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방면의 소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031년, 서쪽에서는 아프리카와 시칠리아의 사라센 인들이 그동안에도 종종 침입해왔던 것처럼 일리리아 지방과 코르푸 섬을 약탈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라구사 인들과 나우플리아 시장에 의해 대부분의 함대가 격침되면서 물러났습니다.
그 다음해에 이들은 더 많은 함대를 동원해 재침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의 기록을 믿는다면 1천척의 함대와 1만 명의 군대를 동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 부대로 편제된 이 군대는 나우플리아 시장인 니케포라스 카란테노스에게 재차 격파되었으며 1천명의 죄수들은 콘스탄디누폴리로 압송되었습니다.
이에 해적질에 대한 응징으로 1033년, 프로토스파타리오스인 테크니아스가 이끄는 제국 함대가 이집트 해안에 상륙하여 막대한 약탈품을 취하였으며 많은 포로를 잡아들여 귀환하였습니다.[2]
[1] 존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2: 번영과 절정』 pp.473-476
[2] George Finlay, The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from 765 to 1057(http://kingdom-of-heavens.org/MedievalHistory/Byzantine-Empire/Finlay/B2-C3-S2-A-ROMANUS-III.html)
[3] 달라세노스는 콘스탄디노스 8세가 자신을 지명했음에도 관료들의 압박으로 로마노스가 즉위한 데 앙심을 품고 있었고 로마노스 사후, 미하일 4세 때의 정세에도 관여되어 있습니다.
[4] 조이는 48세에 60대의 로마노스와 결혼했고, 54세에 10대 미소년인 미하일과(;;), 61세에는 미하일 칼라파테스를 양자로 들였고 62세에는 콘스탄디노스 모노마코스와 결혼하였으며 아마도 70세를 전후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출처] 비잔티움 쇠망사 #3|작성자 물의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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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물의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