 제도와 문물 관련 기록을 정리한 방대한 책이다. 1770년(영조 46)에 왕명에 따라 처음 편찬되었다가 1782년(정조 6)에 보완된 후 1908년(순종 2)에 다시 보완되었다. 이 책은 천문학과 천변재이에 관한 상위고(象緯考)로 시작해 여지고(輿地考), 제계고(帝系考) 순으로 편집되었다. 상위고를 왕실에 관한 제계고보다 앞서 배치한 것은 국가 통치에서 천문 관측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 상위고에 수록된 역대 기근 현황을 보면, 조선 왕조 개창부터 1908년까지 기근은 총 104회나 되어 대략 4.9년마다 한 번씩 기근이 발생햇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대기근은 총 25회로 20년마다 발생했다. (34~35쪽)
* 일본인들은 이관 대상지로 웅천 외에 부산성, 초량, 다대포, 거제, 순천 등을 지목했다. 조선 정부는 순천을 허락하면 호남 조운의 길이 끊어지며, 웅천과 거제를 허락하면 통영이 제구실을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대했다. 논란을 거듭한 끝에 조선 정부는 초량을 후보지로 지목했다. 일본인 기술자 150명과 조선인 기술자가 공동으로 작업한 이설 공사가 착공된 지 3년 후인 1678년(숙종 4년)에 완성되었다. 신왜관은 구왜관의 10배가 넓은 10만 평 규모로 조성되어 이후 200년 가까이 조선과 일보 외교의 창구 역할을 수행했다. 이 이설 공사를 단행한 정치 세력이 바로 남인이다. (86쪽)
* 하늘의 움직임은 농사, 민심, 왕권, 국운과 관련한 중대사였다. 조선왕조는 천문 관측을 위해 관상감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60명이 넘는 천문관과 관천대(觀天臺)라는 관측 시설을 두었다. 매일 다섯 명씩 돌아가면서 하늘을 관측하고, 혜성이나 객성 등이 출현해 성변(星變)이 일어나면 《성변등록》이라는 자료에 기록하고 임금에게 보고했다. (100쪽)
* 지진이 일어나면, 정부에서는 향과 축문을 내려 보내 도내 중앙에서 해괴제를 지내게 했다. 예로부터 지진을 하늘의 경고라거나 병란의 징조로 여겼기 때문에 하늘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해괴제라는 제사를 지낸 것이다. (102쪽)
* 조선 정부는 가뭄에 대비해 제언사(堤堰司)라는 관청을 두어 수리 시설을 관장하게 하고, 저수지를 축조해 물을 가두고 제방을 쌓아 물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혹심한 봄가물은 그동안 기울인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말았다. (114쪽)
* 예조는 도성 사대문(四大門)에서 영제를 지냈다. 영제란 오래도록 장마가 있을 때 서울의 사대문 다락 위에서 날이 개기를 비는 제사다. 불과 두세 달 사이에 극과 극의 기우제와 기청제를 번갈이 지내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120쪽)
* 황충이란 황과 충을 말한다. 황이란 누리[메뚜기]로, 풀, 나무, 소나무, 잣나무의 잎을 갉아 먹는 피해를 내기 때문에 그 재해를 황해(蝗害)라고 한다. 그리고 충이란 벌레로, 알곡을 갉아 먹는 피해를 내기 때문에 그 재해를 충해(蟲害)라고 한다. (128쪽)
* 예부터 홍수, 역병, 우역, 황충, 폭설 등의 재해가 있으면 의례히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기도를 올렸는데, 그 자세한 규정은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포제는 황충의 재해를 물리치기 위해 올리는 제사로 여제, 영제 등과 함께 대사, 중사, 소사 가운데 소사(小祀)로 분류되어 있다. (129쪽)
* 전염병은 정확한 이름도 없이 염병(染病), 여역, 역병(疫病) 등으로 불렸다. 원인도 모른 채 느닷없이 찾아온 전염병에게 사람들은 순식간에 온마을을 빼앗겼다. 당시 사람들은 전염병이 서쪽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다. 늘 전염병이 서북 지방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사실 전염병은 북서풍의 바팜을 타고, 혹은 연행사를 따라간 상인들의 무력로를 통해 동쪽으로 옮겨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염병을 당나라, 즉 중국에서 왔다고 당학이라고 했고, 오늘날 학자들은 '무역병'이라고 한다. (133쪽)
* 서울에는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등의 의료기관이 있었다. 내의원은 약방이라고 부르는데 국왕의 진료를 주목적으로 한다. 저느이감은 의약 행정과 의학 교육을 맡는 기관이고, 혜민서는 공무 의료와 함께 대민 의료를 맡는 기관이다. 또 도성 안의 전염병 환자를 전문 치료하는 활인서(活人署)가 동소문 밖 연희방(동활인서)과 남대문 밖 용산강(서활인서) 등 두 곳에 있었다. 따라서 서울에서 발생한 전염병 환자는 이 활인서에 수용되어 구호를 받았다. 공조, 진휼청, 의국은 환자를 수용할 움막용 천막·자리, 급식용 식량·간장·소금, 치료용 의사·약재를 활인서에서 지원했다.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수용했다. 어린이와 부녀자들은 의녀(醫女)들이 돌보았다. 어쨌든 서울은 헤택을 누리고 있었다.
* 1670년은 대기근의 해다. 이 대기근은 또 재해를 만나 1671년까지 이어졌다. 1670~1671년 대기근을 '경신대기근'이라고 한다. '경신대기근'은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대기근으로 최대 규모의 식량 고갈 상태를 가져왔다. 삶의 터전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행을 예고하는 전주곡이 도처에서 연이어 들려왔다. (161쪽)
* 굶주림을 이겨내는 데에 곡식과 함께 소금만 한 것이 없다. 바닥난 곡식을 대신해 초근목피를 먹을 때 소금을 넣어야 먹을 수 있다. 기근시 소금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다. 소금은 생명수와 같은 매우 귀중한 물품이다. 그런데 소금을 굽는 바닷가와 섬사람들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와 이리저리 유랑했다. 소금 생산이 중단되고 사재기까지 겹쳐 소금 값이 평년의 배에 이를 정도로 오르자 채식 기아자들에게 소금은 그림의 떡이었다. (166쪽)
* 1670년에서 1671년 사이 수도 서울과 전국 팔도에서 전염병에 감염되었다고 보고된 수는 무려 5만 2천 명에 이른다. 그리고 전염병으로 사망했다고 보고된 수는 무려 2만 3천 명 이상이나 된다. 감염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고 만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숫자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제대로 보고될 리가 없는 행정 체제와 보고할 수도 없는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87쪽)
* 현종은 관련 규정을 보완한 '수양유기아사목(收養遺棄兒事目)'이라는 규례를 만들어 서울과 지방에 반포했다. 이 사목에서는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른 경우 양민, 공노비, 사노비를 불문하고 본인과 그의 소생까지 모두 영구히 노비로 삼되 15세를 한도로 삼는다고 했다. 그리고 16세 이상이면 본인에 한해 신분이 약간 자유로운 머슴으로 삼고 그 소생은 그대로 노비로 두게 했다. (205쪽) * 조선 정부는 기근이 들 때마다 진휼청을 설치하다가 인조 때부터 상설화했다. 진휼청은 기근 시 비축곡을 풀어 곡물을 대여하거나 판매할 뿐만 아니라 양곡과 죽을 제공했다. 따라서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는 방도는 진휼 정책의 관제탑이라 할 진휼청을 조기에 정상 가동하는 데서 시작된다. (224쪽)
* 1670년 한 해에 중앙 부처에서 진휼에 사용한 재물 집계가 나왔다. 쌀 4만 2,400석, 콩 6,570석, 좁쌀 1만 1,200석, 보리 9,800석, 밀 900석, 은 6만 6,800냥, 무명 45동, 포 280동, 소금 500석이었다. 여기에 지방에서 사용한 수량은 포함되지 않다. 실로 엄청난 국가 재원을 기근 구제에 투입한 것이다. 대기근은 막대한 곡물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230쪽)
* 1671년 1월, 서울과 지방 모두 진휼소 설치를 완료했다. 진휼소는 진제소(賑濟所), 진소(賑所), 진장(賑場)이라고 하고, 죽을 쑤어 제공한다고 하여 보통 죽소(粥所)라고도 불린다. (231~232쪽)
* 세금 가운데 가장 먼저 논의된 것이 군역(軍役)이었다. 조선의 양인 남자는 만 16세가 넘으면 60세가 될 때까지 각급 관아와 각종 군영에 배속되어 군역을 져야 한다. 군역 대상자 가운데 일부는 번상군(番上軍)이라 하여 현역으로 입영하고, 나머지 대다수는 군보(軍保)라 하여 군포 두 필만 납부하면 된다. 한 가정에 보통 군역 대상자가 두 명에서 네 명 정도 되기 때문에, 군포는 무거운 부담이다. (255쪽)
* 해가 저물어 갈 무렵, 김좌명이 국가 지출을 줄이는 방안을 다각도로 제시했다. 돈이 천하에 통행되는데 유독 조선에서만 유통되지 않는다며 동전을 주조하자고 건의했다. 동전 주조를 주장한 의도는 상업 진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수입 확보에 있었다. 일본에서 구리가 유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주조가 불가능하지 않았다. 임금도 허락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에 김좌명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8년 후 숙종 때 남인 정권하에서 대기근으로 구멍난 국고를 메우기 위해 상평통보를 발행했다. (272쪽)
* 임금과 허적은 훈련별대나 정초청을 모두 존치한 채 군포 징수와 상번군 입영을 연기하는 선에서 군대 혁파론을 잠재우려 했다. 그런데 언관직에 있는 대소 신료들은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으로 군사비를 감축해야 한다며, 양 부대를 혁파하자고 공격의 포문을 늦추지 않았다. 어물쩍 넘어갈 수 없는 분위기였다. (276쪽) * 진휼에 쏟아 붓고 세금을 탕감하느라 생긴 국고 구멍을 메우기 위해 국가 예산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군사비와 왕실비를 감축했지만 만족할 만한 효과를 거두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체 세원을 개발해 재정 수입을 늘리는 길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해 재물을 받고 신분과 관직을 파는 납속(納粟)이 활용되었다.
왜란과 호란 때 군량미와 복구비 조달을 위해 시행했던 납속은 인조와 효종 때부터 진휼비 확보를 위해 시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현종 초기에 연이어 기근이 들자 정부는 모곡별단을 제정해 대대적으로 납속을 실시했다. (283쪽)
* 지중추부사 유혁연은 "지금 방매하여 기민을 구제하고 면천 이후 군역에 충정하면 양편의 일이 됩니다"고 한술 더 떳다. 이들은 백성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달리 진휼할 방법이 없으니, 한 사람이라도 더 구제하기 위해서 구차스럽지만 명분에 집착하지 말고 노비를 방매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노비 면천 주창자들의 본심은 유혁연의 발언에 집약되어 있었다. 대기근으로 군역을 담당할 양인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호·탈적 양인을 색출함과 동시에 노비를 양인으로 승격하는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286쪽)
* 납속에 응한 자들의 목적은 신분에 따라 각각이었다. 양반은 품계와 관직을, 서얼은 허통을, 액외 교생은 면강을, 양인은 면역을, 노비는 면천 종량을 얻는 데 있었다. 즉, 납속을 통해 자신의 현재 신분을 한 단계 상승시키는 게 그들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따라서 납속은 신분제 사회에서 자신의 신분을 세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경로 가운데 하나로, 돈만 있으면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제도였다. 대기근이 하층민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를 준 셈이다. (288쪽)
* 마침내 조선 정부는 1697년에 청나라에 양곡 지원을 요청했다. 처음 논의된 지 30년 가까이 지나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청나라는 다음해에 압록강변 증강에 쌀 3만 석을 실어와, 1만 석은 무상으로 제공하고, 2만 석은 유상으로 판매했다. 무상 원조 1만 석은 기근이 가장 심한 평안도와 황해도의 기민 구휼에 사용되었다. (293쪽)
* 오히려 괴담을 악이용해 부추긴 측면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특히 서인이 그러했는데, 그들은 정국 반전을 꾀하기 위해 괴담을 적극 활용했다. 이 때문에 한 번 생긴 괴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파되었다. (3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