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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의 역사 (39) 임칙서의 등장
게시물ID : history_50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2
조회수 : 126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7/16 23:04:59

지난 글 : 마약의 역사 (38) 무력한 칙령과 흔들리는 은본위제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istory&no=5027&page=1&keyfield=&keyword=&mn=&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5027&member_kind=



아편에 대한 사회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 속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1839년 초에 시작되고 있었다. 황제는 아편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임칙서(林則徐)를 전권대신으로 임명하고, 아편 교역을 철저히 근절케 했다. 


1785년 푸저우에서 태어난 임칙서는 1811년 베이징학당을 졸업한 아주 지적이며 덕망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유능한 행정관으로 부패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가 전권대신에 임명된 데는 자신이 관할하던 후난성(湖南省, 중국 중남부에 자리한 省)에서 아편 교역을 성공적으로 근절시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칙서                                후난성


임칙서는 황제를 납득시키기만 한다면 아편 밀매로 발생하는 일련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청을 황제에게 했다. 


그의 요구사항은 외국인이든 중국인이든 간에 모든 밀매업자들을 중국의 법률 아래 똑같이 처벌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임칙서의 강경함과 경험을 굳게 믿으며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후 임칙서는 중국 군대의 최고 통제권을 가진 총독 자격으로 광저우에 파견되었다.




중국 광둥성 둥관시 '아편전쟁 기념관'의 임칙서 동상

 

1839년 3월,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가장 먼저 악명 높은 아편 범죄자들을 체포하고, 모든 아편 거래를 즉시 중단할 것을 명하였다. 또한 모든 상인들에게 아편 밀매 중지 서약서와 아편 재고품을 사흘 이내에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외국 상인들에게도 이전까지 그들이 누렸던 권리는 단지 중국 정부의 호의에 의한 것이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위 사항을 똑같이 적용시켰다. 이와 함께 외국 상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공행(公行) 상인들에게 강력한 조치가 취해질 것임을 선언하며, 그들 가운데 외국인과 공모한 사실이 입증된 상인들을 처형했다.

 

예상치 못한 강경한 조치에 외국 무역업들은 당황했으나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스쳐지나갈 폭풍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들은 중국의 국내법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임칙서가 행하는 강력한 조치로부터 안전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사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임칙서는 함선들을 보강하여 잦은 순찰을 하였으며 외국인들이 마카오로 떠나는 것을 금지하였다.

 

한편 아편 재고품을 모으는 데 좀더 시간을 달라던 상인들은 임칙서의 요구를 무마시키기 우해 1,037상자의 아편을 모아 바쳤다. 그러나 이들의 조치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고, 바로 다음날 상인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거대 무역상사인 덴트앤드컴퍼니의 창립자 윌리엄 덴트의 아들도 소환되었다.

 

사태를 관망하던 엘리어트는 모든 영국의 배들을 홍콩 섬의 북서 지역에 집결시키고, 자신은 외국인들과 함께 공장을 지켰다. 그러자 임칙서는 중국인 노무자들을 철수시키며 공장을 봉쇄했다. 이후 식량 공급이 중단되자 엘리어트는 어쩔 수 없이 임칙서의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자신들의 손해를 영국 정부가 보전해 줄 거라는 믿음으로 엘리어트의 결정에 따랐다. 그해 5월, 아편 재고품 2만 283상자는 임칙서에게 전부 넘겨졌다. 임칙서는 자신이 이루어낸 성과에 놀라움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중국인들은 아편 밀매와 전쟁에서 승리한 임칙서를 칭송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엘리어트 주도 아래 아편이 임칙서에게 넘겨졌지만, 영국 정부의 뜻이 반영된 상태는 아니었다. 영국 정부가 이러한 사태를 알기 위해서는 수개월이 걸려야 했다.




아편을 소금,석회와 혼합하여 강물에 폐기하는 장면

 

아편 밀매를 성공적으로 근절시킨 것에 고문된 임칙서는 공장들에 대한 봉쇄를 풀고, 합법적인 물품거래의 재개를 허락하였다. 또한 외국 상인들이 마카오에 있는 가족들과 만날 수 있도록 봉쇄를 풀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그가 저지른 첫 번째 중대한 실수였다. 엘리어트는 아편 문제가 부분적으로 해결되자 영국 상인들을 재빨리 마카오로 철수시켰다. 외국 상인들 또한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임칙서의 요구에 응했을 뿐 궁지에서 벗어나자 어떠한 서약서에도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홍콩 개방의 역사중 일부인 아편전쟁의 발단이 된 아편을 모두 태워버린 사건을 묘사한 미니어쳐


임칙서가 저지른 두 번째 실수는 시장의 힘과 중독의 힘을 계산하지 않고, 몰수한 아편들을 모조리 없애버렸다는 점이다. 그는 호기롭게 아편을 제거했지만, 아편 중독자들의 욕구마저 제거하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아편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게 되었다. 이런 실수에도 아랑곳없이 임칙서는 외국인들에 대한 제재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39년 6월,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다수의 술 취한 영국인 선원들이 구룡반도의 한 마을에 상륙해 행패를 부리다가 중국인 농부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임칙서는 영국인 선원 토머스 티더를 살인자로 지목하고 중국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엘리어트는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직접 심문했지만, 실제로 누가 살인을 했는지는 입증할 수 없다는 입장만 강변했다. 


임칙서는 엘리어트의 행동에 분노했다. 그는 중국 형법을 토대로 중국인의 죽음에 대한 대가로 영국인의 생명을 원했다. 하지만 엘리어트는 이를 거부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임칙서는 엘리어트의 행동을 자신과 황제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하고,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참혹한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8월에 접어들자 임칙서는 외국과의 모든 교역을 중단시키고, 광둥의 공장들을 다시 포위했다. 그리고 영국 상인들과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마카오로 군대를 결집시켰다. 이에 엘리어트는 모든 영국인에게 홍콩 앞 바다에 정박해 있는 상선들에 승선할 것을 명령했다. 


임칙서는 현지 주민들이 선박들에 양식을 공급하는 것을 금했고, 어떤 외국인이든지 육상에서 발견되면 현장에서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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