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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쇠망사 (3)
게시물ID : history_50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4
조회수 : 112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7/14 21:02:14

지난 글 : 비잔티움 쇠망사 (2)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istory&no=5009&page=1&keyfield=&keyword=&mn=&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5009&member_kind=


비잔티움 쇠망사 #3


우스꽝스러운 통치자(2)


  위대한 시대와 영웅은 많은 사람들의 찬탄을 받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회자되면서 그것이 문자 기록이든 음성의 구전적인 특성에 기반을 둔 기억에 의해서든 장구한 세월동안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위대함 때문에 그 이후에도 국가의 위정자나 통치 계급은 과거에 실존한 거인들을 과도하게 의식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행동을 종종 하기도 하며 결국 그러한 부담감이 도리어 한 시대의 끝을 가져오기도 하지요. 


바로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11세기 초에 실제로 구현되었습니다. 물론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순 없으나 오늘날 최종적인 결과를 알고 있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이 또한 한 조짐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노스 3세 시대 기준 금화($1250짜리)


  사실 로마노스 아르기로스는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바실리오스 2세부터 콘스탄디노스 8세 시기에 이르는 시기에 고등법원 최고 판사이자 콘스탄디누폴리 시장을 역임한 것은 행정 사무와 법리에 대해 능통하거나 최소한 무지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성격 자체가 온화하였습니다. 로마노스 3세 시기에서부터 학문과 예술의 진흥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보면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 교양인은 후대에 무지막지한 혹평을 듣는 인물로 전락하고 맙니다.  왜? 바로 부담감과 이에 대한 대응인 과도한 자신감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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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그리스 문학에 익숙했고 이탈리아인들의 문학 작품에도 소양이 있었다. 그의 말솜씨에는 기품이 흘러넘쳤다. 어느 모로 보나 그는 황제로서의 당당한 위풍을 지닌 사람이었다. 자신의 폭넓은 지식을 자랑하는 것은 크게 과장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과거의 위대한 안토니네스*를 본받아 ...... 학문의 연구와 전쟁 기술의 두 가지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전쟁 기술에 관해 그는 완전히 무지했고 학문에 관해서도 깊은 지식을 지니지 못했다. ...... 자신의 지식에 관한 과도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지적 한계를 넘어간 탓에 그는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

* 안토니우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이르는 말.

미하일 프셀로스, <<연대기(Chronographia)>> 3권 39쪽 로마노스Ⅲ, 2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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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셀로스가 일컫는 것처럼 로마노스는 자꾸 자신의 지적 한계를 넘는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⓵‘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철학자였다면 나도 철학자다.’ 이러면서 신학과 형이상학의 난제들을 가지고 씨름을 한 것은 그 시초였습니다. 


물론 삼단 논법이나 변증법의 기초도 갖추지 못한 양반이 무슨 난제를 풀기란 애초에 그른 상황이었죠. 그리고 ⓶‘아우구스투스나 콘스탄티누스가 왕조를 창건했다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각종 묘약과 최음제를 먹고 연고를 바르며 특별 비법을 행하였습니다. 


조에 역시 5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위해 사슬로 몸을 감싸고(?) 괴상한 부적을 지니고 우스꽝스러운 주문을 외워댔습니다. 당연히 임신이 될 리가 없었고 ‘황제 부부만 제외하고는 모두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1] 그래도 아직까지 그 피해는 황제 자신의 신망이나 금전적 손해 혹은 골치가 쑤시는 고통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전략가를 자청하고 나섰을 때 그 피해가 급기야 표출되기 시작했습니다. 니케포로스 2세와 요안니스 1세 이후 조공을 바쳐오던 알레포의 토후가 조공 지불을 거부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시리아를 관할하는 안티오키아의 통치자 환관, 스폰딜레스는 제국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군대를 출정시켰으나 1029년 10월 31일에 있었던 전투에서 제국군이 완패함에 따라 졸지에 시리아의 제국령이 트리폴리스와 알레포의 토후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습니다. 토후들의 군대는 안티오키아 성벽에까지 진출하였으며 최근에 안티오키아 근방에 설치된 메니크 요새를 점유하였습니다. 


  이에 로마노스는 제국의 명예를 수복하고자 황제가 군의 선두에 서서 출정하는 친정을 계획하였습니다. 황제의 의부 형제인 콘스탄디노스 카란테노스가 스폰딜레스를 대신하였습니다. 황제가 직접 온다는 소식에 아미르는 즉각 사절단을 파견해 바실리오스 2세에게 지불하던 것과 동일한 조공을 지불하겠으며 피해가 있을 시 보상금도 지불하겠다고 선선히 응하기에 이릅니다. 


황제의 가장 현명한 조언자들은 지금의 계절은 따뜻하고 물이 부족하므로 대부분의 지역이 중무장한 제국군의 군사 전략보다는 아랍의 경무장 기병에게 적합하므로 토후가 굽혀왔을 때 받아들이라고 조언하였습니다. 


그러나 피시디아에서 이들을 접견한 로마노스는 여기서 그냥 물러났으면 나름 잘한 일로 꼽을 수 있겠으나 사라센 군이 그다지 유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오판한 황제는 진군을 속개시켜, 마초와 물에 제국군이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는 사라센 군의 공격을 받은 전초부대가 격퇴되었을 때 안티오키아에서 2일 거리 정도 떨어져 있는 아자즈라는 강력한 요새에 도달하였습니다.


  제국군의 진영을 선택하는 점에서부터 로마노스의 군사학적 무식은 점차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라센의 공격으로 상당한 수의 군사들이 격퇴되었으며 도주하는 병력이 진영으로 도망쳐오면서 광범위하게 무질서가 퍼졌습니다. 이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어떤 시도도 없었으며 이 틈을 탄 사라센 군은 진영 외곽의 참호로 접근하여 제국군을 포위하였습니다. 황제는 이 긴급한 상황에서 매우 무력하였으며 이제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출처] 비잔티움 쇠망사 #3|작성자 물의 백작


[출처] 비잔티움 쇠망사 #3|작성자 물의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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