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짜증나고 답답한 나날이다. 기름값에 짓눌린 경제는 살아날 줄을 모르고 조만간 나아질 기미도 보이질 않는다. 선량한 시민을 자처하는 수천 군중이 연일 촛불집회를 열고 밤늦도록 시위를 벌인다.
여론의 몰매를 맞은 정부는 얼이 빠진 듯 어찌할 줄을 모른다. 임기가 시작된 국회는 아직 개점도 못한 채 휴업 중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는 게 없고, 산뜻하게 매듭지어지는 것도 없다. 촛불집회에 참석해 대통령을 실컷 욕하고 애꿎은 전경들에게 화풀이를 하면 속이라도 시원하련만, 그러지도 못하는 대다수 국민들은 그저 속만 새카맣게 타 들어갈 뿐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촛불집회가 드디어 정부의 백기 항복을 받아냈다. 흡사 정의로운 국민들의 주장이 승리한 듯한 모습이다. 정부가 그토록 안 된다고 우기던 재협상을 하겠다고 굴복했으니 이겼다는 생각을 가질 만도 하다. 그런데 그게 다일까. 정부를 이긴 것으로 다 끝난 것인가. 촛불은 이제 꺼질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촛불집회는 쇠고기로 시작됐지만 그 불꽃을 키운 것은 쇠고기만이 아니었다.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이들의 면면을 보라. 각계각층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였다. 광우병 걱정도 걱정이지만 촛불 확산의 배후(?)에는 우리 사회의 온갖 불만과 불안 요인이 담겨 있다. 광우병으로부터 아이를 지키겠다는 순진한 아주머니부터 0교시 수업이 싫은 중고생, 대규모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두려운 공기업 노조원, 기름값 상승으로 생계를 위협받는 영세민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불만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전이되면서 촛불의 열기가 증폭됐다. 물론 여기에는 시민들의 불만에 편승한 일부 좌파단체와 야당의 부채질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쇠고기 재협상이 관철됐다고 이들의 불만이 해소되거나 이명박 정부의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다. 불만은 여전히 거기에 남아 있고, 정부의 무능도 그대로다. 촛불집회가 일시적으로 잠잠해지더라도 언제 재발화할지 모르는 잠재적 폭발성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런 불만과 불안의 일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국민들은 10년 진보정권의 무능에 질려서 보수 정부를 택했다. 보수의 강점은 성실과 효율이다. 그걸 합쳐서 실용이라고 해도 좋다. 국민들은 이 정부가 도덕적 흠결은 있어도 일 하나만큼은 똑 부러지게 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취임 100일도 안 돼서 그 기대가 무너졌다. 부자 정부는 제 주머니 불리는 데는 능했을지 모르나 나라 살림을 챙기는 데는 한없이 무능했다. 그 결과가 지지율 20% 안팎의 추락이다.
그렇다고 야당과 재야의 진보세력이 대안은 아니다. 이들은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이미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지금은 촛불집회에 얹혀서 이명박 두드리기에 여념이 없지만 정작 국민의 불만을 달래고 미래를 보장할 아무런 해법도 내놓지 못한다. 그저 무책임하게 이명박 정부의 추락을 즐길 뿐이다. 야당에 대한 지지율은 10%대에 그친다. 국민들은 보수도 싫고 진보도 싫다는 것이다. 무능한 보수와 무책임한 진보라는 최악의 조합에 질렸다.
얼마 전 한 금융인이 서브프라임 사태로 만신창이가 된 금융회사들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대차대조표의) 오른편(자본항목)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고, 왼편(자산항목)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고. 이 말을 뒤집어 우리나라의 현실에 적용해 보면 ‘오른편(보수 우파)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게 없고, 왼편(진보 좌파)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보수와 진보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국민들의 헛헛한 마음이 끝내 방향 잃은 화풀이나 무기력한 좌절로 이어질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