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모 전투는 텍사스 독립 전쟁 당시에 텍사스 주민 186명이 알라모 요새에서 1000명에 달하는 멕시코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전투이다. 13일간의 포위로 산타 안나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군은 산 안토니오 데 벡사(오늘 날의 샌안토니오) 근처의 알라모 전도소를 강습했다. 2명의 텍시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전사를 했다. 그 전쟁동안 인식된 산타 안나의 잔인함은 많은 텍사스 사람들을 분노를 사서 텍사스군에 입대를 하게 했다. 복수심에 불탄 텍시언들은 1836년 4월 21일 샌재신토 전투에서 열세에도 불구하고 멕시코군을 물리쳤고,텍사스 혁명을 종결시켰다.
원래 알라모는 스페인의 전도소로서 1718년 샌안토니오 데 벡사(현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에 건설되었다. 19세기 초반 스페인군 기병대가 주둔하여 이 요새를 알라모 요새라고 불렀다. 멕시코에서 독립을 획책하던 앵글로색슨 계 텍사스 주민들은 샌안토니오시를 점령했다.
1835년 12월 텍사스 독립 전쟁 초기에 텍사스 의용군 부대는 멕시코군을 몰아내고 샌안토니오 시와 알라모 요새를 점령했다. 샘 휴스턴 등 몇몇 텍사스군 지도자는 소수의 병력으로 멕시코의 대군을 이기기는 불가능하다가 판단하고 샌안토니오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알라모 의용군들은 후퇴하기를 거부했고 이후에 1836년부터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군이 샌안토니오를 탈환하고 알라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코스 장군의 패배로 멕시코군은 테하스 주의 거점이 없어졌다. 반면 멕시코는 이듬해 대통령 겸 장군인 산타 안나가 반란군 진압을 결정했다. 산타 안나는 1836년 초에 산 루이스 포토시로 약 6,100명의 병사와 20문의 대포를 모아 테하스 주를 거쳐, 코아우일라 주의 살틸로까지 진군했다. 군대는 악천후 속에서 리오그란데 강를 건너 눈보라 속에서 산길을 진군했다. 샌안토니오 데 벡사는 중간 타격 목표 중 하나였다. 그의 최종 목표는 텍사스 정부를 잡고 반란을 일으킨 주에 대해 중앙의 지배, 혹은 멕시코의 "중도" 정권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1835년에 이미 사카테카스 주의 반란을 진압한 바 있었다.
1836년 2월 23일 산타 안나와 그 군대는 샌안토니오 데 벡사에 도착했다. 보병 대대를 절약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을 혼성한 부대였다. 그들은 영국제의 베이커, 구식으로 사거리는 짧지만 위력있는 타워 머스켓, Mark III, 브라운 베스 머스켓 등을 갖추고 있었다. 멕시코군은 평균 신장 155cm로, 그 대부분이 전투경험이 없는 초보 징집병이었다.
멕시코군대은 개별적인 개별 사격 솜씨는 열등하지만, 자주 표적을 맞추는 수준이었다. 초기 장비는 178mm 곡사포 4문, 4 파운드 (1.8kg)포 7문, 6파운드(2.7kg)포 4문, 8파운드(3.6kg) 포 4문과 12 파운드 (5kg) 포 2문을 가지고 있었다.
멕시코군은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남쪽에서 접근해 알라모 요새에 대한 포위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멕시코군은 1800~6000명에 달하는 대군이었으나 알라모 요새를 지키는 텍사스 의용군은 소수 부대에다가 텍사스 주민과 나중에 보강된 증원군 약간인 186명 정도였다. 텍사스 의용군의 지도자는 제임스 보위 대령과 윌리엄 B. 트래비스 대령이었고 유명한 데이빗 크로킷도 텍사스 의용군 수비대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3월 6일까지 13일에 걸쳐 멕시코군에 대항해 저항했으며, 막바지에는 탄약이 떨어져 총을 막대기로 쓰며 저항했다. 그러나 마침내 1836년 3월 6일 멕시코군은 안마당 외벽의 무너진 틈을 타 물밀듯 들어왔고 183명의 텍사스 의용군은 전사했다. 멕시코군도 1000~16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전사했다.
브라운 베스 머스킷
베이커 라이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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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안쓰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