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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학생운동과 일본의 리즈시절.(좋은브금있음)
게시물ID : history_51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ealgura
추천 : 4
조회수 : 5455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2/07/28 15:01:12




BGM정보: http://heartbrea.kr/index.php?document_srl=2595916



간지


존레논 오노요코 헬멧 간지. 




미시마 유키오의 동경대 배틀   몸 좋네요... 


정예로움이 느껴집니다. 장비 잘 갖췄네요. 


코리안 팔랑크스 







80년대 일본거리. 리즈시절이죠.... 




80년대 일본 cf. 버블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오죠.... 



전학공투회의(일본어: 全学共闘会議 젠가쿠쿄토카이기[*])는 1960년대 일본 학생운동 시기에, 1968년에서 1969년에 걸쳐 각 대학에 결성된 주요각파의 전학련이나 학생이 공동투쟁한 조직이나 운동체를 말한다. 일본 공산당 보수정당으로 규정하고 동경대를 중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학생운동이다.[1]

약칭인 전공투(일본어: 全共闘 젠쿄토[*])로도 불린다. 전공투와 같은 1960년대 말 일련의 학생운동은 통틀어 전공투운동이라고 부른다.

 전공투 운동 이전의 학생운동은 수업 방해를 주로 했기 때문에, 대학측의 양보를 쟁취한 성공 사례가 드물었다. 이에 비해 전공투 운동에서는 전술로써 본관봉쇄, 바리케이트 시위라는 실력 행사를 동방하는 싸움을 전개해, 교관, 직원의 출입을 방지하는 전투방법을 전개한 것이 특징적이다.

오차노미즈 여자 대학에서는 1965년 9월 22일부터 기숙사규정개악반대를 외치는 전학무기한수업방해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업방해에 대한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9월 30일의 학생 대회에서 수업 방해를 풀었다.

다카사키시립경제대학에서는 1965년 9월에 시측이 재정난을 이유로 사학화를 제안했다. 교수회는 이를 반대하였고 학생도 교수회를 지지해서 사학화는 중단되었다. 시측은 대신해서 수업료의 대폭인상을 내세웠고, 학생은 수업료인상 반대투쟁을 조직했지만 시위대를 촬영한 사진 등을 근거로 처분자가 이어졌다.

학생운동의 발단은 각 대학에 따라 각기 달랐지만, 일반적으로 '전공투'라고 불리는 것은 아래의 니혼대, 도쿄대에서의 전공투운동이다.

1968년 5월, 니혼 대학에서 도쿄 국세국의 가택 수색에 의해 22억 엔의 용도불명 자금이 발각되었다. 당시 니혼 대학에서는 학생자치회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 용도불명 자금 문제를 계기로 대학당국에 대한 학생의 불만이 폭발해 5월 23일에 니혼 대학 최초의 시위인 '이백미터 시위'가 일어났다. 5월 27일에는 아키타 아케히로를 의장으로 일대전공투가 결성되었다. 이사회에서는 전공투의 요구에 대해 9월 30일에 학생과 당국의 교섭의 장으로써 '전학집회'를 료고쿠 강당에서 개최했다. 이 집회에는 3만 5천명의 학생이 참가해 전공투측은 '대중단체교섭'을 외쳤다. 12시간의 교류 후, 당국은 경리공개와 이사전원의 퇴진 등 전공투측의 요구를 일단은 받아들였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어 사토 에이사쿠 수상이 '대중단체교섭은 상식을 벗어나있다'라고 간섭하여, 당국측이 학생과의 약속을 철회하였다. 직후의 기동대 투입에 전공투측 학생은 박수로 맞이했지만 기동대는 반대로 전공투측 학생만을 진압했다. 이로 인해 일대투쟁은 진정되었지만, 일부 학생은 도쿄대 투쟁등에 합류한다.

도쿄대에서는 의학부 인턴 문제에 대한 학생에 대한 부당처분을 발단으로, 대학 당국에 대한 항의 활동이 높아져 야스다 강당을 일시 점거한 후, 7월 5일에는 야마모토 요시타카를 의장으로 동대전공투가 결성되었다. 동대전공투도 니혼 대학처럼 대학내의 건물을 바리케이트 봉쇄해, 당국과의 대중단체교섭을 요구했다.

1969년 동경대 10개 학부 중 법대를 제외한 9개 학부를 장악하고 야스다강당 점거를 시작한다. 혁명의 유일한 전위임을 자처하는 일본 공산당은 공개적으로 전공투를 비판했으며, 야스다 강당 점거를 막으려는 공산당 학생위원회격인 민청과 물리적 충돌이 있었고, 민청은 이후 강당 무력 진압을 양해하는 각서를 정권측과 교환한다. 이 당시 일본 학생운동의 대표체격인 총5파 학생운동조직 중 3파가 합류한 이른바 3파전학련과는 무관한 별개 흐름의 운동으로 분류한다. 야스다 강당 점거가 진압된 이후 이들은 무장투쟁을 선언하며 파출소를 습격하여 총기를 탈취함으로써 이른바 연합적군이 탄생한다.{[1]

전공투는 처음에는 학비문제 등 각 대학 개별의 문제를 다루는 조직, 운동으로서 각 대학의 학생자치회의 테두리를 넘어 결성되었다. 그 후 대학당국의 경직된 대응이나 정부와 기동대의 개입을 경험하는 가운데 점점 전학화하여, '대학과 학생, 연구자의 자세를 다시 본다고 하는, 대학의 이념과 학생의 주체에 대한 운동'이 되어갔다.[3] 전학 바리케이트 봉쇄는 제국주의대학 해체의 정치성을 가지는 동시에 자기부정의 사상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듯 도쿄대 투쟁에서 '대학해체', '자기부정'이라는 슬로건이 등장하였고, 대학내 문제의 테두리를 넘어 '학생과 국가권력 사이의 싸움'이라는 형태가 만들어졌다. 각 대학에서의 타협 등으로 종결할 수 있는 투쟁이 아니게 되어, 이후의 투쟁 패배 후에는 운동이 단번에 해체되는 원인도 되었다. 당시, 학생으로서 와세다 대학 투쟁에 가담했던 구레 도모후사는 '자기부정은 자기긍정이다. 출세를 위해서 학문을 하면 할수록 학문의 본래 의미로부터 벌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이 자기부정이다. 자기부정은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긍정의 결과 출현하는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1968년 11월 22일, 도쿄대 야스다 강당 앞에서 '도쿄대, 니혼대 투쟁 승리 전국학생 총결기집회'가 열려, 2만명 가까운 학생이 모였다. '이 결기집회가 후의 각 대학에서의 전공투 운동의 원점이 되었고, 또 그 운동 가운데에서 빛나는 피크'가 되었다. 또 11월 1일에는 도쿄대 오오코치 가즈오 총장, 전학부장, 평의원이 분쟁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68년~69년에 걸쳐 30여 대학이 바리케이트로 봉쇄된 채로 해를 넘쳤다.

1969년 1월 18일~19일, 전공투가 바리케이트 봉쇄한 야스다 강당에 8500명의 기동대가 공격을 개시해 72시간에 걸쳐 공방이 거듭되었고, 동대전공투의 운동은 수습되었다. (야스다 사건)

그렇지만 '도쿄대 투쟁의 해산으로, 전공투운동은 전국에 들판의 불길과 같이 퍼져갔다.' 1969년 무렵에는 교토 대학을 시작으로 홋카이도 대학, 도호쿠 대학, 히토쓰바시 대학, 도쿄 외국어대학, 도쿄 교육대학, 시즈오카 대학, 신슈 대학, 가나자와 대학, 오사카 대학, 나고야 대학, 오카야마 대학, 히로시마 대학, 규슈 대학, 구마모토 대학, 메이지 대학, 주오 대학 등, 일본의 주요 국공립 대학과 사립 대학의 8할에 해당하는 165개 교가 전공투에 의한 투쟁 상태에 있거나 바리케이트 봉쇄 상태였다.

전공투는 각 대학의 각 주요당파의 연합체에 일반학생에 다수 참가한 형태로, 특정한 사상이나 조직,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경과의 전개, 형태와 평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당시 가두 투쟁을 행했던 삼파전학련이나, 그것을 지도했던 공산주의자동맹,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신좌파의 여러 당파와의 관계도 활자화된 기록이 중심이다. 또한 삼파전학련과 전공투를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당사자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는 '1970년대에 들어 뉴레프트 당파간의 내분에 의해 100명 이상의 살인이 발생한 이외에, 연합적군에 의한 린치 사건, 아사마 산장 사건이나 일본적군에 의한 요도 호 사건 등의 사건에 의해 급진적인 학생운동은 급속도로 지지를 잃어 자연발생적인 전공투는 급속도로 붕괴했다.'라고 평가된다. 그렇지만 '어떤 당파도 무당파운동도 연합적군 사건에 의해 활동력이 줄었다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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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죽창 팔랑크스와 한번 붙여보고 싶은 생각이 들정도로 한때 날리셨던 전공투 세대들입니다. ㄲㄲㄲ 

일본에서도 저런 시절이 있었었죠.  저거 참여하셨던 형님,누님들중에 일본의 여러 시민단체등에 투신하셔서 여러가지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죠. 

 제가 전공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였고 하루키의 냉소적인 시선을 많이 느꼈었죠. 하루키는 주인공을 통해서 자기가 직접 경험했던 학생운동 세력들을 까댑니다. 미제국주의니 대학해체니 혁명이니 뭐니 외쳐대던 학생들이 아무렇지 않게 복학하고 취업활동을 하고 ibm같은 대기업들에 취업하는 모습들을 비웃으면서 까대죠. (익숙한 모습이죠.) 

무라카미 하루키 


많은 실망감을 안긴 영화. 감독이 원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 차라리 한국감독이 찍었으면 꽤 수작이 됐을듯.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이 양적 질적으로 엄청난 경제성장을 하게 되고 리즈시절이 찾아오고  80년대에 사실상 정점을 찍게 되는 영광의 시간속에서 미제국주의니 사회주의니 혁명이니 뭐니 하는 얘기들은 일본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됩니다. 

  자민당의 1당 독재(?)기간은 사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리즈시절이었고 행복한 시절이기도 했었습니다. 종신고용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독특한 경영방식은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이를 벤치마킹 하기도 했었죠.  사람이 굶어죽는게 일본의 복지정책의 현실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지만 기업이 사회복지의 상당부분을 감당하고 또 국가는 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형태의 일본식의 사회안전망은 오랜시간동안 잘 굴러갔고 일본이 안정된 사회를 이루고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올라서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억 총중류사회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리즈시절의 일본은 굉장했었죠.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일본이 유일하게 성공했었던 공산주의 국가라는 우스갯소리를 하시더군요. ㄲㄲㄲ  

 버블붕괴 이후에 일본경제가 침체기를 겪고 신자유주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일본의 빈부격차가 계속해서 벌어지고 젊은이들의 무기력증이 사회문제가 될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지만 일본인들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죠.  아직까지는 아시아 유일의(?) 선진국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는 그런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본받아야 할 점들이 아직은 많죠. 


그건 그렇고 80년대 일본 미녀가수나 한번 보시죠. 브금으로 깔린 곡입니다. 


마츠다 세이코 - 푸른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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