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 마약의 역사 (36) 아편 교역의 성장
1833년 인도 법령이 중국에 대한 동인도회사의 교역 독점권을 폐지하자 그동안 독점권을 갖고 온갖 이권을 챙겨왔던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광둥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아편으로 생기는 이권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동인도회사가 철수하자 중국과 아편 교역을 하는 영국인들은 여러 가지 불편을 겪게 되었다. 특히 아편의 원활한 공급과 그에 따른 관리의 문제점 때문에 교역 감독관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영국 정부에서는 직업군인이었던 윌리엄 네이피어 경을 최고 감독관으로 임명하여 중국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네이피어는 아편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우지 못한 사람이었으며 중국과 아편 교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윌리엄 네이피어 경
그는 광둥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이제까지 이어졌던 관례를 무시하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보통 신임장 전달은 중국 상인을 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그는 이를 지키지 않고 태수에게 직접 신임장을 제출하는 결례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태수는 네이피어의 이러한 행동을 문제 삼아 신임장을 거부하였으며, 이 때문에 아편 교역이 중단되고 공장들은 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이 커지자 네이피어는 린틴 섬과 가까운 곳에 정박돼 있던 두 척의 영국 군함에 급히 신호를 보내 광저우로 향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영국 군함들은 강어귀를 방어하던 보그(Bogue) 요새와의 교전으로 광저우에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 네이피어는 결국 태수에게 간청해 마카오로 퇴각한 뒤 포르투갈인들이 관할하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첫 번째 감독관으로 임명된 네이피어는 이렇다 할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마카오에서 죽음을 맞았다.
네이피어의 사건을 통해 외국 상인과 아편에 대한 중국인의 반감이 더욱 강해진 것을 느낀 다른 감독관들은 아편과 관련된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아편과 관련해서는 중국 황제의 칙령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감독관으로 파견되었던 조지 로빈슨 경은 아편 밀수를 감시하기 위해 린틴 섬에 주재했다. 그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강경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제국(영국)의 정부가 영국 상선들의 부정한 거래를 막도록 지시할 때마다 우리는 그러한 취지에 부합하는 어떠한 명령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확실한 방법은 영국령 인도에서 양귀비 재배와 아편 생산을 금지하는 일일 것이다.
조지 로빈슨 경
그러나 아편 교역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영국 의회와 파머스턴(영국의 정치가.1784~1865 ) 외상은 로빈슨의 청원에 대한 대답으로 그를 면직시켰다.
그의 후임자인 찰스 엘리어트 선장은 중국과 영국의 역사에 큰 변화를 만든 사람이다. 그는 영국에서 해군으로 복무했고, 영국령 기아나(남아메리카 대륙 북동부의 나라. 현 이름은 가이아나)에서는 노예들을 관리했으며, 네이피어 경의 전속 함장이기도 했다.
그는 처음부터 중국과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그에게 아편 교역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요구했지만, 영국 정부의 지시는 적법한 교역만을 통제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아편 교역은 적법한 교역이 아니었다. 이처럼 서로의 요구가 다른 상황에서 그는 영국 상인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대표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를 중국 정부에서는 아편 밀수업자들을 보호하려는 술책으로 판단했다. 민감한 상황에 놓인 엘리어트는 영국 정부에 적극적인 문제 해결을 요청했지만, 기대할 만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파머스턴 경
1838년에 들어서자 중국 정부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상황을 악화시킨 중심축에는 영국 상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계속되는 중국 정부의 규제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중국은 국제교역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또한 중국인들을 노골적으로 괴롭히는가 하면, 심지어 린틴 섬을 거치지 않고 광저우로 직접 향하기도 했다.
이 같은 영국 상인들의 자극적인 행동은 중국 정부에 대한 조롱의 표시였으며, 다른 나라 상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영국 정부와 상인들 사이에서는 아편에 대한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중국과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영국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그동안 차전(茶錢,뇌물)으로 자기 잇속만 챙겼던 광저우의 태수와 총독은 방관만 할 수 없었다. 만약 이들의 방관자적인 태도가 주변의 정적들을 통해 황제에게 보고된다면 그들의 안위는 결코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들은 소극적이나마 영국 상인들을 단속했고, 영국의 아편 상인 아홉명에 대해 추방령을 내렸다. 하지만 영국 상인들은 이 같은 조치에 코웃음만 칠 뿐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광저의 태수 역시 그들을 강제추방시키기 위한 어떤 후속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태수의 행동은 그저 자신의 정적들에게 중국 정부에 충성하고 있다는 것을 보인 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사태는 심각하게 흐르고 있었다. 1838년 12월, 왐포아의 앞바다에서 육상으로 아편을 나르던 영국 노무자들이 중국 세관에 체포되어 공개 처형되었다. 또한 외국인들의 유일한 산책 장소인 공원에서 중국의 상급관리가 아편 밀매상을 끌고 와서 십자가 처형식을 하려고 하였다.
중국 정부는 이를 통해 영국 정부에 대해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술 취한 일단의 영국인 선원들의 난동으로 공원에서 벌어지던 처형식은 중단되었고, 중국의 상급관리는 심한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중국인들의 외국인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기에 충분했으며 삽시간에 무성한 소문을 만들며 퍼져나갔다. 일부 중국인들은 외국인 공장의 문과 창문들을 부수며 이 사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으나 출동한 군인들에 의해 곧 해산되었다. 하지만 긴장감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공원 안에서 벌어진 처형식 사건 이후 중국 정부는 구겨진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1839년 2월 26일에 아편 밀매상을 미국인의 공장 앞에서 처형시켰다.
대 초기 중국의 처형 모습
아편 교역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었지만 엘리어트는 수개월이 지나도록 런던으로부터 아무런 지침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사태를 중재하고 원만히 수습하려 했지만, 이제까지의 사건은 단지 폭풍전야의 산들바람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