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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권력의 주구가 된 용병 (上)
게시물ID : history_50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4
조회수 : 230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7/19 18:42:45



1. 독일 30년전쟁과 절대주의국가의 성립



참가국수 66개국. 스위스, 포루투칼, 베네치아 등 전쟁과 그다지 상관없었던 국가도 사절을 파견했다. 각국 대표자의 좌석순서를 결정하는데만 약 반년이 걸린 이 국제회의는 무려 4년간에 걸쳐 단속적(斷續的)으로 계속되어, 1648년 10월 24일 드디어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독일 30년전쟁의 결말이 지어졌다. 이 것이 그 유명한 베스트팔렌조약이다. 



이처럼 독일 30년 전쟁은 전유럽이 휘말린 국제전쟁이었고, 따라서 당시 유럽각국의 군사기구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었던 용병제도도 이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 30년전쟁의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영향을 간단하게 생각해 본다면, 당시 유럽의 신성로마제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덴마크 등의 잘 알려진 국가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국왕과 대귀족, 고위성직자, 도시귀족들의 공동지배, 즉 이중권력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국가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권력의 연합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30년전쟁이후는 이러한 여러 권력중 단 하나의 권력만이 국가를 지배하게 된다. 



여러 권력중 중간 권력자에 해당하는 중소 귀족들이 30년전쟁을 통해 몰락하게 되고, 오직 국왕의 권력만이 남아 소위 말하는 절대권력의 시기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변화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는 인연이 없던 용병부대에게도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2. 보헤미아 반란


30년전쟁이라고 해도, 30년간 내내 전쟁이 계속된 것은 아니다. 당시 경제력에서 본다면 전쟁계속능력은 약 5년이 한계라고 한다. 사실 30년간 13번의 전투와 10번의 평화조약이 맺어졌었다. 따라서 17세기 역사가들은 30년전쟁의 각각의 전쟁을 별도로 보기도 했지만 현재는 다음과 같이 4기로 나누어 하나의 전쟁으로 보는 설이 일반적이다.



1. 보헤미아·팔츠전쟁(1618 - 23)


2. 덴마크전쟁(1625 - 29)


3. 스웨덴전쟁(1630 - 35)


4. 프랑스전쟁(1635 - 48)



이 중 적어도 제 1기 보헤미아·팔츠전쟁은 종교전쟁의 양상을 띄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이 강했던 보헤미아의회는 예수회에서 자란 카톨릭광신자인 합스부르크가 출신 페르디난트2세를 폐위시켰다. 


아이러닉하게 페르디난트2세는 신성로마황제로 즉위함과 동시에 보헤미아왕위를 박탈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귀족들은 보헤미아의 왕으로 프로테스탄트제후의 군사동맹·유니온(신교도연합)의 지도자, 팔츠선제후 프리드리히5세를 추거하였다. 


이러한 행동에 보헤미아와 인접한 신성로마제국의 대제후, 바이에른은 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바이에른후작 막시밀리안은 유니온에 대항하기 위한 카톨릭제후의 군사동맹·리그(구교도연맹)의 대표이기도 하였다. 또한 합스부르크가로서도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귀족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는 반역이었다.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


오스트리아등 합스부르크가의 세습영지에서 프로테스탄트제후의 저항에 고심하던 신성로마황제 페르디난트2세는 친척인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에 군사원조를 요청하게 된다. 한편 스페인은 보헤미아왕위를 찬탈한 팔츠선세후의 본거지 라인강일대를 스페인의 영향력 아래 둠으로써 네덜란드독립전쟁 진압의 병참지로서 활용하고 싶었다.


 이와 같이 신교측의 보헤미아, 팔츠연합군과 황제가 합스부르크, 바이에른후작가, 그리고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카톨릭군이 대치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보헤미아 반란은 신, 구교간의 종교전쟁이었다.


3. 갑옷을 걸친 걸인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 백작>

보헤미아 반란이 종교전쟁이라고 해도, 실제로 전투를 담당하고 있던 용병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아무 상관없었다. 용병에게 있어서 전쟁은 그야말로 먹을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일터였고, 그것은 용병대장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보헤미아신교도 반란군의 총 2만1천명중 1만여명의 병력을 이끌었던 용병대장 만스펠트는 태어난이래 계속 카톨릭신자였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이 전쟁은 커다란 비지니스 찬스였지 종교는 관계없었다. 백작가의 서자로 태어나 입신출세한 그에게 있어서 신교도측의 용병으로 일하는 것은 아무런 심적 장애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갑옷을 걸친 걸인"이라는 악명과 같이 오로지 돈만 바라보는 인물이었다. 


실제 전쟁에서는 보헤미아 반란군은 황제군, 바이에른군, 스페인군의 연합군에 졌다. 용병대장 만스펠트의 고용계약 또한 그것을 끝났다. 하지만 그는 잔병들을 그대로 이끈채, 아니 영국의 원조를 얻어 병력을 더욱 증강해서 총 2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비교적 평화가 계속되어 부를 쌓은 카톨릭권의 알자스, 로렌지방으로 진군한 것이었다. 하지만 만스펠트는 어떻게 그러한 병력을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일까?


용병계약이 끝나고 제대한 병사들의 대다수는 생계를 위해 방화, 약탈, 강도, 살인 등을 거듭하며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다닌지도 어느새 100년이 넘게 지났다. 그러한 제대용병들의 무리는 많아야 20-30명정도였고, 그들의 잔악무도한 행동에 농민들은 식품이나 돈이 될만한 것들을 미리 숨기고, 자신들은 숲으로 도망쳐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만스펠트는 이러한 약탈행위를 2만의 군대를 동원해서 조직적으로 행한 것이었다. 원래 전투후의 약탈은 보통 3일정도의 기간을 두고 행해지는 것은 일반적이었지만, 만스펠트의 군대는 그것을 일상적으로 되풀이한 셈이었다. 그의 군대는 처음부터 도시나 농촌의 비전투원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만스펠트군이 지나간 자리를 풀한포기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지만, 병사들은 놀라울 정도로 용병대장 만스펠트에게 순종했다. 뭐니뭐니해도 만스펠트군에 있는 병사들은 굶을 걱정은 없었고, 상당한 돈도 모을 수 있었다. 그대신 용병대장에게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부대에서 쫓겨났다. 


예전에는 군인복무규정은 연대장과 병사들간에 교환되어 병사들의 요구도 어느정도 반영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군인복무규정이란 연대장으로부터 병사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시되는 군율이 되었고 또, 만스펠트는 병사집회의 존재를 무시하였다. 


이전에는 없었던 광범위하고 철저한 약탈행위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보다 엄격한 군율에 병사들을 묶어둔 것이었다. 병사들은 확실하게 손에 얻을 수 있는 식량과 약간의 돈에 란츠크네히트부대의 근간이었던 공동결정권을 넘기고, 자유전사로서의 정체성마저 잃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만스펠트의 방식을 보다 대규모로 수행하고, 결국 약탈행위라고 하는 흉악한 범죄를 효율적이고 합법적인 약탈기구로 변질시킨 것이, 사상 최대이자 최후의 용병대장, 발렌슈타인이었다.


4. 15만명의 군대를 조직한 용병대장


30년전쟁은 이제 제2기인 덴마크전쟁으로 들어간다. 첫번째 전쟁에서 승리를 얻은 황제 페르디난트2세는 보헤미아와 합스부르크세습령 내의 프로테스탄트귀족들에게 피의 숙청을 가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중간권력을 뿌리뽑아 황제의 권력독점을 강화시킨다. 


그 상징적인 조치로 페르디난트는 팔츠선제후 프리드리히5세의 선제후위를 박탈하고 그 직위를 보헤미아반란의 진압에 공이 컸던 바이에른후작 막시밀리안에게 주었다. 이 사건은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1356년 당시 황제 카를4세가 선포한 금인칙서 이래 그 지위를 유지해온 선제후의 지위를 황제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은 황제권력의 독점에 대한 불안감을 확산시켰다.


전쟁에 지고, 보헤미아 왕위도 빼앗기고 게다가 대대로 이어온 선제후위마저 빼앗긴 팔츠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와 손을 잡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권력독점에 대한 위험성을 신성로마제국과 그 주변국가에 경고했다. 


그리하여 또다시 병사를 모으기 시작하였고,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의 지원을 받으며 덴마크왕 크리스챤4세가 직접 참전하였다. 이렇게 페르디난트2세의 선제후위 변경은 30년전쟁의 제 2라운드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 덴마크왕을 중심으로 하는 프로테스탄트진영의 주력은 만스펠트가 이끄는 용병부대였다. 한편 카톨릭군의 총수는 맹장 틸리였다. 틸리는 바이에른후작 밑의 장군으로서 군의 편제는 바이에른후작이 총수로 있는 리그(구교도연맹)의 금고에서 이루어졌다. 




<틸리>


이러한 점에서 틸리는 기업가형 용병대장이라기 보다는 상비군시대의 장군=군인귀족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여하튼, 틸리는 프로테스탄트군을 한번에 섬멸하고자 주군 바이에른후작을 통해 황제 페르디난트에게 카톨릭군의 증강을 요청하였다. 황제의 대답은 간단히 "돈이 없다"였다. 


실제로 황제에게는 돈이 없었다. 돈이 없으면 군대를 편성할 수도 없었다. 이때 황제의 돈이 아닌 민간인들에게 돈을 모아 군을 편성하여 황제에게 제공하겠다는 인물이 등장했다. 보헤미아의 소귀족으로 보헤미아반란 당시 잽싸게 황제군에 붙어 두각을 나타낸 발렌슈타인이었다.




<알렌슈타인 폰 발렌슈타인>


발렌슈타인은 5만의 병력을 제공할 것을 신청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자금은 민간투자가가 제공하였다. 네덜란드의 은행가 한스 디 빗테 등을 대표로하는 민간자본에 제공한 자금과 발렌슈타인 스스로 자신의 영지에서 머스킷총, 화약, 탄약, 모토, 군화 등의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장을 경영하여 군수물자를 제공, 자신의 군대를 조직하였다. 그의 군대는 무기상인의 납기에 좌우될 필요도 없었고, 장비의 통일도 상당히 진행된 군대였다.


한가지 의문은 과연 민간투자가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자금을 회수할 생각이었냐는 점이다. 그 문제는 간단하였다. 앞서 설명했던 만스펠트의 "일상적인 약탈"을 몇배의 규모로 실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약탈은 더이상 약탈이 아니었다. 


발렌슈타인은 병력의 제공과 맞바꿔 황제 페르디난트에게 점령지에서의 징세권을 얻어낸 것이었다. 따라서 발렌슈타인군의 약탈은 합법적인 전쟁세금으로 변한 것이었다. 이른바 군세라고 하는 이 시스템은 그야말로 가혹 그 자체여서, 숙영지 주변의 주민에게 병사들의 급료에 해당하는 세금을 거두고, 열병지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모병시 필요한 금액에 해당하는 세금을 거두었다. 더욱이 열병지, 숙영지로 지정되면 병사들의 약탈할 것을 두려워한 도시와 마을들이 면제를 요청하면 면제세를 따로 받았다.


당연히 이러한 발렌슈타인의 행동에 피해를 입은 지역의 영주들은 불만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어느새 발렌슈타인의 군대는 15만의 병력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선제후를 비롯한 유력 제후들조차 발렌슈타인의 행동을 제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발렌슈타인군의 용병들은 임시직이 아니어서, 제대할 걱정도 없었고, 무기도 통일되었으며 급료도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더이상 자유전사라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발렌슈타인에게 절대 충성하며 엄격한 군율에도 복종하였다.


발렌슈타인의 황제군과 틸리가 이끄는 구교도연맹군은 그 압도적인 군세로 덴마크왕 크리스챤4세를 독일에서 몰아내었고, 만스펠트군은 섬멸, 만스펠트 또한 목숨을 잃었다. 


30년전쟁의 제 2라운드에서도 승리한 황제 페르디난트는 신성로마제국사상 유래없는 황제 독점권력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승리의 기반이 된 압도적인 대군은 황제의 군대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용병대장 발렌슈타인의 사병에 불과했던 것이다. 실제로 발렌슈타인은 점령지에서의 징세권이라는 처음의 조건을 확대해석해서 자신의 이름으로 징세권을 행사, 막대한 군세수입이 발렌슈타인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된다면 황제 자신이 발렌슈타인의 세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 페르디난트에게 있어서 발렌슈타인이 만든 군세 시스템을 황제자신이 이용한다면, 막대한 세금은 황제의 금고로 들어가고, 거기서 편성되는 군대는 글자그대로 황제군이 되는 것이었다. 한편 바이에른후작을 비롯한 카톨릭편 제후들로서도 황제의 권력독점은 그들 자신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황제군의 총수이자 황제에게 있어서 중요 인물이었던 발렌슈타인의 사임을 요구하게 된다. 이와 같이 황제와 각 제후들의 생각이 일치하게 되면서 발렌슈타인은 황제군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카톨릭진영이 프로테스탄트진영에게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전황이 바뀐다면 그들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힐지 모를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30년 전쟁의 전황은 바뀌기 시작한다. 스웨덴왕 구스타프 아돌프의 참전으로 30년 전쟁의 제 3라운드가 시작된 것이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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