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 조선 후기까지 일본보다 앞서있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만은
기본적으로 제가 글을 쓴 이유는 조선 세종 11년 일본을 다녀온 사신의 보고서라는 게시물의 리플에 대해서입니다.
그 게시물이 '베스트 게시판'에 가면서 역사 게시판에는 없는 리플들이 있더군요.
거기의 주요 주장은
"한국은 항상 일본보다 1/3의 인구수를 유지했다." 와 "고려 중엽 이후부터 문물 수준이 역전당했다" 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양란 이후 에도 정부의 경제력이 조선과 대등한 위치에 오르고 이후에 역전당했다입니다.
즉, 레모네이드님이 16세기 이후의 자료로 설명하는건 저에 대한 반박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2. 레모네이드님의 통계 자료를 보면 지나치게 일본인 식민지 근대화론 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경제사학의 관점에서 경자양전 이후 조선 총독부의 통계 사이에 갑자기 증가된 인구와 경작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한 때 주요 논쟁이었습니다. 즉, 조선의 통계 방식은 '군역과 세납'을 목적으로 하는 통계였기 때문에 18세 미만과 여성, 노비의 인구가 상당히 누락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고, 권태환, 신용하 교수 같은 사람은 1639년 즈음에 조선의 인구는 1080만명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일본인 학자들도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즉, 양란 이전의 16세기 중엽의 조선 인구는 120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저도 수정해야 할 것이 '정'의 의미에 대해서 간과한 바가 크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배우는 경제사학에서는 인구수 통계는 논문에서나 나오지 일반적인 교과서에서는 생산양식에 더 큰 의미를 두기 때문입니다.
출처 : 朝鮮王朝時代 人口推定에 關한 一試論 On Population Estimates of the Yi Dynasty, 1392-1910
위의 자료는 키토 히로시라는 학자가 1996년 발표한 논문의 자료입니다. 1600년 즈음을 기준으로 일본의 인구는 1227만 명입니다.
조선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요즘 연구에는 일본의 인구 통계가 상인이 곧 인구수이고, 그에 대해 1:1 비율로 무사 인구를 산출했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에도의 인구가 한 때 100만이었다는 것에 대한 반발인데, 이건 일본인 학자들의 이야기지요.
(우리나라 학자들 입장에서는 걔들의 통계가 어떻든 관심 밖입니다.)
3. 경제력은 단순히 화폐와 시장경제만으로 수준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처음 경제학을 설파하고 경제력을 논할 때, '부가가치'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중상주의자들을 비난하지요. 즉, 물품 거래의 중계는 부가가치를 전혀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중상주의자들은 '기회비용'의 개념조차 몰랐습니다. <국부론>을 참조하세요. 기회비용을 본격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담 스미스이고,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자들을 혐오했습니다.
16세기 초 일본의 연은분리법은 기술적으로 제약이 많아서 은 생산이 적었습니다. 이후 1533년 조선 기술자 두 명이 일본에게 기술을 흘림으로서 (중종 실록에 기록) 은 생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화폐 경제가 근대적 자본주의의 맹아로서 역할을 할 지언정 그것이 경제력 우위의 지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부가가치의 의미로 끝나는 것입니다. 경제력을 단순히 화폐 경제와 은의 유통으로 바라본다면 경제학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의 평가입니다.
Angus Maddison의 논문은 전 근대적 시대의 GDP를 추적한 기록이 있습니다. International Geary Khamis Dollar 지표에 의하면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 역전은 1820년에 일어나는 것으로 연구해뒀지요. 1911년 기록에 의하면 1인당 GDP는 일본은 약 1400달러, 한국은 약 900달러입니다. 에도 초기에는 일본이 530달러이고, 조선이 620달러입니다.
전 근대적 경제 생산 체제에서 곡물 생산량은 중요한 지표중 하나입니다. 명목 화폐도 중요하긴 하지만 비중이 낮습니다. 실질 화폐 가치로 평가하기 위해 보정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비약적인 은광 개발에도 불구하고 경제력 상승이 곧바로 이어지지 않은 이유는 인플레이션 때문입니다.
은광의 생산량만 따진다면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이 맞지만 교환 가치로서의 가치 평가는 계속 하락했습니다.
예를 들어 왜은 1냥으로 쌀 10가마를 거래했다면 나중에는 왜은 2냥으로 쌀 10가마를 거래할 때
쌀을 생산하는 입장에서는 별다른 생산비가 증가하지 않았지만 더 높은 가치를 받게 되고,
왜은을 생산하는 입장에서는 쌀을 얻기 위한 생산비가 계속 증가하는 셈이지요. 조선통신사가 끊기게 될 때 일본의 입장에서도 경제력 역전을 인식했을 가능성도 높고 더 이상 조선으로부터 여러가지 물품을 거래할 필요성이 떨어졌기도 합니다.
그 전에는 여러모로 명나라나 조선으로부터 소비재를 구입해야 할 의존도가 있었던 것이구요.
실제로 왜은이 한 역할은 소비재 수입 용도가 컸습니다.
즉, 일본의 화폐 경제 시스템이 조선을 역전시킬 시스템적 도구로서 평가를 하는 것은 몰라도 애초부터 시스템을 두고 경제력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오류가 크다는 것입니다. 시스템이 후져도 당시에 공업 자체가 전 세계적으로 미약했기 때문에 부가가치 측면에서는 결국 곡물 생산량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4. 결과적으로 군사적 우위론은 제가 언급한 바가 없고, 제 개인적 의견은 사병혁파 이후 문종의 군제 개편 후에는 조선이 일본보다 밀렸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군사 교리가 발달한다하더라도 당시에는 결국 군사수의 싸움이기 때문이지요. 다만 조선에서는 포병 교리가 발달하고, 일본은 조총을 활용한 교리가 발달하게 되지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화약무기 제조기술에 대한 기반은 조선이 임란 이전에는 앞서 있었다는 점과 해군 교리와 선박 건조술도 더 나은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문화 수준에 대해서는 일본 우위를 말한다면 뭔가 웃긴 일이 될테구요.
애초에 논쟁이 된 글은 문물 모두의 일본 우위를 고려중엽 조선전기를 포괄하는 글이 많아서 썼던 겁니다.
양란 이후의 일은 별로 논쟁거리가 아닌 것 같구요.
그리고 조선이 총통을 만들기 버거워했다는 건 좀 잘못된 상식입니다.
당시의 화약 기술에 의하면 총통은 명중률도 낮고, 습하면 쓸모가 없는 물건입니다.
세종시대에 보급된 화포는 1만 3천 문입니다.
연간 제철능력은 12만 톤에 해당하구요.
조총이 보급된 것도 대량생산을 해야 될 필요성(조총 전술 이해도의 부족으로 인한)을 못 느끼다가 나중에 부랴부랴 대량 생산을 하고 조총 1정 당 쌀 3.3석의 비용이 듭니다. 그리고 인구에 대한 역설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료인 조선왕조실록에서 '모두 정(丁) 몇 명, 몇 호' 라고 일컫는데, 그건 앞서 말했듯 군역과 납세 의무를 지닌 장정을 의미합니다. 즉, 전체 인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 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면 앞서 언급한 저자들의 논문을 참고하시는게 더 좋을 듯 합니다.
도요타 같은 회사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한국의 학자를 장학금까지 주고 일본으로 데려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특히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자들이지요. 역사학파 경제학을 전공하거나...
그리고 하는 것이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봉건주의적 생산양식의 포맷에 따라 '조선'은 자발적으로 자본주의 근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을 조직적으로 전파시킵니다. 그러한 교수들이 한국으로 되돌아와서 서울대 안병직 교수 같은 뉴라이트 경제학자들이 되는 겁니다.
근데 사실 역사라는 것이 내적 변수와 외적 변수가 합쳐져있는 형태입니다. 근대적 자본주의의 맹아를 '원격지 무역'과 '화폐 경제'로 두 가지 요인으로 해석합니다. 또한 민주주의와 산업화라는 상부와 하부 구조의 변화로 근대화를 이야기합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체는 결국 조선은 자본주의의 맹아가 존재하지 않았다와 민주주의 또는 산업화의 토대가 없었다라는 것을 주입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도 생각해보면 봉건제도에서 곧바로 입헌군주제로 넘어간 케이스입니다. 그것이 내적 변수로서 존재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상부구조의 흐름으로 따지면 조선이 더 앞서나가있었고, 경제력도 사실 큰 차이는 없습니다. 화폐 경제에 대해서 차이가 약 200년간 차이가 있었지요. 또한 봉건적 생산양식을 가진 일본과 소위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가진 중국과 한국을 차별화해서 오로지 일본만이 역사적 발전의 정방향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우익과 식민지 근대화론 경제학자들의 주장입니다.(일본에도 부르주의아 발생이나 분업화에 의한 수공업의 발달 흔적은 미비한 편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러한 역사적 관점은 영미권 아시아 역사학자들은 전면 배제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따지면 유럽에서도 러시아와 독일은 자본주의적 맹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인데, 독일의 경우에는 프로이센이 영국을 본받아 근대화를 시도했을 뿐, 하셀이나 바바리아 등과 같은 나라들은 여전히 화폐 경제이지만 전 근대적 생산양식을 유지한채 근대화의 씨앗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도 비슷한 형태입니다. 화폐 통화만 따지면 베네치아 공국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경제력을 보유해야 정상이지만 근대적 경제학의 아버지인 아담 스미스는 베네치아의 한계를 중상주의자의 한계로 말을 하며 부가가치에 의존하지 않은 상업 무역의 허상에 대해서 <국부론>에서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주류 경제학이라고 일컫는 애덤 스미스-데이비드 리카르도와 같은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맹아를 따로 설정하지 않았고, 역사적으로 다른 환경과 다른 발전론을 인정하는 한 편, 마르크스와 역사학파 경제학자들은 서구 우위론을 주장하기 위해 근대화의 맹아는 따로 있다라고 설파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그 이론을 여전히 중요한 학파로 유지시키고 그것을 아시아지역에 전파하지요.
그들의 의견에 의하면 대하(큰강) 중심의 문명에는 애초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다라고 결론이 납니다. 그리스와 로마와 같은 노예제 생산양식에서 중세의 봉건제 생산양식에서만이 상부와 하부의 변화가 일어나고 화폐 무역과 더불어 자본주의가 탄생한다고 주장하지요. 일본은 봉건제였으니 그 이론에 열광하는건 이해 못 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국제적으로 역사학파 경제학자들의 자본주의 맹아론은...거의 사장되기 일보 직전입니다.
역사적 우열론이기 때문이지요. 마치 자신들은 정해진 운명과 같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사회 과학에서 이런 접근법은 굉장히 문제가 많지요. 조선의 유교주의에 의한 상업의 천시와 화폐무역의 한계 또한 다원론적 영향에 의해 발생한 것이지 조선이라는 국가의 내재적 한계론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