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모네이드님
전근대시대의 통계 자료는 대체로 기록물에 의존하거나 추론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문제는 뭐냐면 상대적인 국가를 의도적으로 비교하기 위해서는 한 쪽에 대해서는 추산이라는 점을 들고, 나머지 한쪽의 자료는 마치 올바른 통계에 의한 결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선과 일본의 인구에 대한 이야기는 둘 다 추산입니다. 특히 일본의 막부 체계는 오히려 더 통계가 조선보다 부실했음에도 조선의 통계적 부실을 지적하고, 일본의 통계적 부실을 비판하지 않은 채 생각하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학자들이 조선시대 경제에 관해 연구하던 중 하나 확실한 것은 퇴계 이황의 자녀들에게 상속된 토지와 후일 장자상속과 관련된 토지 상속을 비교 연구한 것이었습니다. 전기에는 분명 조방적 농업이어서 자녀 균등 상속을 추구했습니다. 조선전기에는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토지 상속이 장자 상속 중심으로 바뀐 것은 소규모 경작지를 상속 받아도 생활이 가능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즉, 집약적으로 바뀌었지요. 그런데 항상 이런 점을 쏙~ 빼먹고, '조방적'이라는 좀 더 후진적임을 강조하는 용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사 발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 보다 부분만 취사해서 그 시대를 특정짓는 모습은 그다지 올바른 학습 방법은 아니지요.
그 대표적인 것이 구리와 같은 물품 부족 기록을 이순신 장군의 공문에서 찾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국가라도 전시 상황에서는 전시 물품의 부족이 다반사입니다. 현대적 공업 체계를 갖춘 나라였던 일본제국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구리, 철 등의 금속이 부족해서 공출해가는 마당이지요. 당연히 전시 상황에서는 상업이나 일상적인 광업조차 마비되는데 그 기록이 군사 화기 제작 능력과 결부 짓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애초에 조선은 화포와 총통 제작마저 돈이 없어서 못 만든다가 주 내용 아니었나요?
그래서 제가 조선 전기의 화포 생산과 제철 능력을 자료로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구리와 동과 같은 물품 조달 능력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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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숙종연간에 조선의 구리 구입 요청량에 맞추기 위해 대마번은 일본 막부에 연 20만근(약 120톤)의 수출을 요청했으나 그만한 양은 일본에서도 감당하기 쉽지 않는 터라 막부는 연 10만근(약 60톤)을 한계로 정한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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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서 쓰신 내용입니다. 숙종 연간이지요. 조선의 구리 구입 요청량에 맞추기 위함이었으나 일본에서도 그 정도의 수출량은 감당할 수 없다입니다. 달리 생각해봅시다. 경제력이 그토록 후진 국가였으면 저 정도 물량을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일종의 구매력입니다. 공무역 상의 국가간 구매력이지요. 그리고 조선 전기에 삼포 등 왜와의 교역을 임의적으로 조정하는 건 일본이 아니라 조선이지요. 즉, 조선 관점에서 일본에서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의 필요성이 적었거나 아니면 우회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교역 루트가 이미 마련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업적 관계를 통해 교린 정책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1860년대에 이미 백과사전이 있다는 말과 그것이 치열하게 연구되었다라는 점의 결부성입니다.
200여종의 누에 관련 백과사전이 있다는 점과 일본인이 내재적으로 치열하게 연구했다는 것은 결부될 수 없는 일입니다.
난학과 청나라와 조선으로부터 도서를 수입하는 일본의 입장에서 그것이 집대성되었는지 직접 연구했는지는 연구자가 명확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설사 치열하게 연구해서 그런 백과사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조선과의 비교에서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는 차후 문제입니다. 마치 조선은 연구조차 하지 않은 무지랭이 국가로 생각하게 하는게 의도인지 모르겠습니다만은..
님의 논지 중 가장 큰 문제는 '취사 선택'을 너무 왜곡해서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화폐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의 화폐 경제 문물이 발달했다라는 것으로 17세기와 18세기 전반의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격 정찰제 등의 문구가 붙어있었다는 '화폐 경제가 일상화되었다'라는 근거는 됩니다. 그런데 그 이상의 목적은 없습니다. 제가 17세기 일본의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 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논쟁의 촛점과 상관이 없는 내용으로 상당히 채워져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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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 오사카의 장인들은 평지씨에서 램프 기름을 추출하거나 원면을 옷으로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중고품을 손질해서 다시 판매하는 일에 종사했는데 스기모토 일가를 비롯한 동 제련업자들은 당시 오사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노동력 시장을 형성 했으며 17개의 제련소를 통해, 대략 만 가구 이상이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1710년대에는 2천여명이 넘는 직업 목수들이 오사카에서 살면서 배를 만들었고 도매상을 비롯한 유통업자, 삯꾼, 운송업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17세기에 일본인들은 필리핀, 샴, 캄보디아에도 진출했고 1673년엔 에치고야가 세운 포목점에선 "현금만 취급, 가격 정찰제"라는 유명한 문구를 표어로 세웠고 오사카와 교토에 분점을 세우기도 했죠,
당시 일본의 에도, 오사카, 나고야, 그리고 가나자 같은 도시들은 평균적 수준인 10만을 넘어서고 일본 전체 인구의 5% - 7%가 대도시에 집중됬다는 것은 당시 유럽의 2%에 비교해 보면 일본의 도시화 수준은 상당했고 이를 넘어서 일본을 아시아에서 최고로 도시집중화된 국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인데, 이는 도시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사태를 만들었고, 다른 지역에서 물자를 조달해야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여러 지역들의 특산화를 유발시켰습니다. 특히 남큐슈산 장뇌와 시이케산 버섯, 도사산 재목과 숯, 도야마산 약품, 고후산 포도는 대도시에서 상당한 가격에 판매된 품목들이었습니다.
또한 전국시대를 거치며 다이묘의 정책들은 물물교역을 전국적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들의 사업에는 막대한 현금이 필요했고 그들의 수입은 농민들로 부터 받는 미곡이었는데, 이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오사카에 보내야 했습니다.
이에 대한 결과로 해마다 100만석의 쌀이 오사카의 도매상을 통해 유통되었으며 그 양은 1720년대에 4배가 증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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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공업이 일본에서 많이 발달했고, 화폐 경제가 활발했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셨지요?
근데 문제가 뭐냐면 애초에 '곡물 생산량 만큼 수공업 또한 경제력 판단기준으로 큰 비중이다'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물품의 현금 교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전체 생산액과 전체 곡물 생산액을 비교하는 것이지요.
일본의 근세이고, 세계적으로 말하면 전근대시대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산업화 이전의 시대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시대에 수공업에 대한 서술 방식은 '활발했다' 정도입니다. 다만 님 스스로 증명한 것이 상당한 현금을 구하기 위해서는 쌀을 현금으로 교환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지요. 그 말인즉슨 결국 일본조차도 당시에는 상품 작물이 성장했지만 막대한 현금 교환력은 미곡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뭐 이런 단어는 미사여구이자 비교 연구에 아무짝에 쓸모가 없구요. 이런 단어로 논문 쓰면 교수한테 욕 쳐 듣습니다. 특히 계량이 필요한 분야에서 말이지요.
반대로 생각해봐요.
님이 주장하는 일본 그러니까 조선에서는 조선 후기죠. 조선 후기에는 화폐경제 없었나요? 있었어요. 대동법의 정착 이후에는 조선시대는 화폐경제로 이양했지요. 그 전(전기)에도 '은'을 썼습니다. 다만 봉건제의 일본과 달리 채굴권은 국가가 가지고 있었지요.
그리고 정말 잘못 이야기하신 것이 이양법의 보급으로 조선의 영세 농민층이 분화되었다라고 합니다. 이건 오히려 상업 발달의 근거입니다.
이양법과 광작 등으로 같은 양의 노동력으로 더 많은 경작지를 운영할 수 있어서 소작농들이 임노동자가 되지요? 이것이 자본주의 발달을 위한 첫번째 단계이기도 하지요. 부농층은 부르조아로 발전하게 되는거고 '인신 지배'와 '경제적 지배'였던 소작에서 벗어나는 것은 잉여 노동력의 발생이라는 것이지요. 당연히 역사책에서 배우는 것처럼 조선 후기 사회에는 수공업이 전기에 비해 많이 발달했습니다. 임금 노동자도 생겨났구요. 수원화성 건축 당시에 '일당제'였다는 사실도 그러한 흔적 정도는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조선 후기에 도시에 몰려든 노동자를 위해 각종 건축 사업을 하기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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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농의 감소를 가져와 영세농가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고 농민층의 분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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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만 적어놓으면 안 되죠. 농민층 분화를 이야기했으면 그 분화된 농민층이 어찌되었는지도 말해야 하는겁니다. 근데 진실은 그 분화된 농민층이 도시에서 임노동자가 되었고, 상업과 수공업, 국가 주도의 사업에서 일당제 노동자가 되었다는겁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양반 인구의 증가에서 보듯 일반 양인들도 부농층이 생겼습니다. 족보를 살 정도로 경제력이 있는 부르주아급 농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또한 조선의 토지 소유 구조는 중층적 토지소유권입니다. 즉, 명시적 토지 소유권과 소작권은 따로 있습니다. 함부로 소작농을 내쫓을 수 없고, 지주가 직접 경작이 가능해서 소작인의 의미가 없을 때나 내쫓는 것이지요.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서 악용하는 빌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일본만 그랬던 것은 아니구요. 조선도 수공업이 있고, 장인이 있고, 상인이 있었다는겁니다.
애초에 '곡물 생산량만으로 당시의 경제력을 확정지을 수 없다'라는 주장을 하시면 '일본은 가내수공업과 광업, 상업 등을 통한 부가가치가 곡물 생산 이상으로 존재해야 함'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국이나 프랑스 마저도 그들의 본래 농업인 포도, 밀, 목축으로 얻어지는 이득에 비해 공업은 5%도 안 되는걸요.
그 당시 전세계적 공업 수준이란 그 정도입니다.
그나마 유럽의 경우에는 대외 교역이 활발해서 18세기쯤 되면 그 장인들이 부르조아로 발달할 정도로 부를 축적할 수요와 그 공급을 맞춰줄 시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에도 청나라 내부의 수요가 존재했기 때문에 장인들의 개인들의 사업 규모는 컸지요.
그런데 일본의 경우에는 18세기를 넘어야 인구 폭증으로 어느 정도 그 수요에 걸맞는 사업이 이루어집니다.
일본이 유럽보다 국제적 원격지 무역 수준도 안 되고, 교역량도 적었는데, 곡물 생산량의 비중만큼 수공업 비중을 늘릴 수가 없구요. 비중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면 절대적인 산업 생산량의 증가가 아니라 곡물 생산량 자체가 적어서 생기는 비중 확대 효과일 뿐이지요.
일본이 무슨 국제적으로 강대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거든요. 그 사실은 분명한겁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에 일본은 쇄국정책을 하는 동아시아의 한 나라였고, 에도와 오사카, 규슈의 외세 문물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자! 다시 논의를 맞춰보죠.
곡물 생산량만으로 경제력을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많다고 하셨죠?
일리가 있습니다. 공업과 상업으로 발생되는 부가가치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요.
그런데 당시의 수공업은 그 수준 자체가 농업에 비할바가 못 됩니다. 적어도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그렇습니다.
농업의 기술 축적과 규모가 역사적 축적을 통해서 굉장한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갓 태동한 수공업의 생산 수준은 아주 일부분이고,
상대적으로 통계에서 역전시킬만한 여지가 부족하다는겁니다.
[출처] 조선과일본 인구의 역전과착각|작성자 zixiace
[출처] 조선과일본 인구의 역전과착각|작성자 zixiace
저번에 말씀드린 International Geary Khamis 있지요. 그 지표 평가에는 1인당 소비, 인구수, 곡물의 가치, 명목 화폐의 가치가 있습니다.
즉, 아무리 인구가 많아도 식량 부족을 느끼는 국가라면 이러한 통계에서 평가 절하되는 것이지요. 1인당 소비 수준이 확 떨어지기 때문이고, 상대적으로 곡물의 가치는 다른 나라에 비해 높아지겠지만 인플레이션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곡물의 가치와 화폐의 가치는 실질 물가를 반영하기 위한 지표입니다. 즉, 물가가 높은 국가에서 소비수준이 높으면 경제력이 높다라는 판단이 서게 되는 것이지요.
일본을 봅시다. 곡물에 대한 물가는 높았습니다. 인구수는 조선보다 약 1백에서 2백만 정도 많구요. 그런데 문제는 1인당 소비 수준이 떨어진다는겁니다. 여기서 소비란 주로 곡물을 이야기하지요. 왜냐구요? 19세기 이전에 일본이나 조선이나 주 소비는 '곡물'입니다. 의식주에서 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당시의 서민적 삶을 평가하는 것이지요. 국제적으로 교역하거나 일본 내에서 교역되는 다수의 수공업 제품은 사치품이거나 관용 물품 조달입니다. 대외 교역은 제한적이었지요. 은광의 부가가치요? 왜은을 팔아서 쌀을 사고, 그 쌀 가격에 은의 가치가 고정되지요. 왜냐? 결국 1인당 소비를 하는건 서민들의 식량이었지요. 하지만 에도시대에 은의 주 역할은 소비재 구입과 무기 구입입니다. 무! 기!는 1인당 소비에 전혀 포함 안 됩니다. 왜은이라는 것도 각 다이묘들의 관용 조달품을 구입하는데 쓰이지요. 서양 물품 중에서도 사치품이나 기술과 관련된 물건들 말이지요.
[출처] 조선과일본 인구의 역전과착각|작성자 zixiace
즉, 적어도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에서 수공업의 비중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활발했니, 수를 헤아릴 수 없니라고 해도..
절대 다수의 인구가 종사하는 곳은 결국 농업이었습니다. 일본 또한 농민층이 몰락해서 도시의 임노동자로 몰리는 것은 메이지 유신 즈음입니다. 그래서 도시의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에서 미곡 수입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게 되는 것이구요.
그리고 가장 본질적인 논쟁으로 가봅시다.
전 16세기 이전의 경제에 대해서만 논의하고자 하는데 왜 그 이후의 자료만 들이미시는지 참 이해할 수 없군요.
16세기 이전을 말하라는겁니다.
18세기 이후에 일본이 경제력이 발달했고, 성장한거 맞습니다. 누가 뭐라하진 않지요.
그런데 문제는 레모네이드님은 조선의 통계는 '부정확하다', '추산에 불과하다', '기록을 살펴봐도 근대적으로 이양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천시했다' '체제적 한계가 있다'라는 형태의 근거만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일본은 '선진적이다', '통계를 보니 매우 활발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유럽보다 도시화 진척률이 높았다' 입니다.
이 모든 전제는 일본의 통계는 신뢰성이 있다에서 출발합니다. 근데 당시 통계 기술은 조선이 일본보다 낫습니다.
중앙 집권적 국가에서 행하는 행정적 통계와 막번, 다이묘들이 행하는 봉건적 통계는 차이가 큽니다.
오죽하면 일본 내부에서도 근세 일본의 인구에 대해서는 도시의 인구를 상업인구로 보고 그 상업인구만큼 무사가 있는 것으로 1:1 치환해서 고평가했다는 연구가 지금도 있습니다. 참근교대제에 의해 인구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고, 에도 인구도 요즘 보정해서 68만명으로 봅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노비라는 이유로 기술 천대하지 않았구요. 당시 은 제련기술 유출한 두 사람의 이름 기록하고, 중앙 정부 차원에서 논의했습니다. 실록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일본에 가서 인정받은게 아니고, 조선은 자체적으로 그러한 기술에 대한 기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왜놈이 은을 가지고 무역하러 오는 것은 근년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의 나쁜 무리들이, 몰래 왜 놈에게 은 만드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런 중대한 폐해가 일어난 것이다." - 중종 실록 -
동아시아 경제 역사 연구에서 일본이 주도권을 가진 것이 1900년 이후부터 거의 100년 동안입니다.
그 사이에 중국이나 한국의 학자들은 '식민지 근대화론' 방어에 올인했지요.
즉, 논쟁의 대상이 중국과 한국의 전근대 경제 체제에 대한 연구입니다.
정작 일본의 경제사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 학자들이 비판적인 시각에서 연구할 틈 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연구가 군국주의 학자들에 의해 '일본 우위성'이라는 목표로 연구가 진행되었고, 왜곡된 통계를 보정하는게 지금 실태입니다.
그래서 참근교대제의 문제로 막번과 다이묘들의 통계가 엉망이라는 사실도 최근에서 교정되고 있고,
본격적으로 비판적 자세로 일본의 전근대 경제사를 연구하는 걸음마 단계입니다.
한마디로 지금은 일본 경제사를 비판적으로 판단할 연구가 미흡한게 현실이지요.
레모네이드 님은 지금 군국주의 식민지 경제학자들이 제시한 통계를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어요.
본인은 모르겠지만 지금 일본의 에도시대 연구가 대부분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월성'만 잔뜩 입증하는것이지요. 그를 위해서는 사소한 기록마저도 침소봉대하게 만듭니다.
대표적인게 님이 가져오신 '가격 정찰제 표지판 사례' 뭐 이런 것들이지요. 경제사 연구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 시대가 13세기면 '우왕ㅋ 굳ㅋ 13세기에 일본에서는 이미 화폐 경제가 자리 잡았어!!'라고 할테지만 17~19세기에는 뭐 모르는것도 아니고, 이미 국제적으로 왠만한 나라에서는 화폐 경제가 태동하거나 자리잡은 상태에서 뭘 새삼스럽게입니다.
그리고 제발 조선과 일본의 우열을 위한 학습이나 주장은 쓰지 마세요. 저도 귀찮아요.
19세기 이후에 일본이 니네가 잘 살았어. 저 인정합니다.
우리나라 '해야 될 과제 못 해서 식민살이했어' 저 인정하거든요.
역사에 만약은 없고, 세도정치와 삽질해서 쇄국했다 맞거든요.
그런데 왜 그 전의 우리의 역사마저도 저질에 열등한 체제라고 말하는건지 참 이해가 안 되요.
환빠? 그 개소리랑 같이 엮는 것자체가 물타기라고 봅니다.
정 그렇게 주장하고 싶다면 경제사 대학원 들어가셔서 논문을 한 편 쓰십시오.
자료 모아서요.
자료를 취사선택을 하는건 좋은데, 좀 이상하게 하지 마시구요.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서학'을 찾아보세요. 오히려 선비들 중심으로 당시에 유학 뿐만 아니라 서학책이 널리 유행했었습니다.
18세기에 말이지요. 하지만 조선왕조의 인신적 지배체제라는 한계 때문에 체화가 못 되었고, 일본은 봉건 체제라 인신적 지배 체제가 무너지자 마자 유행하게 되지요. 이러한 차이로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제발 논쟁의 촛점은 정확하게 하고 합시다.
전 양란 이전의 조선의 경제력이 일본에 뒤쳐진건 아니다. 더 나았다라고 말하는데 왜 자꾸 양란 이후를 근거로 이야기하나요? 자료와 기록 자체가 이 논쟁에 의미없는것들 아닙니까? "양란 이전에는 조선이 더 잘 살았어. 왜냐구? 그전엔 일본이 왜은도 별로 못 생산했고, 곡물 생산량도 얼마 없었고...그 당시에 수공업도 별로였고, 인구수도 우리랑 비슷했거든"이라고 말을 하니..;;
님은 "17세기부터 일본은 국제적 도시도 많고, 수공업도 발달했는데 비해 조선은 농업과 기술, 수공업 모두 개판이었어"를 이야기하고 있는겁니다.
그래서 기껏 '아놔~ 양란 이후 말고 양란 이전"이라고 포커스를 맞춰놨고, 그 기록으로 세종실록이나 16세기 인구, 16세기의 쌀 생산량, 16세기의 은 제련 기술, 제철 기술 등을 읊었더니...
또 님은 "16세기의 조선 인구 통계는 추정치에 불과하고.... 18세기 초의 오사카는 어떻고, 에도는 어떻고 도시화율이 어떻고, 당시에 물물경제와 화폐 통화를 위한 일본의 노력은 어떻고....심지어 1860년(메이지 유신 근처)까지 가서 일본에는 백과사전도 있었는데..." 이런 소리를 하는겁니다.
자료와 기록을 지나치게 자신에게 유리한....자료와 기록에 의한 결론이 아니고, 결론을 만들어내고 자료와 기록을 선택하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겁니다. 애초에 논쟁이 된 시기 자체가 다른데...왜 자꾸 엉뚱한 시대를 가지고 와서 반론이랍시고 내세우는겁니까? 그래서 제가 데이터를 제시하지 않습니까? 일본애들이 연구한 일본의 인구변화, 일본의 봉건제에서 추산될 수 있는 경작지 면적, 쌀 생산량 같은거 말이지요.
그리고 레모네이드님 처음에 뭐라했는 줄 아시나요? 조선의 기술자에 의해 일본의 은 제련기술이 발달했다라고 하니 "그런 근거가 있냐?"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답을 하니 이제 와서 "조선 기술자에 의해서 연은분리법이 발달한 것은 사실입니다"....이런 말을 하시는군요.
님 리플입니다.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member&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istory&no=5094&page=1&keyfield=&keyword=&mn=252699&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3203179&member_kind=total
여기서도 님은 제 본글과 상관이 없는 반론을 제시하셨지요. 걍 근현대경제사 책을 좀 읽으시길 바랄께요. 일일히 자료 찾아서 글 쓰는게 좀 헛짓거리 같습니다. 딱히 잘 받아들이시는 것도 아니고... 제 시간 낭비지요. 황금같은 여름 휴가에..
그리고 일본의 통계자료...우리보다 더 개판입니다. 에도시대 말이죠.
아마 아시는 경제사 전공자 만나면 다들 이렇게 웃을겁니다.
'세계 사학회에서는 인정도 못 받는게 일본인들의 에도시대 통계'
일본 애들이 왜 세계기록유산이 거의 없는지 아세요?
행정가들이 승려이고, 무사인데다가 글 조차 모르는게 다이묘랍시고 있었던 시절입니다.
기본적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행정가를 양성하기 위한 시스템 조차 없던 나라가 전근대의 일본입니다.
집현전을 만들어서 행정과 통치를 위한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싱크탱크를 구성했던게 15세기 조선이구요.
거기서 행정 표준화와 세법 기준 등을 논의했던게 조선입니다.
그 시대를 일본이 더 나았다라고 하는건 능욕이지요. 뭘 믿고 그런 소리하는지 모르겠어요.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는 만큼 조선 역사를 좀 공부해보시기 바랍니다.
왜 사람들이 불쾌한지 아십니까?
역사를 배움으로서 우리가 실패한 이유를 배우죠.
근데 적어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조선 말기는 그게 맞습니다. 무엇에 실패하여 우리가 식민지가 되었는지..
그런데 그것을 전세계적 국제사에서 살펴봐야 하고, 오히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이루어진 영국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거지
왜 일본을 본받고, 일본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그러한 일본의 역사를 배우면서 꼭 까는건 조선 말기의 위정자가 아닌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저주라고 하더군요.
그걸 감성적 역사관이라고 하지요.
근데 아십니까? 일본애들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서 보듯 민주주의 시민의식 우리보다 더 떨어지고..
(질서의식은 나을지 몰라도.. 사실 질서의식도 과도한 일본인의 집착이기도 하지요. 일본인의 일반화된 타자Generalized Other가 상당히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끄러우면 자살하는 나라지요. 뭐 우리나라도 엿같긴 하지만..)
먹고 살게만 해주면 뭐든지 하는 국가주의가 팽배한 나라입니다.
당연히 개인적으로 잘못되면 항의하는 시민이 있는 나라보다 지도층의 의지 하나만으로 세상이 변하기 쉬운 나라이지요.
그런 나라 본받고 싶습니까?
전 솔직히 일본이 어떻게 살았든 일본한테서 배워야 할 것은..
딱 하나 외국에 대한 기술과 학문을 받아들이는 개방성 정도입니다.
나머지 일본의 정신문화나 경제적 기반은 절대 배우면 안 되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역사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과 타국의 문명을 깔아뭉개기 위한 역사 연구는 완전히 격이 다릅니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일본보다 우월하다고 말한 적은 사실 별로 없습니다.
일본 학자들이 세미나 같은걸 하면 대놓고 한국은 '우리가 없었으면 안 되는 나라'라거나 '천년동안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린 나라'로 지랄 같이 왜곡시켜놔서 그걸 반론하다보니 그렇게 보일 뿐이지요.
은광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면서 국제적으로 최신 은 제련술을 개발했다라고 광고하는데... 그 기저에 조선의 기술자가 있었다를 숨깁니다. 그래서 한국 학자들이 "조선에서 가져간거잖아. 엄밀히 말해 니들이 개발한건 아니지"라고 말하면 우월론이라고 정신 승리한다고 ㅈㄹ을 하는거죠. 우리가 시비 걸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대학 은사님이나 연구원들 대부분 생각이 이렇습니다. "일본놈들 니들 좀 니들 ㅈ대로 살아라. 우리 좀 시비 걸지말고..." 입니다.
국제 역사학회나 경제사학회에서 아직도 우리나라는 이천년동안 중국과 일본이라는 양 강대국 사이에서 외침을 받은 나라로 되어있습니다. 아주 엿같지요. 당연히 동양사를 연구한 외국계 교수들은 그런 생각 안 합니다만은..까도 까도 일본 문화의 기저에 한국 문화가 있으니까요. 근데 타국의 세계사에는 저렇게 기술되어있습니다. 대체적으로요.
그런데 그걸 교정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는데...십덕후 같은 사람들이 일본 찬양질합니다. 그것도 우리나라 역사를 깔아뭉개서 말이지요. 아직도 우리나라를 외침을 많이 받은 나라라고 하더군요. 우리나라만큼 전쟁 많이 한 나라, 외침 받은 나라와 민족은 전 세계에 수두룩합니다. 근데 꼭 비하질을 하지요.
심지어 일본 우익계 교수들은 '난징 대학살'의 주범은 '조선계 일본군'이라는 ㅈ 같은 논문을 냅니다. 그 다음부터는 원치 않게 우리나라 학자들이 그 반론 연구에 들어갑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한국 문화사 연구하다보니 일본에 남아있는 국보와 고미술품 중 고려계 승려, 한국계 선비, 신라계 건축가들이 나옵니다. 따라가서 연구해서 논문 발표하면 '자위질'이라고 ㅈㄹ 합니다. 그럼 어쩌라구요. 그 사람 무시하고 연구합니까?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우리나라 학자들은 '조선에도 근대화의 씨앗은 없었을까?'라는 연구를 합니다. 근데 일본 학자들이 끼여들어서 '일본은 되고, 조선은 안 된다'라는 주제의 논문을 국제 학회에서 냅니다. 서양 학자들 다 있는자리에서는 안 하죠. 걔들은 관심 없으니까..
동아시아 경제사학회 세미나에서 그딴 논문 내밉니다. 그래서 반론 작업 들어갑니다. 지금 그런 형국입니다. 그렇게 몇 십년 동안 방어해왔지요.
누가 누구를 우열론에 끼게 하는지 참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걔들 그런 논문을 기반으로 교양도서를 엄청나게 발간하지요. 그거 듣고 '일본은 발전의 씨앗이 있었네' '우리 조선 조상님들은 등신같네' 이딴 인식을 가지는겁니다. 자기네 역사를 비하하는거죠.
침략 당한건 안타까운 역사이지만 지금 엄연히 잘 살고 있고...세계적 부국 중 하나입니다. 그냥 그걸로 된겁니다.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의 역사는 정당하고, 당당한 것이지요. 근데 꼭 뭐 하나 부끄러운거 있다고 비하를 못 해서 사죽을 못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역사를 어설프게 배운 놈들이 그럽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솔직히 고대사도 우위론 주장하고 싶지 않은데, 얼마까지 주장되었던게 임라일본부설입니다.
이렇게 내세우면 우리는 반론을 해야겠지요. 문화사나 유목 민족사 등을 동원해서..
그리고 어설프게 배운 놈들이 또 자위질이라고 평가절하하지요.
그거 반복입니다.
솔직히 키보드 두들기는 시간도 아깝고...
존 카터 코벨이나 앙드레 슈미드 같은 교수들의 책이나 읽으라고 하고 싶습니다.
걔들은 평생 우리나라를 연구하고, 일본도 함께 연구해왔습니다.
고압적 자세가 싫으신건 이해합니다.
근데 제가 훨 손해거든요. 님이 어디서 자료들을 가지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전 집에서 열심히 책 찾고 있고, 논문 찾아봤거든요.
과거 노트 필기도 찾아보구요. 노력에 대비해서 오는 답변히 허접인데 제가 안 불쾌하겠어요? 논쟁의 포커스도 안 맞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