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 마약의 역사 (39) 임칙서의 등장
1839년 9월, 오늘날의 홍콩 서쪽 항구 쪽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함선들은 중국의 전함들에 의해 봉쇄되었다. 이에 엘리어트는 사자(使者)를 통해 두 통의 서한을 보냈다. 한 통은 위협을 철회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한 통은 영국이 물을 퍼 올리는 현지 마을의 우물에 독을 넣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거절당하고 말았다. 엘리어트는 최후 통첩을 보냈지만, 이것 역시 무시되었다. 그러자 영국인들은 중국의 전함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구룡전투로 알려진 이 교전은 <타임스(The Times)>지가 1840년 4월 25일 ‘아편전쟁’이라 명명한 전쟁의 서막을 장식했다.
청나라 배를 공격하는 영국 군함 네메시스 호
당시 전투의 모습
영국인들의 공격은 비록 중국 전함들의 봉쇄를 푸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11월 3일 추엔피 전투에서 영국 전함 프리깃은 중국의 전함들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로써 유럽의 우위가 입증되었으며, 전쟁은 본격화되었다.
청나라의 군함
1841년 1월, 엘리어트는 보우그 요새를 공격하기 우해 다섯 척의 전함들을 출정시켰다. 격렬한 전투 끝에 보우그 요새는 영국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엘리어트는 전쟁을 종결지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중국 정부를 상대로 추엔피 협정을 추진했다. 육상 기지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 엘리어트는 이 협정을 통해 홍콩 섬의 할양을 중국 정부에 요구했다. 그의 요구는 충족되었지만, 본국에서는 엘리어트가 보다 광범위한 조차지들을 요구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1841년 영국 함대의 공격
전쟁은 일련의 작은 전투들로 채워졌다. 시대에 뒤떨어진 무기와 전술로 일관한 중국은 전투마다 쓰라린 패배를 보았다. 하지만 많은 군인들이 전투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보다는 전염병으로 고생해야만 했다. 실제로 1840년 4월 실론 섬(인도반도 남동쪽에 위치한 섬. 지금의 스리랑카)에서 건너온 1만 명의 영국군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보다는 말라리아나 이질 등으로 사망한 군인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
런던도 베이징도 직접적인 제어를 하지 않은 이 전쟁은 영국이 상하이를 점령하고 양쯔강(揚子江)을 거슬러 올라가 난징(南京, 양쯔강 하류에 위치한 중국 제2의 도시)에 도착한 1842년 8월까지 굉음을 뿜어댔다.
이후 전쟁의 종결을 알리는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이 영국의 군함 콘월리스(Conwallis) 선상에서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그동안 세계 중심이라는 중화적 자부심이 가득했던 중국인들에게 치명타를 가하기에 충분했다.
아편전쟁 당시 광저우를 공격하는 영국군
난징조약은 전에 없이 중국을 개방시켰다. 광저우,푸저우,샤먼(厦門),닝보(寧波),상하이의 빗장이 열리면서 교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각광받게 되었다. 그리고 임칙서에 의해 파기된 아편에 대해 2,100만 은화 달러를 배상하였고, 홍콩이 할양되었다.
광저우의 행(行) 상인들은 독점의 지위를 잃었으며, 영국으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물품들에 대한 관세가 확정되었다. 하지만 아편은 어느 협상에서도 언급조차 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아편 교역은 공공연하면서도 은밀하게 지속되었다.
아편 교역량이 해가 갈수록 증가하자 영국 의회에서는 아편 교역에 대한 비판이 보다 강하게 제기되었다. 다음은 1843년 샤프스베리 백작이 주장한 내용이다.
나는 이 사악한 교역이 과거 시행되었던 노예 교역보다 더 극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 사악한 교역을 묵인하고 급기야 장려하는 것은 곧 사랑하는 내 나라를 죽이는 것이며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편전쟁은 동아시아를 장악하기 위한 제국주의의 수단에 불과했다. 아편 밀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영국인들은 이 전쟁으로 인해 중국의 개방이 촉진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서구 제국주의가 아편을 통해 중국을 병들게 했으며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토마스 아놀드 박사는 아편전쟁을 국가의 중대한 죄악이 될 수 있을 만큼 사악한 것이라고 규탄했으며, 글래드스턴은 그것을 부정한 하나의 전쟁, 이 나라를 영원한 불명예의 늪에 빠지게 한 계산된 전쟁이라고 비난했다.
아편전쟁은 중국에게 엄청난 경제손실을 입혔고, 영국에게는 국제 지위를 실추시킨 채 종지부를 찍었다. 전쟁의 동기와 과정이 어찌되었든 누군가는 전쟁의 책임을 져야만 했다. 결국 부패한 중국정부의 관료들, 교활하고 부도덕한 아편 상인들, 군사력을 자랑삼아 휘둘렀던 영국인들은 전쟁을 진두지휘한 사람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켰다.
결국 아편전쟁의 주인공이자 정치적인 피해자였던 임칙서와 엘리어트는 정부와 정적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특히 황제는 야만인들을 몰아내는 데 실패한 것에 대해 임칙서를 맹렬히 비난하며 1841년 5월 3일 귀양을 보냈다.
하지만 임칙서는 불가능한 임무에 대해 자신의 식견과 경험을 아낌없이 발휘한 훌륭한 인물이었다.
엘리어트 또한 영국 정부의 욕심보다 훨씬 적은 전리품을 패전국에 요구해 정부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임칙서가 귀양길에 오른 것과는 달리 엘리어트는 새로이 성립된 텍사스 공화국에 영국의 대리대사로 임명되었지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좌천이었고, 정치적인 귀양이었다. 엘리어트는 그 뒤로도 버뮤다, 트리니다드(서인도 제도 남동부에 자리한 섬), 그리고 세인트헬레나(아프리카 대륙 서쪽 남대서양에 자리한 섬)의 총독 자리를 전전하다가 1857년에 사망했다.
아편전쟁은 끝났지만 영국과 중국 사이에 이루어지는 아편 교역에 관해서는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 불안정하게 남아 있었다. 아편 교역은 새롭게 개항된 다섯 개의 항구들과 새로운 식민지 홍콩에 의해 오히려 확대되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아편과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지 못한 중국과 아편전쟁의 불법 행위로 인해 국제적인 지위가 격하된 영국은 최대 피해자로 남게 되었다. 결국 아편만이 이 전쟁에서 유일한 승리자로 기록되었다.
이하는 사설입니다,//
우선 이 글의 첫번째 그림은 당시 횡횡하던 중국해적 소탕에 관한 그림입니다.
또한 청나라 조정은 아편전쟁의 패배를 "병가의 상사(전쟁을 하다보면 으레 있는 일)"로 여겼을 뿐, 중화체제의 우위에는 큰 위기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오는 것은 좀더 나중의 일로, 이르게 잡아야 영불연합군이 북경의 외항인 천진까지 올라온 '제2차 아편전쟁'이고- 늦게 잡으면 '의화단의 난, 8국연합군 북경 진주'일 겁니다.
1840년 11월의 1차 전투에서 영국 프리깃이 청나라 수사(水師)에 타격을 입혔고, 이것이 유럽의 우위가 입증되었다고 하셨는데, 사실 이때의 충돌은 임칙서의 준비로 인해 영국인들이 광주에서 물러남으로써 일단 청나라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게다가 청나라 조정 자체가 아편전쟁의 패배를 가볍게 여기던 것이 전쟁 후에도 나타나는 마당에- 초전, 게다가 청군이 일단 작은 승리를 이룬 상황인데, "유럽의 우위가 입증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성급한 감이 있지않나 합니다..
물론 유럽이 동양을 이긴 사례는 맞습니다만 청나라 전체적인 상황으로 보면 1차 아편전쟁의 여파가 '중화체제의 패배'를 자인할 정도가 되기는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워낙 대국이라, 아편전쟁은 처음에 먼 변방인 "광동(廣東)의 소요" 쯤으로 여겨졌지만, 영국군이 남경에 육박하면서 일이 급해집니다. 물론 청나라 조정은 꽤나 충격을 받았지만, 영국군이 물러가자 안정(?)을 찾게 됩니다.;
그러면서 1차 아편전쟁은 그저 변수가 무수한 전투에서의 "일상적인 실패(병가상사)" 정도로 치부됩니다. 전쟁에서 개발살났지만, 더러운 양이들의 우월성을 인정할 맘은 눈꼽만큼도 없었던 것인데
이건 영국도 마찬가집니다. 영국은 노쇠한 청국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승기를 잡았지만- 의외로 전후처리에서 매우 소극적인 입장을 보입니다. 윗글에도 등장하는 엘리어트는 본국으로부터 영국의 권익을 더욱 강하게 추구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결국 다소 소극적으로 임했기 때문에 나중에 본문에 나와있듯이 좌천당하고 맙니다.
그는 일선에서 일한 경험자였으니, 중국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영국쪽에서도 중국의 노쇠함을 알고는 있었지만, 의외로 그 '국력'에 대한 경외는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