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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권력의 주구가 된 용병 (下)
게시물ID : history_50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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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00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7/20 21:16:39

지난 글 : 국가권력의 주구가 된 용병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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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제개혁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스웨덴왕 구스타프 아돌프는 네덜란드의 마우릿츠 오라니에가 추진한 군제개혁의 완성자라고 일컬어진다. 우선 구스타프 아돌프는 당시 백만정도의 인구였던 스웨덴왕국에서 획기적으로 유럽근대에서 최초의 징병제를 1620년 실시하였다. 


스웨덴 각지역의 집회소에서 15세이상의 남자가 10명씩 줄을 지어 서면 징병관이 10명중 각각 1명씩을 고른다. 대체로 18세에서 40세정도의 신체건강한 농부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의복과 무기가 지급되는데 그 비용은 나머지 9명에게서 일률적으로 징수되었다.


 선발된 남자들은 지역별로 조직된 연대로 모여 출정전의 엄격한 훈련을 받게 된다. 그야말로 무기도 제복도 국가에서 지급되는 징병제 상비군이었다. 전시에만 소집되는 스위스군이나 훗날 유럽의 국민군에 가까운 군대라고 할 수 있었다. 해마다 평균 1만명이 소집되어 1627년에는 13만5천명의 병력이 되었다.


스웨덴의 당시 인구는 백만명 정도였는데 거기에 13만의 징병군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스웨덴 각지에서 일손 부족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실제로 상당수의 인원은 외국으로부터의 용병으로 충원하게 된다. 


이러한 용병의 모병은 란츠크네히트와 똑같이, 스웨덴왕 구스타프 아돌프가 용병대장에게 모병특허장을 교부하고, 연대편제는 용병대장에게 맡기는 시스템이었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인들이 많이 모집되었는데, 특히 스코틀랜드인의 많은 수가 장교로서 근무하며 독일인 용병이나 스웨덴 징병부대를 지휘하였다.


뭐니뭐니해도 스웨덴군의 핵심은 10만이 넘는 잘 훈련된 징병제상비군이었다. 보병중대는 150의 병력으로, 횡으로 6열에서 8열의 진형을 취하며, 충실한 화기를 보유하였다. 머스킷총의 경량화와 함께, 포병대가 잘 갖추어져, 병사 3명이 끄는 4파운드포를 만들고, 그때까지는 공성전에서만 사용했던 대포를 야전에 투입하였다. 기병도 소총기병에서 발도돌격기뱅(拔刀突擊騎兵)으로 개편한다. 스웨덴군은 이와같이 보병, 기병, 포병, 3개 병과가 잘 짜여진 강한 군대가 되었다.


이렇게 당시 유럽 최강의 군대를 거느린 스웨덴은 1631년, 프랑스와 "벨발데조약"을 맺게 된다. 조약내용은 카톨릭황제군의 공세로 곤경에 빠진 북부 독일 프로테스탄트 제후를 구하기 위해, 카톨릭 프랑스왕국의 자금으로 스웨덴이 독일로 침공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이 전쟁은 종교전쟁이라 부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스웨덴으로서도 30년전쟁의 제 2기에서도 승리한 황제가 합스부르크가 북부 독일의 패권을 잡고 발트해 제해권을 노리며 제국 발트해 함대의 건조를 선언한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발트해는 스웨덴 중상주의 정책의 핵심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발트해 사수를 위해, 그렇지만 "짐은 정복하기 위함이 아닌, 신앙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왔다."라고 구스타프 아돌프는 말하며, 카톨릭 프랑스의 자금지원으로 프로테스탄트해방을 대의명분으로 30년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2. 구스타프 아돌프의 죽음과 발렌슈타인의 암살



구스타프 아돌프의 독일 침공은 그야말로 전화의 형세역전을 가져왔다. 발렌슈타인은 고향 보헤미아에 칩거하고 있었고, 그사이에 스웨덴군은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1631년 9월 18일 라이프치히 근교에서 30년전쟁 최대의 회전 "브라이텐펠트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의 자세한 경과는 설명하지 않지만, 스웨덴군의 대승리였다. 


이 당시 루터파의 아성이었던 작센 선제후의 군대 1만6천을 우군으로 한 스웨덴군 2만3천은 황제군 3만 6천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황제군의 사상자는 만2천, 스웨덴군은 2천에 불과했으며, 7천명이 포로로 잡힌, 이후 기념주화까지 발행된 대승리였다. 


패장은 발렌슈타인의 뒤를 이어 황제군 총사령관이 된 틸리로, 그는 이어진 레히전투에서 스스로의 목숨마저 잃게 된다. 스웨덴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황제의 본거지 빈으로 육박하게 된다.


당연히 황제 페르디난트는 당황하게 되고, 이러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발렌슈타인의 재기용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재기용된 발렌슈타인에게도 야심이 있었다. 발렌슈타인은 용병대장에서 밀라노공국의 주인이된 프란체스코 스포르챠와 같이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야망을 위해 황제군 총사령관 자리로 복귀하기전 황제 페르디난트로부터 여러가지 특권을 얻어내게 된다.


 이러한 발렌슈타인과 구스타프 아돌프의 격돌은 1632년 11월 16일 라이프치히 남쪽 24킬로에 있는 소도시 렛체에서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스웨덴군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전투중 스웨덴국왕 구스타프 아돌프는 전사한다.


발렌슈타인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렛체전투의 패전책임을 구스타프 아돌프의 죽음으로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총사령관 복귀시 얻어낸 특권, 군의 전권, 평화교섭권, 조약체결권 등을 구사해 묘한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즉 발렌슈타인은 구스타프 아돌프의 사후 재상 욱센세르나의 지휘하에 독일에 머무르고 있던 스웨덴군과 비밀리 평화교섭을 시작한다. 


스웨덴측의 조건은 발렌슈타인이 황제군에서 나올 것이었다. 이 교섭은 실패로 끝나지만, 뒤이어 프랑스로부터 더욱 좋은 조건이 들어온다. 발렌슈타인이 황제군으로부터 나오면 발렌슈타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보증한다는 것이었다. 발렌슈타인이 이 조건에 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그러한 소문이 돌았던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황제측에서 본다면, 명백한 배신이었다. 


황제는 즉시 발렌슈타인을 암살할 것을 명령하였다. 1634년 2월 25일, 너무도 간단하게 그 명령은 이루어졌다.


발렌슈타인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는 군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 군대는 이전 자신이 이끌고 있던 군대와는 전혀 다른, 그의 사병(私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병사들은 발렌슈타인이 직접 모병하지도 않았고, 모병에 필요한 자금도 합스부르크세습령에서 거두어진 군세로 충당되었다. 


황제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의 만든 군세 시스템을 이용 자신의 군대를 만들고 그 총사령관에 발렌슈타인을 임명한 것 뿐이었다. 당연히 그 군대는 황제의 군대였고, 총사령관을 암살하라는 명령은 아무런 저항없이 이루어졌다.



<비운의 CEO 알렌슈타인 폰 발렌슈타인>


발렌슈타인이 만들어내 군세 시스템은 더이상 용병대장이 사기업의 전쟁기업가로서 활동할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용병대장은 스스로의 자주성을 상실하고 국가권력의 일개 사용인으로 전락하였다. 이렇게 용병대장이 전쟁기업가로서의 측면을 잃고, 순수한 군사적 기능만 남게 된다면, 그 용병대장에게 투자한 민간투자가들은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된다. 


발렌슈타인의 최대 투자자였던 네덜란드의 은행가 한스 디 빗테는 발렌슈타인이 처음 황제군 총사령관에서 해임되었을 때, 그가 빌려준 총액 50만굴덴의 채권은 회수할 길이 없이 막히게 되자 자살하였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방관한 발렌슈타인도 스스로의 목을 조른 격으로 암살당했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전사와 발렌슈타인의 암살후 30년 전쟁은 조기수습의 길을 잃은채 도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3. "국가의식"과 용병의 지위저하



"병사들에게 빵과 일을 주기위한 목적뿐인 전투가 계속되고 동계 숙영지를 확보하는 것을 주목적으로하는 전투가 진행되어, 군의 관심은 오로지 병량의 현지조달에 집중되었다."라고 "30년전사"에서 소개된 글과 같이 프랑스군이 참전하게 되는 30년전재의 제4기에서는 이미 전쟁의 목적따위는 잊은, 오직 먹고, 살아남기 위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미 전쟁수행능력을 보장하는 토지의 생산력은 전쟁의 계속으로 황폐화된지 오래이지만, 전쟁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의 결정적인 승리가 필요했다.


어느쪽인가라는 문제는 이미 프로테스탄트, 카톨릭의 문제가 아니었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참전에서 보듯이 전쟁은 이미 종교와는 무관해진 것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합스부르크가와 반합스부르크의 전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반합스부르크 진영이 승리를 거두고 30년전쟁을 끝내게 되었다. 그 결과 신성로마제국의 분열은 고정되었고, 제국내 주요 후국(候國)은 동맹권을 포함한 국가주권을 얻어 각각 절대주의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1648년 체결된 전쟁의 종결조약 "베스트팔렌조약"이 신성로마제국의 사망진단서라고 불리우게 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대량의 외국인용병을 거느리고 이 전쟁에 직접 참전한 스웨덴, 프랑스, 스페인은 점차 자신들의 국가를 의식하게 되었다. 병사들은 전투의 돌격에 앞세 "스웨덴만세!", "프랑스만세!"를 외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사람들간에 종교를 위함이 아닌, 그리고 돈을 위함도 아닌, 국가를 위해 싸운다는 생각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용병부대에 있어서 그 종말이 다가옴을 알리는 것이었다. 


적어도 전투력의 중추가 아닌, 특수한 보조부대로서의 지위밖에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란츠크네히트부대의 공동결정권으로 상징되는 자유전사로서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용병은 거대한 군사기구의 한 톱니바퀴가 되고, 용병대장은 자립한 전쟁기업가가 아닌 국가권력의 주구가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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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텐펠트 전투 (Battle of Breitenfeld)


30년전쟁 때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둔 전투 (1631. 9)


이 전투에서 틸리 백작 요한 이자클라에스가 이끄는 로마 가톨릭교도인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군대와 가톨릭 동맹군이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작센 군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를 통해 스웨덴이 강국으로 등장했고, 오랫동안 유럽 전쟁에서 쓰였던 보병대의 대량 포진이라는 낡은 전술에 비해 스웨덴의 유연한 선형 전술이라는 새로운 전술의 우위성이 증명되었다.


9월초 황제군 사령관 틸리는 작센을 침공하고 9월 15일에 라이프치히를 장악한 후 군대를 브라이텐펠트 근교에 배치해 스웨덴-작센 군대의 진격에 대비했다. 스웨덴군의 왼쪽을 맡았던 작센군은 틸리의 선제 공격으로 무너졌다.


틸리는 이렇게 측면을 돌아 배후를 치려 했지만 스웨덴의 좌익군 사령관 구스타프 카를손 호른이 군대를 이동시켜 한참 전투중인 틸리의 측면에 새로운 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실패했다. 이러한 전술은 근대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그동안 스웨덴의 우익군은 황제군 기병대의 공격을 7시간 동안이나 버텨냈다. 그 뒤 구스타프는 직접 틸리군의 좌측을 포위하고 맹반격을 가함으로써 작센군이 잃어버렸던 무기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황제군의 무기를 빼앗고 황제군 보병 방진(方陣)을 짓밟았다.


황제군은 1만 2,000명을 잃고 패주했으며, 틸리는 큰 부상을 입은 채 수천 명만을 데리고 달아났다. 구스타프는 다음날 라이프치히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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