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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쇠망사 (2)
게시물ID : history_50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4
조회수 : 1170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2/07/13 08:08:56

지난 글 : 비잔티움 쇠망사 (1)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istory&no=5005&page=1&keyfield=&keyword=&mn=&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5005&member_kind=



우스꽝스러운 통치자(1)




 바실리오스 2세(좌)와 콘스탄디노스 8세(우)



  1025년 12월에 바실리오스 2세가 죽었을 때 가장 걱정스러운 점은 망자 이후에 국가를 이끌어갈 새 지도자의 존재였습니다. 바실리오스는 그 흉물스런 외모만큼이나 여성에 대한 취미가 일절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여성에 대한 관심은 없는 답답한 인물이 후계자를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일단의 역사가들이 ‘설마 기록이 유실되어 알려지지 않은 황후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정도이겠습니까? 


일단 여성이든 남성이든 후계자의 권리가 있는 인물이 없다면 장기적으로 국가에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무렵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맏딸인 유도키아는 이미 오래전에 수녀가 되었으므로 제외합니다.



  즉 바실리오스 2세의 동생이자 로마노스 2세의 차남인 콘스탄디노스 8세의 가계만이 남아 있었는데 이미 60이 넘은 콘스탄디노스는 아들은 없고 조이와 쎄오도라의 두 딸만 데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짧으면 몇 년 뒤에는 바실리오스 1세가 개창한 마케도니아의 혈통을 계승할 차세대 후계자가 없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보통의 군주였다면 진작부터 후계가 될 법한 인물을 눈여겨두거나 생각이라도 해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잘 안되려는 조짐인지 콘스탄디노스 8세는 젊은 시절과 똑같이 정치엔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매일같이 연회를 열고 삶을 즐기기에 바빴습니다. 


더군다나 능수능란하게 황제의 권력을 잘 이용해서 여러모로 능률적인 통치를 했던 형과는 달리 새로운 황제는 자기에게 갑자기 주어진 엄청난 권력과 책무를 감당하지 못하여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도전하는 듯한 인물들에게 무자비한 형벌을 가했습니다. 


신체 훼손형이 불구 황제도 나타날 수 있는 전례가 발생하면서 사라짐과 달리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눈을 망가뜨리는 실명의 형벌이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형벌은 이 상황을 꼬집는 이들에 의해 ‘황제의 거룩한 자비’라는 역설적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현실 도피의 삶을 즐길 것처럼 연회를 즐기던 황제는 급기야 1028년 11월, 중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후계자를 선택하지 않으면 황실의 종통이 끊어질 마당이었습니다. 그의 딸인 조이와 쎄오도라도 이제는 결혼 적령기가 지났으므로 더욱 그러했습니다. 


과거 황후에서 황제가 되었다가 쿠데타로 폐위되어 레스보스 섬에 유배된 이레네 여제의 일을 상기해보면 여자 혼자 국정을 맡는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사위를 빠르게 선택해서 제위를 넘겨주어야 나라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국정에 관심이 없던 황제다보니 사윗감을 생각해봤자 중앙 관료 귀족 이외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격렬한 토론 이후 파트리키오스 인 콘스탄디노스 달라세노스가 황제 후보로 추천되었습니다. 그는 힘센 자(아나톨리아 대귀족) 중 한 사람이며 동시에 마케도니아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굳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 중앙 관료들은 일제히 반발했습니다. 


관료들의 강력한 반대에 겁먹은 황제는 달라세노스에게 오지 말라고 한 뒤 관료들이 사윗감으로 추천한 원로원 의원인 로마노스 아르기로스를 선택하였습니다. 그 또한 파트리키오스이자 고등 법정의 최고 판사, 하기아 소피아 교회의 관리자, 콘스탄디누폴리 시장직에 재임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에게는 두 가지 결점이 있었을 뿐인데, 그가 이미 60대 노인이라는 것과 그가 이미 아내를 가지고 있는 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황제가 될 수 없는 인물이지만 어차피 이미 황제도 비정상인 마당에 상식적으로 상황이 전개되겠습니까? 그나마 불러올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이번에는 예비 사위를 체포한 황제는 간단한 질문 하나만 던져줍니다.





 로마노스는 고민에 빠졌지만 그 아내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녀는 지체없이 머리를 깎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버렸고 로마노스는 40대 중반의 조이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인 11월 10일, 로마노스는 마지못해 조이 공주와 결혼하였으며 11월 11일에는 콘스탄디노스 8세가 후계자 문제나 잠시 해결하고 죽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028년 11월 12일, 그 자신이 로마노스 3세가 되어 조이 황후와 함께 제위에 앉아 아직은 흔들리는 기색조차 없이 번영하는 제국의 키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전 황제가 거의 놀이꾼인 것과는 달리 새 황제는 행정 사무에 익숙하고 어느 정도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어느 정도의 부담감-전전임 황제(바실리오스 2세)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던 까닭이니- 때문에 그 현명한 판단력이 흐려졌으며 점차 그러한 실수가 자기 자신의 파멸을 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60년, 상실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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