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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쇠망사 (4)
게시물ID : history_50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2
조회수 : 107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7/16 09:29:11
지난 글 :  비잔티움 쇠망사 (3)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istory&no=5017&page=2&keyfield=&keyword=&mn=&nk=Lemonade&ouscrap_keyword=&ouscrap_no=&s_no=5017&member_kind=

퇴각하는 와중에서도 황제는 실수를 남발합니다. 대낮에, 모든 군막과 보급품과 각종 무기기계를 적의 노획품으로 놓아두고 진을 파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이 재물들이 사라센 인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에 도주하는 군대는 대부분 안전하게 1030년 8월,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였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원정에 콘스탄디노스 달라세노스(콘스탄디노스 8세가 차기 황제로 지명하려고 생각했던 바로 그 달라세노스로 안티오키아 공작을 역임할 정도로 이 지역의 유지였습니다)가 참여했으며 여기서 음모를 획책한 것도 이 패배의 한 요인이라고 합니다만 쨌든 주요 원인은 황제의 군사적 무지였습니다.


 잠깐 동안 군사적 명예에 대한 열정을 가졌던 황제는 이제 서둘러 수도로 돌아가려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남겨둔 장군들은 황제만큼이나 무능력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메니크 요새 하나조차도 수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마침내 외국 용병을 지휘하는 테옥티스토스에게 국민군과 외국군으로 강화된 상당한 지원군을 딸려 파견하면서 조금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테옥티스토스는 시리아에서 이집트의 힘이 강력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시작한 트리폴리스의 토후와 동맹 전선을 형성하였고 메니크 요새를 수복하였습니다. 트리폴리스 토후의 아들인 알라흐는 로마노스의 궁정을 방문하여 로마인들의 정치, 종교적 사상을 일부 수용한 후 ‘로마인의 파트리키우스’의 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1029~1032년 경의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정세


 이 전투에 참여했던 사라센 기병 800여기가 안티오키아 북쪽에 위치한 도시 텔루크 시에 항복하라는 위협을 가하였는데 텔루크 테마의 군사 총독이던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는 겁 먹은 척 적들을 대접하여 긴장을 풀게 한 후 순식간에 도륙내어 그 귀와 코를 잘라낸 후 이 선물(?)을 들고 패주 중이신 황제를 찾아 여정을 떠났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날 때까지 겨우 카파도키아까지 도망간 황제는 이 선물에 크게 기뻐하며 마니아케스를 일약 하 메디아의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이로써 조그만 군관구의 총독이 대도시 사모사타를 포함해 유프라테스 상류 유역의 모든 도시를 관할하는 중요한 총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중용이 시리아 원정의 최대 성과이자 로마노스 3세가 제국에 주었던 가장 큰 업적이자 선물이 되었습니다.


  1031년 사라센 인들은 메소포타미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멜리테네에 이르는 지역을 유린하였습니다. 그러나 1032년, 마니아케스는 미아르페킨(마르티로폴리스) 토후에 소속된 에데사의 통치자를 매수해 점령하려 했습니다. 그


러나 도시 방어벽의 탑 세 개를 제국군이 점령했을 때 에데사의 주민들이 탑에 오른 군대를 집중 공격하였으며 동시에 제국군 후방에서는, 마니아케스를 밀어내기 위해 서두르는 미아르페킨 토후, 아포메르만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탑을 수복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마니아케스의 지원군이 접근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라센 군은 에데사를 불태우며 포기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에데사의 주택 대부분과 거대한 교회가 불타버렸습니다.


  11세기 초엽에는 여전히 바그다드 칼리파 국이 와해된 상태였으며 튀르크 용병들이 실권을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각지의 토후들로 하여금 로마에 속신하도록 촉진했습니다. 알레포의 토후는 자신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다시 로마의 조공국으로 들어왔고 대단히 중요한 요새인 페르크린(혹은 페르크리) 토후, 알레임이 항복해왔습니다. 


불가리아 출신 파트리키오스가 지휘하는 6천 명의 로마 군이 이 전진 기지를 방어하기 위해 배치되었는데 대우에 불만을 품은 알레임은 페르시아와 다시 내통하기 시작하여 이들에게 페르크린을 바치려 했습니다. 주둔군은 기습을 당하여 도주하였으나 강력한 국민군과 러시아 용병들이 다시금 해당 지역을 수복하고 알레임을 죽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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