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장면1 (허동현)
열린 사이버 대학 강의록 : <장면 그는 누구인가?>
김기승
윤보선에 대한 학문적 연구나 관심은 현재 전무한 상태이고, 장면에 대한 연구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새로 구성된 민주당 정권에서 윤보선은 대통령,장면은 국무총리였습니다. 내각책임제 하에서 실질적인 책임자는 국무총리 장면이었습니다.
4.19혁명은 이승만의 독재정권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따라서 독재를 방지하기 위해 독재를 가능하게 했던 대통령제 자체에 대한 부정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헌법은 본래 내각책임제로 기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대통령제 헌법으로 고치라고 해서 대통령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러 차례 헌법을 개정하여 자신의 독재 권력을 구축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 독재 정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내각책임제가 적합하다는 여론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4.19혁명 이후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내각책임제 헌법에 의한 선거를 통해 민주당 정권이 구성되었습니다. 이 민주당 정권에서 정치의 실질적 책임자는 국무총리에게 있었답니다.
민주당 정권과 장면은 한국 현대사 연구에서 거의 무시되었던 부분이었습니다. 정권의 존속기간이 1년도 채 안되는 9개월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4.19 이후의 '혼란'을 진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대시키고 격화시켜서 5.16 군사쿠데타를 자초한 것이라는 식의 부정적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극히 최근에 와서야 극복하려는 노력이 부분적으로 시도되고 있습니다.
장면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최근에 생긴 운석기념회(운석 장면기념사업회)와 장면연구회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나도 장면연구회에서 주관하는 학술회의에 참가하여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이라는 주제를 갖고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연구에서 나는 장면에 대한 연구는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개발을 가능하게 했던 종합적인 경제발전계획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 심하게 왜곡되어 가려져 있던 부분이었습니다. '경제개발과 건설' 이라는 구호는 5.16 이후에 나온 것이 아니랍니다.
4.19 이후 민주주의 혁명과 함께 민족의 시대적 과제로 여론 수렴과 협의를 통해 정책으로 확정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개인의 몫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 발전의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었습니다. 민주당 정권은 그 성과를 정책에 충실히 반영했던 것입니다.
장면의 인간적 삶과 정치가로서의 면모에 대해서는 경희대학교의 허동현 교수가 권위자입니다. 허교수는 장면연구회를 이끌고 있고, 장면 연구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번 강의에서는 특별히 허동현 교수를 초빙하여 대담을 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허교수가 연구한 장면의 삶은 요약을 해보고, 끝으로 내가 허교수에 질문을 던지고 허교수의 답변을 듣는 형식으로 수업을 진행할까 합니다.
허교수는 장면은 5.16을 저지하지 못하여 4.19에 의한 민주주의 이상을 지켜내지 못한 무능한 정치가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다원적 시민사회 건설과 민간 자율을 경제 체제를 확립을 통한 국민통합을 지향했던 선각자라고 하였습니다. 또 독실한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자기 수양과 자녀 양육 및 부부 생활에 성공한 보기 드문 정치가에 속한다고 하였습니다.
허교수의 주장을, 장면의 연대기를 재구성하는 방식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 장면의 생애
1) 천주교 가문에서 출생하고 성장하다
장면(1899-1966)은 1899년 8월 28일 부친 장기빈(1878-1959)과 모친 사이에서 3남 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출생지는 외가인 서울 종로입니다. 출생 직후 15일만에 종현본당(지금의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부친 장기빈은 1890년대 관립 영어학교에 다니면서 영어와 일본어를 배웠고, 졸업 후에는 탁지부 주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남다른 외국어 실력으로 1910년 전까지 인천의 해관(해海關)에 근무하였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스탠더드 석유회사와 타운샌드 상사 한국지사에 근무하면서 무역과 보험 관계 업무에 종사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 군정청에서 재무부 고문과 부산 세관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부친 장기빈은 1896년 천주교에 귀의했고, 1897년에는 천주교도 황루시아(1878-1954)와 결혼하였습니다. 장면은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하겠습니다. 또 부친이 외국 회사에 근무하고, 외국에도 능통했습니다. 또 외국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어서 3남 4녀의 자식들을 모두 일본과 구미에 유학을 시켰습니다. 일제라는 암울하고 어려운 시대에 드물게도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고 하겠습니다.
장면의 어렸을 때 세례명은 요한이었답니다. 그런데 공부는 하지 않고 장난을 쳐서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에서 면(勉)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답니다. 그리고 부친은 자식들에게 모두 호를 지어 주었는데, 장남 장면에서는 운석(雲石), 둘째 장발에게는 우석(雨石), 셋째 장극에게는 하석(霞石)이라는 호를 지었습니다. 자신의 호가 태암(太巖), 즉 커다란 바위이니, 그 자식들에게는 바위의 자식이라는 의미의 돌을 항렬자로 삼아 호를 지은 것입니다. 구름 돌, 비 돌, 노을 돌이라고 말입니다.
장면은 부친의 근무지인 인천에서 성장하였습니다. 8살인 1906년에 인천성당 부설 사립 박문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박문학교를 졸업한 뒤인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인천공립 심상 소학과과 고등과를 마칩니다. 1914년에는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수원농림학교는 관립으로 학비가 전액 무료였습니다. 따라서 경쟁률이 치열했는데, 40명 모집에 1,400명이 응시하였는데 합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수원 농림학교 교육이 실용주의적 기능 교육에 치중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듯합니다. 그가 농림학교 재학시절 열심히 했던 것은 영어 공부였습니다. 그는 일본, 그리고 일본인에 의한 기능 교육의 틀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렇게 장면이 영어 공부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종교 문제에 기인했다고 합니다. 수원 농림 재학 시절 천주교 신자는 자기 자신 1명 밖에 없었답니다. 기독교도는 4-5명 정도였고, 대부분은 종교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개신교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수많은 학생이 기독교도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개신교도들이 천주교를 비판하였는데, 자신은 신앙심만 깊었지 교리적, 신학적으로는 대응을 전혀 하지 못했답니다. 이때부터 미국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장면은 1915년 서울 정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1916년 18세가 되면서 천주교도인 16세의 김옥윤(1901-1990)과 결혼하게 됩니다. 1917년에는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게 됩니다. 졸업 후에는 유학 준비를 위해 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에 진학하여 영어 공부를 하였습니다. 1918년 4월부터는 용산에 있는 예수 성심신학교 강사가 되어, 국어와 수학 등의 과목을 가르쳤답니다. 선생과 학생의 나이 차이는 불과 3,4세에 불과했답니다. 교사가 된 후의 영어 학습은 야간부로 옮겨 계속됩니다.
1919년 3.1운동시에는 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 학생들에게 3.1운동과 민족에 대해 교육했답니다. 이것은 천주교의 정교분리 방침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답니다. 3.1운동에 참가했던 신학생은 징계를 받아 학교를 떠나는 상황이었답니다. 이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민족을 알도록 해 준 교사는 바로 장면이었다고 노기남 신부는 회고하고 있습니다.
2) 미국에 유학하고 성프란치스코 제3회에 가입하다
1920년 3월 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유학의 길에 올라 11월 시애틀에 도착하였습니다. 일제의 통제로 이 당시 미국 유학은 금지되었습니다. 더구나 3.1운동 직후라 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장면 그리고 그의 형제들이 미국에 유학할 수 있었던 것은 천주교의 한국 선교 정책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 뮈텔 주교는 한국 평안도의 경우 개신교의 교세가 강하여 포교의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그 일을 부탁하게 됩니다. 이에 미국 메리놀 외방 전교회 회장 월시 신부는 평안도 지역 포교를 인재 양성 계획을 세우면서 장기빈의 자제들을 활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천주교의 포교정책으로 장면의 미국 유학은 가능했던 것입니다.
장면은 1921년 1월 메리놀 전교회가 운영하는 예비신학교인 베나드 스쿨에 입학하여 6개월간 영어를 공부합니다. 그리고 8월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였답니다. 이 성프란치스코 제3회라는 단체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성 프란치스코처럼 신부와 같은 경건한 신앙생활을 다짐하는 수도단체였습니다.
장면은 1921년 9월 뉴욕의 맨해튼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근로장학생으로 학비 일부를 보조받았지만,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습니다. 심한 육체노동과 학습으로 인해 탈장 수술을 받아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의 성적을 보면 1학년 85점, 2학년 83점, 3학년 92점이었습니다. 특히 종교학, 철학, 교육학 등은 94점 이상, 물리와 화학 과목은 92점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영어 뿐만아니라 프랑스어도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1925년 6월 맨하튼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3) 귀국후 천주교회 지도자 겸 교육자로 활동하다
장면은 1925년 6월 귀국하게 됩니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천주교회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는 서울교구에 의해 로마에서 거행되는 <한국 79위 순교자 시복식>에 한국 천주교청년회 대표로 참석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장면은 미국 메리놀교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평양교구를 확립할 때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메리놀교회에서 파견한 미국인 신부와 그의 노력에 힘입어 1927년 평양교구가 설정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평양으로 이사하여 천주교회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928년 평양 천주교 청년회 회장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장면은 1931년 4월 서울 혜화동 소재 동성상업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합니다. 동시에 서무주임 보직을 5년 동안 수행했습니다. 1936년 11월에는 교장에 취임하여 1947년 12월 교단을 떠나기까지 17년간 동성상업학교를 이끌었습니다. 이 학교는 천주교단에서 설립한 학교로서 일반 상업학교반과 신학예비학교반(소신학교)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그를 기억하는 이는 한결같이 성실하고 모범적인 선생, 그리고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김수환 추기경과 노기남 대주교를 포함해서 1960년대 한국 천주교회 사제 중 2/3 이상이 선생이 제자라고 합니다. 일제시대 천주교계를 이끌었던 지도적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해방 후 미군정 시대에 입법의원이 되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 체제가 수립되었습니다. 이에 영어에 능통하고 미국의 천주교와 연결되어 있던 장면은 미군정에 참여하게 됩니다. 1946년 2월 미군정에서는 군정 자문기관으로 민주의원을 구성하였고, 이를 확대하여 12월에는 입법의원을 구성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민족의 대표들을 의원으로 선정하여 미군정의 운영에 대해 입법을 건의하고 협조하는 기관으로 구성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좌익 인사들은 배제되었습니다.
장면은 이 민주의원과 입법의원 의원으로 선임되었습니다. 1946년 2월에 구성된 민주의원 의장으로서는 이승만 박사가 취임했고, 임정 계 인사와 국내 인사 절반씩 20여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장면은 주로 미군정과의 연락을 담당하였답니다. 이 때 장면이 민주의원, 입법의원으로 선정된 것은 그가 국내 천주교 교단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장면은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가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제헌국회 입후보 선거 구호는 "이 고결한 인격자에게 귀하의 깨끗한 한 표를" 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양심적 교육가>, <열렬한 종교인>, <유능한 정치인>으로 소개했으며, 주요 경력으로는 <뉴옥 맨해틴 대학 졸업>, <20년간 교육에 공헌>, <입법의원 의원> 3가지를 꼽았습니다.
5) 대한민국 외교의 중책을 맡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장면은 대한민국 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받도록 하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9월 장면은 대한민국 수석대표로서 차석 대표 장기영, 고문 조병옥 등과 함께 유엔총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3개월 동안 각국 대표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한 끝에, 12월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정부를 승인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과를 거두는 데에는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과 바티칸 교황청 당국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대유엔 외교에서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장면이 천주교측의 도움으로 좋은 성과를 기대하여 그에게 임무를 부여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18세기 조선에 전래되어 박해를 받았던 천주교가 대한민국의 독립을 외교적으로 지원해 준 결과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면은 유엔에서 대한민국의 승인이라는 성과를 얻어낸 직후 대통령 특사로 바티칸 교황청에 파견되어 신생국 대한민국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1949년 1월 장면은 미국에 있으면서 자신이 초대 미국대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시기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 비서로서 주미 한국 대사관의 일에 관여하여 장면 대사를 보좌하면서 일면 견제하였던 올리버는 장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그 의견을 이승만에게 올렸습니다.
장면 박사에 관해 생각하건대 그는 훌륭한 대사가 될 것입니다. 그는 착실하고 믿음직스럽고 노력형이고 또 조직적입니다. 그는 태도가 명랑하고 성미가 부드러워서 적의를 사거나 반감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습관과 일반적 위풍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판단하건대 그의 두 가지 결점을 말한다면, 첫째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일하기가 힘듭니다. 둘째는 미국 고문들에게 너무 의존하고 자기 자신이 자주 독립 정부의 대변인이라는 느낌을 덜 생각하는 경향인가 합니다.
장면 박사의 공직 생활은 한마디로 청렴하고 성실한 관료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올리버는 장면 대사의 미국 생활에 대해 "그는 전혀 사치스럽게 생활하지 않고 또한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950년 6.25전쟁 두 달 전 미국 국방장관 애치슨은 한국은 아시아에서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합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장면은 태평양 연안국가들을 중심으로 '태평양 동맹' 결성을 위해 호주와 뉴질랜드 등을 방문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6.25가 터졌습니다.
이 소식을 장면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고 알게 됩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과 유엔에 호소하여 구국의 방도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급히 미국측과 유엔에 연락을 취햐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 공산군의 침략 행위 즉시 정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퇴, 회원국의 공산 국가 원조 금지 등을 결의했습니다.
이튿날에는 트루먼 대통령을 방문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만든 미국의 책임을 추궁하고 미국 언론을 상대로 한 외교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성과가 있었는지, 트루만 대통령은 곧 미 육군과 해군의 파견을 결정했습니다. 이후 그는 1951년초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귀국할 때까지 주미대사로서 6.25에서 미국의 후원을 얻는 활동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고결한 인격자와 유능한 정치인, 나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또 조화되기 어려운 이미지라고 생각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쨋든 이러한 구호와 이미지가 당시에는 설득력이 있었는지, 그는 투표에서 승리하여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소신이 대한민국 헌법에 반영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유재산권 보호 조항과 혼인의 순결 및 가정의 건강에 관한 국가의 보호 조항이었습니다. 제헌 헌법 제 1장 31조에는 <혼인의 순결과 보호>에 관한 조항이 있는데, 축첩제도를 소멸시키고 가정과 사회의 건강과 순결을 기하는 이 조항은장면의 제안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미군정 시기 입법의원 시절에는 사창제도를 폐지하고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6) 이승만 정권에서 국무총리, 부통령이 되다
주미 대사로 활약한 외교적 공로는 그로 하여금 국무총리가 되게 하였고, 이것은 곧 이승만 다음의 지도적 인물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면이 국무총리로 재직하면서 전시의 행정부를 이끌어 갈 즈음에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정부에서는 우익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에게 100만명이 넘는 장정들의 징집과 후송 책임을 맡겼답니다. 그런데 일부 이승만에 충성하는 일부 군인에 의해 예산이 유용되어 정치자금화 되었답니다. 이러니 국민방위군에 편성되어 후송되어 가던 젊은 장정들이 먹지 못하고 입지를 못하여 많은 사망자가 나타나게 되었답니다. 이른바 군대로 가는 징집 과정에서 얼어죽는 사람, 굶어 죽는 사람, 병들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여 무려 9만명의 장정이 목숨을 잃게 되었답니다. 이것을 일컬어 '죽음의 대열'이라고 불렀답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란 공비(공산당 비적) 토벌 명령을 받고 경남 거창에 진주한 국군이 부녀자와 노인을 포함한 주민 500여명을 무차별 학살하고는 공비를 소탕한 전과라고 보고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 여론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여론을 배경으로 일부 정치세력들이 차기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추대하는 움직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7월이면 4년의 임기가 종료되는 시점이었고 5월이면 대통령 선거를 해야 할 시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대통령 선거는 국민투표가 아니라 국회에서 국회의원이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장면 대통령 추대 움직임은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